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지닌 영성은 본래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의 영성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영성은 잘못 형성된 '나쁜 영성'이거나 잘못 발현된 영성이다. 이때 '아름답다'는 것은 외형적인 미나 화려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영성이 지니는 깊이와 조화, 그리고 정제된 순수함으로 말미암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운 영성을 형성해가고 또 아름답게 발현하려면 우리의 영성은 깊음과 충만함 그리고 체화되는 깨달음 속에서 '꼴'이 형성되고 '맛'이 배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는 아름다운 영성은 내면의 성찰과 사회적 삶의 조화를 가능하게 하고, 존재 자체를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의 맑은 영성체로 드러나게 한다. 영성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을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성이 아무런 고통이나 고뇌 없이 형성되고 완숙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아름다운 영성은 세속과 거룩함의 통전 과정에서, 육체의 한계와 영원함의 자유 사이에서, 그리고 자기 고독과 자기 충만 사이에서 계속되는 모순과 갈등 속에서 뿌리를 내린다. 그러기에 영성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기까지 우리는 자신의 영성을 순화시키고 자기답게 만드는 광야의 풀무질을 감내해야 한다.

▲「팔복의 영성」.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영성

영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이해범주가 있다. 안셀름 그륀(Anselm Gruen) 신부는 영성의 지향점에 따라 '위로 향한 영성'과 '아래로부터의 영성'으로 구분했다.

'위로 향한 영성'은 "우리에게 이상적 요소들을 제시하고 그것은 우리가 실행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요소이며 언젠가는 마침내 채워야 하는 것"을 지향하는 영성운동의 방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바라보며 그와 하나되려는 갈망,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영성을 닮아가려는 일련의 모든 영성적 지향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신앙적 이상(理想)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위를 바라보는 영성운동이다.

이 영성의 방향은 옳고 또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며 이 과정에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움직임이다. 그러다 마침내 하나님의 하늘 지성소에 이르러 그와 연합된 일치의 체험이 주어진다면 그처럼 거룩하고 신비한 체험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영성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며 나아가 존재의 변화에까지 이르게 한다.

영성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

그러나 이러한 '위로 향한 영성'에는 몇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첫 번째 위험은 우리가 지향하는 영성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이다. 곧 자신이 추구하는 영성적 덕목이 현실 속에서 지난하게 형성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쉽게 절망한다. 또한 자신이 다소간 갖추었다고 믿었던 영성이 현실 속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의 세계와 삶의 현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사람들은 실망한다.

이러한 부조화가 반복되면 영혼이 병들거나 신앙생활을 아예 포기하게 된다. 그륀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성이 우리의 실제 상황과의 관계를 잃어버릴 때 우리를 병들게 한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이상을 목표로 설정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항복하면서 포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실제 상황을 억압하거나 밀어젖히고 이상과 자신을 동일시해버린다. 이러한 것이 이들을 분열시켜서 고통받게 한다."

그래서 '위로 향한 영성'에만 사로잡힌 사람들은 잘못하면 자기모순에 직면하게 되고, 마침내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혹은 남의 신앙을 공격적으로 비판하는 성향으로 변하기 쉽다. 또한 남에 대해서는 지극히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을 강요함으로써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우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예수가 끊임없이 비판한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사람들의 영성은 바로 '위로 향한 영성'이 낳는 실패와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 주변에서도 잘못된 '위로 향한 영성'의 결과로 인해 신앙의 경직됨과 철저함을 구별하지 못하고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만끽하기보다는 수많은 도덕적 잣대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또 기도할 때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나름대로 열심을 가진 신앙인들조차도 이러한 괴리감에서 오는 경직성 때문에 존경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노력 아닌 은총으로 말미암는 영성

두 번째 위험은 우리의 영성 또한 하늘의 은총임을 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상 속의 작은 일조차 하나님의 은총의 소산임을 고백하는 종교다. 영성의 세계도 마찬가지여서 하나님의 은총 없이 형성될 수 있는 그리스도교 영성은 없다. 실제로 우리가 영성을 깊게 하기 위해 끊임없는 수덕생활(修德生活)과 진지한 노력이 필요할지라도 아름다운 영성은 모두 은총의 결과다. 그러나 '위로 향한 영성'만을 추구한다면 어느덧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도 영성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라프랑스(Lafranc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완전함에 대하여 꾸준히 성장해나가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힘에 겹도록 노력해야 조금씩 도달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상승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완전함으로 상승하기 위한 능력과 용기를 획득하고자 특정한 자기수련이나 기도방법을 실행해나가고 있다. 만약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행하고 있는 제자가 영적 지도자에게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스승에게서 '사람은 계속해서 노력해나가야 하는 거야'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상승해나가야 하는 최종 단계에서는 마침내 이러한 고달픈 수고 자체에서도 해방되는 것이다."

▲김진 목사. ⓒ뉴스앤조이 신철민

노력을 통해 무엇인가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가장 치명적인 요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영성은 '은총으로 말미암는 영성'이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말미암는 영성'이라는 출발점은 영성 수련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 또한 크게 달라지게 한다. 영성 수련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인위적으로 내 안에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제대로 발현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관련 기사 : 위로 향한 영성, 아래로부터의 영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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