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날 교인들이 교회 가는데 왜 가는지 물어보면 대부분이 "예배 보러 간다"고 합니다. 예배 보러 간다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본다"는 말은 그냥 "구경한다"는 말과 아주 다릅니다. 보통 우리는 잔치 집에 갈 때도 "잔치 보러 간다", 그리고 초상집에 갈 때는 "상주 보러 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본다"는 말은 구경한다는 말이 아닌 "참여한다", "보살핀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잔치 집에 그냥 구경가는 것이 아니라 모자라는 일손을 거들어주고 도와주면서 함께 축하하고 기뻐해 주는 일입니다. 초상집 보러 가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상주를 위로하고 궂은 일을 보살피고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와주자는 뜻이 담긴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가는 것도 바로 이런 뜻으로 한 주일 동안 헤어졌던 교인들을 만나보고 그동안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어려웠던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정을 나누고 서로 도와주는 것이거지요. 주일날 교회 가는 것은 이렇게 잔치 보러 가는 거나 초상집 보러 가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

그런데 우리의 교회 예배는 꽉 짜인 순서에 따라 찬송 부르고, 설교 듣고, 헌금 내고, 그렇게 형식적인 예배뿐입니다. 목사님은 설교 준비하느라 일주일 동안 애쓰고, 성가대는 성가대대로 애써 연습하느라 고생이 큽니다. 그렇게 애써서 주일날 한시간 예배드리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평신도들은 일방적으로 얌전히 앉아서 설교 듣고, 찬양 듣고 끝나면 돌아갈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스럽고 경건한 예배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예배는 싫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이 창조하신 우주와 세상이 아름다워지는데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희생시키면서 우리를 구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 13:35)라고 하셨습니다. 교인들은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같은 어마어마한 사랑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그만한 능력도 없고 고귀한 마음씨도 지니지 못했습니다.

복음이 왜 살인과 전쟁으로 둔갑하는가

요사이 외국으로 나가 선교를 한다는 분들이 서로 자기 선전에 바쁘고 실적을 올리느라 물량 공세로 도리어 그곳 주민들에게 반발심을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어느 도시에서는 이런 한국인 추방운동까지 일어나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기쁜 소식은 온 세상에 알려야되겠지요. 그러나 돈이나 전자제품 같은 몇 가지로 환심을 사는 건 절대 선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서로 돕는 것이지, 어느 한쪽에서 돕기만 하고 어느 한 쪽에서는 받기만 하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배고파서 죽어 가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일단 기운을 차린 다음에는 스스로 일해서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온 세상이 서로 돕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돕는 사이에 무슨 싸움이 있고 전쟁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태까지 나라끼리, 집단끼리 싸우면서 교회 가서 울부짖으며 하나님께서 자기편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했을 뿐입니다. 중세시대의 십자군전쟁 같은 것을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교세 확장을 빙자한 살인과 약탈밖에 없었습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전쟁까지 하면서 하나님을 어찌 사랑의 하나님이라 하겠습니까?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하루에 수 천명씩 굶어 죽어 가는 어린이가 있다는데, 이런 비극이 일어나기까지는 기독교를 등에 업고 살인과 약탈을 일삼은 백인들의 잘못이 깊이 숨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설교라는 것은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째서 이런 기쁜 소식이 살인과 약탈로 둔갑하고, 핵무기가 판을 치는 전쟁이 왜 정당화되는 것입니까?

복음-기쁜 소식이란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하고, 귀먼 사람에게 귀를 열게 하고 벙어리에게 말을 하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서 걷게 하는 사람다운 삶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자유와 평화가 실현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전부가 교회

예배를 보기 위해서는 장소가 있어야 하고 그래서 교회당이란 건물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꼭 예배당이라 이름이 붙은 건물만이 예배장소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예배보는 마음으로 살면 이 세상 전부가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성(聖)과 속(俗)이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과 속을 구분 짓는 것은 또 하나의 벽을 만들고 그래서 반목시 하고 적대감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깨뜨리려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사람들이 속되다고 한 것이 오히려 성스러워지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거룩한 성전이 협잡과 장사꾼의 소굴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바른 교회, 바른 예배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만드는데 힘써야 합니다. 섬기는 생활은 바른 교회와 바른 예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모든 권위를 버렸는데, 우리 교회는 그 동안 절대권위를 가지고 하나님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오히려 속박하고 힘으로 군림해 오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권정생 / 동화작가. 대표적인 동화로는 「강아지똥」, 「하느님의 눈물」 등이고, 산문집으로는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우리들의 하느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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