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에 머물러 주십시오

베드로는 한마디로 삐쳤다. 선생님 앞길에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린다는데, 로마 병사들의 수배의 손길이 뻗치고 있다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제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다혈질 근성을 드러내며 흥분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일 터인데…. 여느 때 같으면 '기특한 녀석…' 하시며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실 법도 한데, "사탄아 물러가라!"라니 너무 하셨다.

그 일이 있은 후, 투정 섞인 표정의 베드로를 며칠간 가만히 지켜본 선생님은 안되겠다 싶으셨나 보다.

"베드로야. 등산이나 할까?"
"…?"

그래서 산 위로 올랐다. 그날 따라 새들의 지저귐은 어찌 그리 평화로운지…. 별다른 인위의 저항 없이 널브러져 있는 나무숲의 조화와 그 좁은 틈새로 오가는 실바람이 어찌 그리 산뜻한지…. 산 밑 마을의 고행에 찌든 영혼의 쉼터처럼, 산으로 오르는 베드로의 발길을 변화산은 보드라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선생님의 얼굴빛, 눈빛이다. 그토록 눈부시고 아름다운, 맑은 모습을 일찍이 뵌 적이 없었다. 광채가 나고 구름에 둘러 쌓인 선생님….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분 곁으로 엘리야와 모세, 이스라엘 민족의 두 노둣돌이 성벽처럼 에워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베드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단순하고 투명한 성품의 총각은 마음 한복판에서 터져 나오는 소망 한자락을 기어이 끄집어내고야 말았다.

"선생님, 제가 이곳에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여기 오래도록 머물러 주십시오."
"……."
"아쉬운 대로 로마병사들의 수배의 손길이 누그러질 때까지라도 여기 머물러주심이 어떠실런지요."
"……."

그 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베드로의 이 심정을 C. S. Miles는 찬송가 499장에 터를 잡고 이렇게 노래한다.

1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2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울던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예수, 베드로의 간청을 들으며, 장고 끝에 뭐라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그 말을 기록한 기자는 없을까?)

"베드로야, 우리 다시 마을로 내려가자!"

베드로, 이 여린 영혼, 얼마나 기운이 빠졌을까?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는 저 산밑 마을로 그래, 다시 내려 가신다니, 딱히 드릴 말씀은 없지만, 어이할꼬…. 타박타박 그 분의 발길 따라 산밑으로 내려가는 베드로의 심정, 위 작곡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3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만약에 베드로가 "난 안 갈랍니다. 가고 싶으면 선생님 혼자 가세요"라고 말했다 치자. 그리고는 그 동산 위에 눌러 앉았다 치자. 당신은 이 베드로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은 찬송가 499장 2절까지만 불러. 3절은 부를 자격이 없어.' 한국교회는 499장 찬송가 3절을 부르려하지 않는다. 2절까지만 열심히 불러왔다.

노래는 일상의 언어

시집 한 권 없는 사람도, 베토벤의 심포니 한 악장 귀기울여 들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도, 그림전시회 한 번 가 본적이 없는 사람도, 18번 노래는 하나씩 갖고 있다. 노래 테이프도 몇 개씩은 소장하고 있다. 열린음악회도 틈만 나면 열심히 본다. 가만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노래라는 것을 음악의 한 장르쯤으로 여긴다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노래는 예술이라기보다는 '일상매체'로 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시보다는 일기에 가까운, 음악이라기보다는 놀이(노래의 어원도 '놀이'에 착근하고 있다)에 가깝다. 노래가 소비되는 공간은 별도의 문화공간보다는 널브러진 일상의 한 복판이다. 노래 속에 담긴 세계는 고도의 긴장을 요구하는 심원의 세계이기보다는 편안한 일상의 흔적이다. 그렇다, 노래는 일상의 언어다.

하지만 나는 얄팍한 단말마적 소모품 같은 노래보다는 예술성이 가미된 노래가 좋다고 생각한다. '일상예술'이라는 표현을 떠올리면 된다. 노래에 예술적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 결코 어색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의 본질은 '예술'이기에 앞서 '일상'이다. 그 일상의 흔적으로 빚어져서 다시 그 일상의 건강한 호흡을 불러일으키며 상호 작용하는 노래.

