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 선 우리들

예수에게 겟세마네 동산은 하나의 분기점이었습니다. 자기 뜻을 위해 살 것인가, 아버지의 뜻대로 살 것인가 하는 갈림길이었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거두어 주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바뀌면서 자기의 길이 아닌 아버지가 원하시는 고난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새로운 분기점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위한 길을 가지말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 순례길을 지나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려는 종려문을 지금 막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 분기점에서 신앙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고난의 길에 이제 우리는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기로 결단하고 이 고난의 문, 종려문을 열고 우리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가려는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모양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으며, 자기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고자 예루살렘 문을 열고 들어선 우리들은, 분기점에서 새로운 길로 들어선 우리들은 자기의 모양, 자기의 자랑, 자기의 생각, 자기의 이상, 자기의 지식, 자기의 생명까지도 버리고 가야합니다. 우리가 걸어 가야할 길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떠나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축복

종려문을 열고 들어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고난이었습니다. 고난의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광과 축복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받은 고난에 함께 함으로써,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함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나를 하나로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는 영광과 축복이 아니라 고난이요,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짊어진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감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하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고난 받으신 예수를 믿는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고난 없는 영광과 십자가 없는 축복만 있는 종교로 변질되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는 있을 수 없듯이 고난을 거부하고, 고난받기를 두려워하는 교회는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웃의 고통에 함께 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예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반예수교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배부르고 풍요로운 시대에도 분명 기독교는 가난하고 고난받는 종교여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주님을 믿는 그 순결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로마의 박해와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 고난의 씨앗으로 잉태된 기독교는 여전히 자기를 채우고 살찌우는 종교가 아니라 자기를 버려야하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도 박해와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 고난과 박해는 민족을 일본으로부터 구하고 가난한 백성을 살리기 위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 고난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성서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한국역사를 고난의 역사라 말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역사라 했습니다. 세계 열강의 간섭과 지배 속에서 온갖 수탈과 고난을 받는 우리의 역사를 십자가의 역사라 말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고난받는 한국역사에서 세계의 평화와 구원을 이룰 희망을 보았듯이, 한국 기독교는 이웃의 고통, 민족과 인류의 고난에 함께 하고 참여함으로써 당하는 고난을 능히 견디어내야 하며, 그 속에서 부활의 소망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내적 고난

고난은 우리 밖에만 있지 않습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세우려는 영적인 싸움 속에도 고난은 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우리 밖에서' 불어오는 매섭고 혹독한 찬바람과 호수에 떠 있는 오리 무리처럼 잔잔하게, 때로는 내 전 삶의 뿌리를 뒤흔들 듯 격렬하게 찾아오는 '내 안의 고난'을 겪어 이겨내야 합니다. 사회구조적인 모순으로 겪어야하는 고난과 신앙인으로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한 영적인 고난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삶 속에서 견뎌내고 극복해야 할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정치적 불평등 속에서 내가 받아야하는 고난이 있다면 신앙인으로서 그 고난에 동참하기 위한 내적인 싸움 또한 나의 고난입니다. 비움의 고난, 절제의 고난, 자기를 부정, 희생하는 고난. 외적인 고난은 내적인 고난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회구조적 모순이나 민족의 분단으로부터 오는 외적 고난은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요, 하나님으로부터 해결되어질 문제인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고난은 일회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전 삶은 고난의 삶이요, 그러기에 고난은 나누어야 하는 삶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고난을 견디어 낼 우리의 시련이라 하지 않으시고, 고난은 우리가 나누어야 할 신앙인의 도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난은 생활입니다

고난은 아주 특별한 사람만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입니다. 밥하고 일하고 놀고 하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살림살이 속에 고난은 언제나 있으며, 그 고난을 극복하고 견뎌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생활화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활이라는 것, 즉 살림살이라는 것이 어디 사람들만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놓여 있는 수많은 고난의 발자국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겪어야 할 고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고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언덕 위에 핀 꽃 한송이의 고난, 논두렁 밭두렁의 고난, 하늘을 나는 새의 고난, 강물의 고난, 북한이라는 생명체의 고난, 역사의 고난,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고난. 우리 전 삶 속에서 펼쳐지는 고난의 발자국들은 결국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극복하고 견디어내며 나누어야 하는 고난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고난을 견디어내는 신앙인들! 고난은 거창하고 대단한 뭐가 아니라 그리고 민족이나 역사를 고민하는 사람들만이 견디어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고난은 아주 작은 이의 손에도, 평범한 삶 속에서 소리 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고난의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밥짓는 어머니의 손은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려는 세력과의 싸움에서 얻어지는 고난, 들녘에서 일하는 농부의 삽 끝은 더 많은 자본을 얻기 위해 농약과 화학비료를 더 쓰려는 유혹과의 싸움에서 겪게 되는 고난,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끝없는 경쟁과의 싸움에서 오는 고난 등.

