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한 글은 흔히 ‘전기’ ‘평전’ 등으로 불린다. 우리가 읽는 복음서는 바로 초대교회의 저자(혹은 공동체)들이 예수에 대해서 기록한 전기, 즉 예수전이다. 사도들이 활동할 당시에는 신약성경 28권에 포함되지 못한 수많은 예수전들이 있었을 것이다. 

요즘도 예수전은 계속 쓰여 지고 있다. 뒤낭의 예수전처럼 유명한 것도 있겠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다. 영화로 제작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도 그 중의 하나다. 우리나라에도 김동리가 쓴 ‘사반의 십자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백도기 씨의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등이 예수전에 해당한다.

이들 예수전은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존 교단이나 교인들로부터 신성함을 침범한다는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전은 끊임없이 쓰여 져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의 기독교가 성립된 과정이 바로 수많은 예수전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복음서 자체가 예수전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에 포함된 서신들도 광의로 보아 예수전에 포함될 수 있다. 개신교 또한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가톨릭을 극복하고 일어날 수 있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새로운 교단의 설립도 좋게보면 새로운 예수이해를 통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기존 교리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조그만 파문으로 끝나기도 하고, 그 교단들이 많은 신도를 모으고 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단이나 교파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날이 변해가는 시대 속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들이 바로 예수전이다.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에 대한 신앙을 어떻게 고백하느냐 하는 새로운 모색은, 시대가 변할 때마다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예수는 비로서 죽은 신이 아니라 현실에 임재 하는 살아있는 신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어느 한 예수전만을 절대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동시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임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 받는 농민에게는 농부의 모습으로, 아픔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료자의 모습으로, 억압당하는 땅의 사람들에게는 해방자의 모습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맞이하는 자에게는 곧 천국에서 만나게 될 희망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요즘 상영되는 예수뿐 아니라 새로운 예수전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진지하게 오늘날 우리에게 외치는 예수의 또 다른 메시지를 찾아보아야 한다. 어떤 예수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늘 행해서 바라는 참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는 기꺼이 그런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나실 것이다. 그는 아직도 살아계시며 우리들 인간을 사랑하고 계시고, 끊임없이 우리가 고통 중에서 간구하는 것들에 대해 한없는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전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신에 대한 이해이며, 또한 신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또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신을 이해하는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새로운 예수전을 통해 예수는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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