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크게 잘못 아는 것이 있습니다. '큰 것, 높은 것이 능력'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뒤틀린 생각 때문에 너나없이 남보다 크고 높아지기 위해 목숨을 걸다시피 앞만 보고 내달립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의 수고와 땀의 열매가 더 이상 자신을 크고 높게 만들어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되면 하나밖에 없는 천하보다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끊어 차가운 강물 단단한 시멘트바닥에 내던져 버리기도 합니다.

17대 국회의원을 뽑는 4·15 총선이 다가오면서, 여기 저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정치 쇼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선거 전략의 하나로 어느 당이 허름한 공동시장에 당사를 마련하자마자, 또 다른 당은 아예 천막을 치고 길거리에 나앉아 버립니다. 국민 앞에 깊이 사죄하는 심정으로 한다는 짓이련만, 누군가의 예리한 지적처럼 그 엉성하고 허름한 임시당사 앞에는 최고급 외제 승용차들이 어김없이 빼곡이 들어차 있습니다. 요즘은 아예 '민생 투어'라는 낯간지러운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로, 선거 개표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릴 후보들의 속보이는 행진이 계속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정객들은 끊임없이 '이미지 정치'에 골몰합니다. 잘 드러나지 않는 본질보다 빤질한 외모가 사람들의 마음을 훨씬 손쉽게 훔칠 수 있는 귀한 도구가 된다는 얄팍한 세상의 지혜를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잽싸게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일시적인 쇼에 지나지 않을망정, 낯 두꺼운 후보들의 잠시 낮아지는 몸짓을 통해, '큰 것, 높은 것이 힘'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큰 것, 높은 것'이 힘이 아니라, '작은 것, 낮은 것이 힘'

'큰 것, 높은 것'이 힘이 아니라, '작은 것, 낮은 것이 힘'입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작은 것, 낮은 것'에 대한 뼈저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설령 높은 자리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바르고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간교한 방법으로 차지한 크고 높은 자리에서 어쩌다 자기를 위한 큰 일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민족의 영원한 복리와 번영에 기여하는 정말 크고 위대한 일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많은 후보들이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크고 높은 것만을 추구하며 인격도 양심도 신앙도 헌신짝처럼 내차버리며 변신에 변신을, 변절에 변절을 거듭하며 낯뜨겁게 지나온 세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는 도무지 바꿀 재주가 없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여 자기 분수에 넘는 통치행각을 벌임으로써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왕위를 그 아들 요나단에게 넘겨 주지 않고 이새의 막내아들인 다윗에게 넘겨 주십니다(삼상 16). 자기 집 부모형제들로부터도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여 잔칫날 형님들과 함께 식탁에도 앉지 못하고 밖에서 양떼나 돌보며 서성거려야 했던 다윗, 뛰어난 선지자 사무엘조차 처음엔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그 다윗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으로 택하여 기름 부어 세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다윗으로 하여금 참으로 말로하기 어려운 '왕따 경험' '찬밥 경험'을 하도록 만드신 하나님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후에도 참으로 눈물겨울 정도로 그를 낮추셨습니다. 장인인 사울의 살기등등한 추격을 받아 들판과 동굴에서 험하게 나뒹구는 세월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마침내 가드왕 아기스에게 망명하여, 살아남기 위해 이방인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척하며 침을 질질 흘려 간질병이 발작하는 흉내까지 내 가며 질긴 목숨을 이어가야 했습니다(삼상 21). 이처럼 낮아지고 약해진 경험이 없었다면 다윗은 위대한 신정(神政) 통일왕국의 왕,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마 1:1, 6, 마 20:31, 22:42-46)이 결코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다윗, 그의 이 쓰라린 경험은, 예수님의 생애에도 어김없이 되풀이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영광을 버리고 자신을 비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이었지만 인간의 죄악된 형체를 입으셔야 했습니다. 말 구유에서 시작된 삶, 머리 둘 곳도 없이 들판의 여우만도 못한 삶을 끊임없이 사시다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의 은 30냥짜리 미소에 감춰진 배신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나무십자가 위에서 참혹하게 공개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망 권세를 사망하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본래의 존귀한 자리로 우리를 복귀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낮아지시고 눈물겹도록 무섭게 수고하신 것(살전 1:3 참조)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처참하게 실패한 삶은 없을 듯한데, 성경기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 2:15)고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고전 1)이라고 고백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일을 하며 평생을 산 망나니 중의 망나니,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이 끊어져 싸늘하게 식어가는 예수님의 시신을 바라보며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막 15:39)이었다고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합니다.