고난의 생활화, 고난의 신앙화, 이 둘은 우리의 작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생명체와 함께 살아 숨쉬고, 함께 걸어 가야할 소중한 신앙인의 발자국입니다. 이러한 작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겪은 고난의 발자국들은 바로 생명 살림과 부활의 흔적들입니다.

자연은 고난의 어머니입니다

고난이 어찌 사람에게만 속할 수 있을까? 언덕 위의 꽃 한송이, 땅강아지 한 마리에게도 고난은 있습니다.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해서 일하시고 만물 안에 계신 주님을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고난뿐만 아니라 온 피조물의 고난, 즉 자연의 고난에도 아파하며, 그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고난은 사람의 죄로부터 옵니다. 사람의 욕심과 이기심은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자연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연과 사람을 하나의 생명체로 창조하셨습니다. 자연의 축복은 사람에게도 오며, 자연의 고통도 사람에게로 옵니다. 무분별한 농약 살포와 개발로 죽어 가는 땅의 죽음은 결국 사람의 죽음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은 고난의 어머니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견디어내는 생명이신 어머니!

신앙인이여!

자연의 고난은 사람에게 오며,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힘 또한 사람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북한의 고난을 신앙의 눈으로 봅시다

북한은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북한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혹은 우리와 다른 집단으로 보아서 안됩니다. 그 속에는 우리의 형제, 부모, 산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 우리의 몸입니다.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북한은 안팎으로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내부로부터는 식량부족으로 인한 인민의 고통, 체제에 대한 불안, 외부로부터는 개방에 대한 압력과 강대국들에 의한 존재의 위협 등입니다.

우리가 북한의 고통에 대하여 민족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민족적인 면에서 북한의 고통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먹는 밥공기를 줄이고 나누는 것이다. 고난에 대한 참여는 추상적으로, 생각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실제적인 참여입니다. 통일을 이루고, 북한의 고난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밥 짓고, 일하고, 놀고 하는 우리의 생활 속에 그 나눔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이 겪고 있는 고난은 신앙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남한보다 북한에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북한이 겪고 있는 고난이 남한의 것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곳은 북한입니다.

우리의 작은 삶에서 신앙적인 결단으로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하나에도 북한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것을 나누는 것이 가장 민족적이며 신앙적인 모습입니다. 통일을 뭐 그리 거대한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서 통일을 지향하며 살아갈 때 오는, 하나의 생명작용, 즉 살림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아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빈곤과 불의 그리고 착취로 인한 고통, 제국들에 의한 침략, 이것이 아시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시아는 그 고난을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가난을 가난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고난을 고난으로만 보지 않는 신비한 종교의 나라. 이 신비한 종교의 나라에는 아픔을 아픔으로만 보지 않고, 축복과 기쁨의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여러 민족의 여러 종교 속에 살아 계셔서 그들의 고난을 끌어안고, 마침내 희망으로 일궈내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사람의 고난과 무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아픔은 사람의 아픔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포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신 것은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친히 십자가를 짊어지심은 고통을 당하는 우리 때문에 아파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나선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의 작은 아픔과 고통에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힌 나의 고통, 분단된 민족의 고난, 친구를 잃은 나의 슬픔, 이 모든 아픔의 작은 바람까지도 감지하시고 아파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마법사처럼 어느 순간에 요술을 부리는 분이거나, 돌을 꽃이나 비둘기로 만드는 마술가로 생각합니다. 아니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고통과 슬픔 속에 있는 이 세상을 한순간에 뒤엎어 새로운 세상으로 만들어 주실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습니까? 마법사와 같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어려움에 처해있는 우리에게 일확천금을 안겨다 주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방법은 당신께서 친히 우리의 아픔을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그 고난을 이겨 새로운 삶을 살도록 힘을 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으로 오시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고난은 나눔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나눔으로부터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교의 신앙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나누어 짊어져야 하듯이 고난은 나눔입니다. 우리가 형제의 고난을 함께 나눌 때부터 그 고난은 고난이 아닌 것입니다. 고난은 기쁨이요 소망이며 살아있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심은 바로 이것을 알게 하심입니다.

주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처럼, 고난을 혼자 짊어지며 고통이 되지만, 그 고난을 여럿이 함께 나누며 그것은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고난을 나누는 자라 할 것입니다.

▲채희동 목사.
고난은 생명을 잉태합니다

신앙인이 고난을 나누는 자라면, 고난은 생명을 잉태합니다. 산모의 고통이 아기에게 세상의 빛을 보게 하듯이, 농부의 수고와 고통이 생명을 나눌 수 있듯이, 고난은 생명의 모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부활의 거름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출애굽과 같이 죽음을 통과하는, 죽음에 맞서 뚫고 나가는 생명력을 보여 주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 펼쳐지는 고난은 곧 주님의 생명을 회복한 신앙인의 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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