산 위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본 세상

노래를 만드는 작곡가는 사람의 일상을 빚어내는 사람이다. 좋은 노래를 만들려면 음악의 자원도 풍성해야 하고 시적 감성도 튼튼해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상에 대한 예민하고 섬세한 태도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일상의 어법'을 터득해야 한다. 자신의 노래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자신만큼 긴장된 자세로 접근해 오리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밥 먹다가 들을 수도 있고 화장실에서 들을 수도 있으며 백화점 쇼핑 중에 이어폰으로 들을 수도 있다. 짜증나는 교통체증의 강제 주차상태에서 그 잠깐의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한 일회적 장치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자신이 만드는 노래 속에 밥 먹다가 방귀를 뀌면 픽 하고 웃을 만한, 화장실에서 일보고 나서 밑을 닦는데 시간이 좀 걸려도 괜찮은, 이어폰 듣고 쇼핑하다가 지나가는 누군가의 아이스크림에 옷 앞섶이 지저분해져도 괜찮음직한, 그러한 일상의 어법을 담아내야 한다. 일상의 노래어법, 노래창작의 핵심사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일상의 노래어법을 터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다시 마을로 내려가자' 이 음성 앞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노래, 그것을 만들려는 작곡가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일상에 대해 섬세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빚어낸 노래를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자신의 일상 한 복판에 계시는 그 분, 그 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신의 일상, 그 일상이 담긴 노래를 만나는 일이 정말 요원하다. 일상이 없으니 '노래'가 있을 리 없다. 산 위에 머무르며, '나는 안 내려가렵니다, 가려면 당신들이나 가시오' 하면서 산 위에서 만든 노래를 가지고 산 아랫마을 사람들에게 '한번 불러봐' 하고 툭 던져놓는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라는 이유로 그래도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는다. 참 묘한 일이다.

물론 산 아랫마을의 사건을 담은 노래가 간혹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개 산 위에서 망원경을 끼고 바라본 노래들이다. 그 망원경으로 도도히 내려다 본 사람들의 자잘한 삶 자락, 그게 얼마나 감동이 되겠는가? 거기에 얼마나 섬세한 감성이 묻어나겠는가? 사람들의 그 보잘것없고 흔하디 흔한 일상, 그게 '노래하고픈' 창작의 흥분거리가 되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그 사람들의 일상을 함께 나누는 그리스도의 행태가 보일 리가 없다. 그 자잘한 일상 안에 담겨진 하나님나라의 비전이 포착될 리 없다. 그래서 감동이 없다. 널브러진 일상의 호흡이 없다. 유약한 이미지, 도덕적 콤플렉스에 주눅이 든 노래, 관념적이고 관성적인 언어의 조합…, 짜증이 날 때가 더 많다. 작곡가들이여, 어찌할 것인가?

그 분의 발길 주변에 머물다 보면

마을로 내려온 예수, 태연히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는 일을 먼저 시작했다. 물론 베드로는 그 분 주변에, 지금까지 그랬듯이 줄곧 머물러 있었다. 그 분의 발길 주변에 머물다 보면 여러 가지 감동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30년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 썩은 물이 맑아지고 그 분의 옷만 만져도 자식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그 놀라운 믿음의 본이 드러나고, 조금만 기울어져도 끝장이 날만한 중풍병자를 지붕 위에서 끌어내리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만날 수 있다.

▲류형선 / 작곡가. '희년을 향한 우리의 행진' '새하늘새땅2', '문익환 시노래-뜨거운 마음' 등의 앨범을 작곡·연출했으며 CCM과 전통음악의 실험공간인 '조율콘서트' 연출을 맡고 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그 분의 발에 머무르는 것은 정말 대단한 특권이다. 이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 분의 발길 주변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누리게 되는 특권과 혜택을 가장 풍요로이 받는 자는 역시 작곡가다. 왜? 일상은 노래 창작의 무궁무진하고 유일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노래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풍성한 자원, 그 곳이 산 밑 마을의 일상이다.

산밑으로 내려와 보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람들의 마을 한 복판을 거닐어 보라. 노래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일상의 계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흔하디 흔한 삶 자락마다 더덕더덕 묻어있는 하나님나라의 비전, 그걸 어찌 망원경으로 보려하는가? 산밑으로 내려와서 현미경을 들이대야지. 사람의 일상이야말로 예술의 무궁무진한 자원이라 했다.

좋은 노래, 매력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은 작곡가들은 이 음성을 섬세한 감성으로 들으라.

'우리 다시, 마을로 내려가자.'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