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참 무딥니다. 그리스도가 반드시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자기에 관하여 쓴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눅24: 22-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 중에 참으로 곱씹어보면 볼수록 난감해지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 는 말씀입니다. 원수는 내게 고통을 가져다 준 자입니다. 내게는 이미 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자리잡고 있기에 그를 향한 어떤 호의도 품기 어렵습니다. 그는 이미 내 가치영역에서 대가를 치러야 할 자로 정죄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불교는 인생을 고통의 수렁으로 봅니다. 인간이 가진 집착이 인간 자신에게 굴레가 되어 삶을 괴로움 덩어리로 만든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 중 대표적인 것 여덟 가지를 일컬어 8고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보기 싫은 사람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는 괴로움이 크지만, 그에 못지 않게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봐야 하는 고통도 큽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가 나란히 인생의 지닌 대표적인 고통 여덟 가지 중에 속해 있습니다.

원수는 기본적으로 꼴보기 싫은 사람입니다. 싫을 정도를 넘어서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할 저주의 대상으로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그런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저 말로 읊조리며 종교적 성화를 논하는 언어적 수사가 아니라,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으로서의 사랑을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저것 계산해서 내게 돌아올 이익을 따져보니, 이쯤에서 용서하는 척 하고 내가 챙길 것을 챙기는 게 낫겠다는 현실적 계산에서 행해진 사랑이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찢으며 행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느냐는 얘깁니다. 그쯤 되면 '너는 배알도 없니' 라는 투의 말에서 시작해 '이 병*아' 라는 욕을 뒤집어 써야 할 상황입니다. 세상에 공의는 없다는 원망도 감수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사실 그런 사랑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항상 손익을 계산하기에 그렇습니다. 누가 이겼느냐, 누가 손해를 보았느냐, 누가 우세하냐 는 헤아림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열과 손익과 승패의 계산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한, 아무리 주판알을 튕겨도 도무지 계산이 나오지 않는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도 좋지만,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용인할 수 없다는 분노를 좀처럼 가라앉히기 어렵습니다.

- 내게 부당한 고통을 입힌 불의한 자가 무사하다면 내가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내게 있는 상식으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부조리한 상황에 접해서 견딜 수 없는 절규로 온몸을 떨어야 하는 절박함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억울함' 이라는 말에 담긴 깊은 상처를 동감하기 어렵습니다. 이래서는 결코 안 되는데,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고 한탄하며 끊어질 듯 넘어가는 숨을 간신히 이어가는 절박함에 접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 맺힘' 이라는 단어에 새겨진 그 아픔의 예리함을 결코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의 삶이 그처럼 처참하고도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끝을 맺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패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수의 조롱과 비웃음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방치해서는 곤란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공의로운 분이시라면 그리고 그 분이 진정 살아 계시다면 세상일이 그리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의 손을 막고 의가 승리함을 보여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향해 품었던 사람들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절망의 현장이었습니다. 유대 기득권층인 제사장들과 로마의 권력이 함께 결탁하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꺾어버린 부조리한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며 지내왔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 허망한 현실 앞에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세상에는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뭔가 새로운 변화와 구원의 손길이 임하리라 믿었건만, 이제 모든 불의가 종식되고 진정 새 날이 오리라 기대했건만, 이번에도 그 꿈은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제자들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십자가에서 고개 숙인 그들의 지도자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결코 살아 계신 예수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품고 기다렸던 승리의 구세주는 더 이상 있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무릎 꿇고 초라하게 죽은 시체와 더불어 패배자 예수가 있었을 뿐입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 하나님의 정의는 초라하게 굴복하고, 희망에 부풀어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했던 제자들은 세상물정 모르고 날뛴 촌뜨기로 전락했습니다. 

백여 년 전 일제의 침략에 직면한 한국 백성들은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며 분노하였습니다. 이 옳지 못한 침략 사태에 대해 미국과 유럽의 양심이 함께 대항해주리라 기대하였습니다. 일제의 식민화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알리기만 하면 새 길이 열리리라 꿈꾸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와 유럽의 양심을 믿었습니다. 한국 독립국임을 만방에 알리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달리기만 하면, 일제의 부당한 침략에 대해 미국과 유럽이 제동을 걸어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헌병의 총알이 그들의 가슴을 관통하는 순간, 그들의 군화발이 여린 가슴을 짓밟고 올라서는 순간, 아무도 그들의 외침에 귀기울이고 있지 않음을 통찰하는 순간, 세상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불의한 자가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하리라는 도덕적 신념은 순진한 환상이었음을 실감했습니다. 약소국의 독립이라는 외침은 시대적 허울이요 강대국 사이에 이해타산을 맞추기 위한 언어적 놀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어디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은 제자들은 예수의 시체가 없음을 보았습니다. 어떤 여인들은 말하기를 예수가 말씀하신 바대로 다시 살아났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의 시체는 없어졌고 살아나셨다는 말은 있으나 제자들에게는 예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영은 여전히 세상에 가리워 그들의 삶 속에서 함께 살아계시는 예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무덤 안은 절망과 고통의 생생함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매일매일 우리에게 닥치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에 한숨짓다 보면 거기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갚아주시리라는 말은 있으나, 이 모든 행사를 다 기억하시리라는 말은 있으나, 네 억울함을 다 들으시며 공의를 베푸시리라는 말은 있으나,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믿지 못합니다. 단지 내가 당한 수모에 치를 떨며 절망할 뿐입니다. '어찌하여 세상 돌아가는 게 이 모양이냐' 고 원망하는 그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은 철저히 가려져 있습니다. 고난에 직면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지경에 빠져버립니다. 다만 고난을 회피하려는 조급함만이 우리를 찌들게 할 뿐입니다. 내가 손해보며 이렇게 당할 수는 없다는 계산만이 우리를 압도할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빈 무덤에서 예수를 봅니다. 그 때 제자들이 보지 못한 예수를, 오늘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고난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직면한 고난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그래서 그 고통을 온전히 수용하고 나면 거기서 우리는 예수를 볼 수 있을까요? 그 고통의 깊은 곳에 들어가면, 그 고통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리 되는 순간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쯤 되면 내게 고통을 가져다 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믿는 자는 빈 무덤에서도 예수를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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