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장 24절)

오늘 '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삶을 초월하여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멀리 보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지혜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우리의 소망인 천국을 비상하게 도와주는 날개로써 우리를 천상으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의 말씀과 같이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잃어버린 영혼을 보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복음을 기다리는 미전도지의 머나먼 마을들을 보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 때문에 서로 간에 벽이 쌓이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장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비전이 있기에 우리는 바다 멀리 있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그 열매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의 말씀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인생은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슬픔과 고통과 고난과 환난을 극복했을 때만이 그러한 즐거움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제약조건이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아침에 웃고 나갔다가 저녁에 한숨과 절망을 안고 들어오는 일이 많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생에 대하여 시편 62편 9절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전도서 1장 2절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도서 전체의 결론을 내리기 바로 전  전도서 12장 7절로 8절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하시며, 흙으로 빚은 인간은 반드시 그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됨을 역설하며 이땅에서의 모든 것이 헛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시편 62편은 다윗이, 전도서는 솔로몬이 지은 것입니다. 다윗은 7년 6개월만에 이스라엘 통일왕국을 이룩하여 착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린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입니다. 그러나 다윗도 완전한 인간일 수는 없었기에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부하 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는 순간 안목의 정욕은 간음으로 이어졌고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 넣는 살인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버리지 않으시고, 나단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죄를 지적하여 자신의 죄를 눈물로 회개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진정한 회개를 받아 주셨지만 이 일련의 범죄는 다윗의 가정에 비극적인 사건들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다윗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던 교만은 많은 인명을 잃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세금을 거두어 들이고 군사를 확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시지도 않은 인구조사를 실시한 다윗 왕의 범죄로 인하여 7만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쳐 큰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즉시 자복하고 회개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일생을 산 다윗은 하나님께 대표적인 의인으로 인정받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께 수많은 시를 지어 노래하고 악을 선으로 갚을 줄 알았던 다윗의 아름다운 영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감동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어떻게 죽을 지를 아는 인간이었습니다. 