한때 무서운 핍박자로서 교회을 없애는 일에 헌신(?)하며 피바람을 몰고 다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고백합니다. 말구유에서 시작하여 삼십대 초반의 한창 나이에 나무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끝나버린 삶, 그 비참한 삶의 주인공인 성자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우주의 왕을 삼아, 모든 이들이 그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빌 2). 큰 것, 높은 것이 힘이 아니라, 작은 것 낮은 것이 힘이며, 작고 낮아진 경험이 위대한 능력의 원천이라는 점, 작고 낮아지기를 힘쓰는 이에게 진정으로 높아지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성경이 한결같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작고 낮아져야...남들 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짊어지길 원해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썩어 냄새나는 세상의 소금, 말할 수 없이 어두워진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 작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 교회의 지체된 그리스도인들 역시, 끊임없이 작고 낮아지는 삶을 연습해야 하며, 그 쓰리고 아픈 경험을 가슴속에 산더미처럼 안고 있어야 합니다. 그 쓰리고 아픈 경험이 많을수록 참으로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에도 함부로 겁먹고 뒤돌아 서지 않는 위대한 능력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 크고 많고 힘있는 것을 손에 넣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이고, 복음의 본질을 잘 모르는 사람이 제대로 거듭나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졌을 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일부 탐욕스런 정치인들처럼, 더 커지고 높아지려는 야망을 위해 잠시 낮아지는 시늉을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속이는 또 하나의 추악한 죄를 더 짓는 것입니다. 천국시민권을 지닌 기독교인들은 '진정으로' 작고 낮아지기를 힘써야 하며,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큰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원해야 합니다. 정말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아름다운 경험으로 부활의 능력을 맛보고 그 눈부신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야할 이 땅의 나그네요 이방인들입니다. 더 작고 낮은 삶을 소망하는 삶, 크고 높은 것이 무한한 힘을 발휘하는 세상을 거꾸로 사는 삶은 인간의 결심이나 노력으로 함부로 갈 수 없는 참으로 어렵고도 고단한 길, 성령과 말씀의 능력을 순간순간 덧입지 않고는 결코 걸을 수 없는 험난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진실하고 성숙한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이광우 목사. 이 목사는 지난 3월
"'복음과상황'이 주목한 100인의 그리스도인"에 선정되었다. ⓒ뉴스앤조이 김신
  "주님, 저를 조금만 더 작게 해 주십시오. 조금 더 저를 낮춰 주십시오. 저에게 조금 더 큰 십자가를 질 힘을 주시고, 조금 더 좁고 험난한 길을 담대히 걸을 용기를 주시어 이 땅의 수많은 '소자'들에게 희망이 되게 하시고 이 어두운 역사에 빛이 되게 해 주십시오. 작고 낮아지는 중에 변함없이 신실하게 동행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케 하사, 마침내 부활의 큰 영광에 큰 기쁨으로 이르게 해 주십시오." -낮아짐의 능력(사무엘상 21:10-15, 빌 2:5-11, 골 2:15)-

2004. 4. 9. 고난주간 금요일에.

이광우 목사(전주열린문교회. 시인. 수필가. 생명평화전북기독인연대 공동대표. 전북학복협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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