또한 솔로몬 역시 3000개의 잠언과 1005편의 시가를 지어 후대의 본을 보인 인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2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700명의 후비(제왕의 배필)와 300명의 빈장(후궁 즉 왕의 첩들)들을 거느리고 약 40년간 영화를 누린 한 젊은이를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일일분 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석이요 살찐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찐 새들이었더라'라고  열왕기상 4장 22절로 23절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열왕기 상 4장 26절은 '솔로몬의 병거의 말의 외양간이 사만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솔로몬은 신명기 17장 16절로 17절 '왕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의 말씀, 곧 하나님께서 왕이 금해야 할 것 세가지, 말을 많이 갖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지 말며, 은금을 많이 소유하지 말것을 당부하셨는데, 솔로몬은 이 세가지를 다 범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통하여 이 세상의 헛됨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겪어 본 솔로몬이기에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며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승리, 곧 어떻게 죽을 지를 모르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은 칠년만에 건축하고 자신의 궁궐을 위해서는 십삼년을 허비한 어리석은 인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의 "꽃피는 봄날에만"의 시에서 "꽃피는 봄날에만 주의 사랑 있음인가? 열매맺는 가을에만 주의 은혜 있음인가? 땀을 쏟는 염천에도 주의 사랑 여전하며, 추운 겨울 주릴 때도 주의 위로 더할 것은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 더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 아름답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 유혹의 손길 되나, 고생 중에 인내함은 최후 승리 이룩하네"의 아름다운 문장을 알고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 애향원 나환자촌에서 23년간 헌신하고, 1948년 10월19일 여순사건 이틀 뒤 10월21일 손동인, 손동신 두 아들을 천국으로 보내고 자신 또한 1950년 9월 28일 여수에서 인접한 미평에서 공산당에 의해 순교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 두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내 양아들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 주일에 감사 헌금을 일만원이나 드렸습니다. 당시에 목사 생활비로 80원 정도를 받고 있었을 때임을 감안할 때 두 아들의 순교를 참으로 큰 복, 과분한 큰복이라고 고백한 것이 감사헌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께 9가지 감사를 드렸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나에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을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보여주신 이 시대의 푯대인 것입니다.우리가 가진 모든 부와 기쁨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하는 모든 노력은 영혼의 필요와 욕구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죄악을 보상하지 못할 것이며, 영혼의 상실에서 지켜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세상의 어떠한 부귀가 죽음 가운데, 심판 가운데 있는 영원한 영혼에 유익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도서 11장 7절은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라고 말씀하며 인생이 헛되다 헛되다 해 놓고 그래도 눈으로 해를 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악한 사람의 삶은 그 때 누릴 뿐인 즐거움으로 달고, 선한 사람의 삶은 더 나은 삶을 준비해 가는 것 때문에 달콤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은 누구에게나 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이 가장 단 것처럼 느껴질 때 죽음을 준비하라는 경고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시급한 것입니다. 신앙은 고백입니다. 야곱은 많은 것을 가졌으나 실상 하나님 앞에서는 궁핍한 자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 장자권을 탈취했던 사실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습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궁핍함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느끼고 하나님께 구할 때 예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함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결국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창세기 28장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5)는 확실한 약속의 말씀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시를 한 것입니다. 또한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28:22) 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본분을 다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심령속에 주님의 깃발을 꽂으셨습니까? 또한 자녀로서 십일조의 본분을 다하고 계십니까? 여호와 그 분은 당신의 주인이십니까? 그렇다면 야곱과 같이 돌기둥의 표시가 있습니까? 아니면 갈라디아서 6장 17절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순간 순간의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신비롭게 일어나는 하나 하나의 사건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본질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순종입니다. 수동적인 수종이 아니라 선택적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순간 순간마다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찬송과 기도,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뿐만아니라 우리는 세상에 나아가서도 주님을 고백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보낸 곳이며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세상 안에 있고, 세상을 위하여 빛과 소금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결단이 있고, 믿음이 있고, 신뢰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알 게 되는 것입니다. 일이란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 중요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중요한 것입니다. 잘 죽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축복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유감스런 종말을 맞이한 경우입니다.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느보산에서 죽음을 맞이한 모세의 죽음도 유감스럽습니다. 모세는 누가 뭐라고해도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므리바 물' 사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야할 곳에 자기의 이름을 대신하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했으면 믿음으로 끝나야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일을 거룩하게 행하여 그 끝이 시작보다 더 아름다운 결과가 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목수의 아들로서 나사렛 촌동네서 자라나신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장해서도 헤롯의 성전이나 가이사의 궁전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버려진 땅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바닷가에 나가셔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산이나 빈들에서 설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천한 자들과 사귀시고 그들 속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죄인의 친구’, ‘세리의 친구’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낮은 곳에 계셨으며 외로운 곳에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필요한곳에 계십니다. 거기에 우리도 함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증거되기까지는 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또한 복음의 확산을 위해 순교와 고난과 환난이 있었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입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가 있는 것입니다. 이 '피의 복음'을 알 때 참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 곧 죽음을 생명으로, 덧없음을 영원으로 바꾸는 불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기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지 않고도, 하늘의 영광을 홀로 받으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또는 인간이 되었다가 고통이나 죽음을 맛보지 않으시고 당신의 완전하신 의로우심을 입고 하늘로 오르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인간은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와 이제부터 마지막 때까지의 영혼의 구원은 이 '한 알의 밀의 죽음'으로 인함이었습니다. 

스데반집사 역시 산생명을 온전히 죽음으로 드렸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의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은 그 외의 다른 것으로 끝맺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말씀을 통하여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생명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해져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주님은 첫 번째 오셔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두 번째로는 죄와 상관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라고 말합니다. 재림은 성도들의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제의 성육신과 십자가, 오늘의 부활과 승천, 내일의 재림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하늘의 천사도 인자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다만 오늘도 그 날이 어제보다는 하루만큼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늘 깨어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저는 몇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돌아 가셨습니까? 스데반 집사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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