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데에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있는 아이가 내 아들 청준이다. (사진제공 해인교회)

어느 날 여섯 살 먹은 우리 아들 청준이가 나에게 “아빠, 나…, 밥 많이 먹고 얼른 커서 목사님 될 거야. 밥 잘 먹으면 얼른 커서 목사님 될 수 있지?” 하고 묻는다. 엄마 아빠가 늘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들 밥을 제 때 챙겨주지 못하는 일이 많은 터에, 칠삭둥이로 태어난 막내가 이렇게 말해 얼떨결에 “그럼” 하고 대답했다. 아이의 말을 듣고 '목사가 뭐 길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목사란 과연 무엇일까. 성경엔 때로는 제사장으로, 예언자로 표현되지만 그것은 목사만의 특권이라기보다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목회 기간이 늘어가면 갈수록 목사가 뭘까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빠져든다. 목회 초년생 시절, 이와 비슷한 문제로 적잖게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해인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신용카드나 하나 만들 요량으로 은행에 간 적이 있었다. 카드 신청서를 쓰고 은행원과 한참 취조 같은 상담을 하고 난 뒤, 나는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세금을 낸 적이 없고, 집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뭐하나 내세울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회 담임교역자이니 그래도 신용으로 카드를 만들어 줄 수 있지 않느냐고 묻자, 은행에서 판단하는 '목사'라는 직업군은 신용도가 거의 바닥이라는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은행을 나선 후 그 흔한 신용카드 하나 만들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몇 일 동안 우울했다.

신용도 '바닥', 카드 만들기 실패하다

▲해인교회 창립예배에 오셔서 강연하시는 고 문익환 목사님. (사진제공 해인교회)

그 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 받는 날, 나의 어머니는 내게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목사보다는 일반 직장 생활을 하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신앙이 없는 분도 아니고, 어릴 때 가정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어머니가 늘 하시는 기도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머니의 동생들이 세 명씩이나 목사의 길을 걷게 되면서 가난한 목사의 삶에 치를 떨게 되었다.

임대 개척교회, 매년 오르는 임대료, 끝없이 들어가는 선교비, 그리고 거의 굶주릴 정도로 어려운 목사 가족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아 온 어머니는 목사는 늘 도와 주어야 할 근심의 대상이요,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려야 하는 별로 재미없는 인생으로 보셨던 것이다. 가난한 목회자보다 신앙 좋은 성공한 평신도나 장로가 더 좋아 보인다는 생각이셨다.

재미 없는 인생, 목사

▲농촌 현실을 체험하기 위해 농촌으로 떠난 수련회. (사진제공 해인교회)

해인교회는 본래 공단 주변에 세워졌고 설립 목적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교회'로 특별히 노동자들의 인권을 대변해 주는 교회다. 교인들도 자연스럽게 교회의 성향과 맞는 분들이 모였다. 비슷한 뜻을 가진 교회들이 모여 ‘민중교회운동연합’을 조직해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기도 했고, 빈민들의 아픔과 함께 동참하며,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을 돕고 통일을 기원하는 공연모금을 하기도 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도와 예배가 교회의 갱신과 더불어 우리들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다보니 일반교회와는 다른 특성을 가진 교회로 변해갔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활동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여러 선배 목사님들은 내게 “목회나 하지 왜 그렇게 사회 활동을 많이 하냐. 그러려면 목회는 하지 말고 사회단체활동가로 나서라”며 아주 비판적으로 말하곤 했다. 그들은 이런 목회가 목회인가 회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들은 내게 "그렇게 여기 저기 좇아 다니지 말고 전도 열심히 하고 심방 열심히 해서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지 않겠냐”고 권면하곤 했다.

민중선교를 하는 교회들은 대부분 교인들이 적다. 민중교회 목사들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관심은 있지만 재주가 없다. 이는 '영적인 능력이 없어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다'는 민중교회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민중교회 목회자들은 전도하고 교회를 양적으로 부흥시키는 일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일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나는 인천에 있는 150여 명 규모의 교회 10여 곳을 택해 지난 10년 동안 교인수 변화에 대한 표본분석을 한 적이 있다. 이 중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교회는 한 두 곳이었고 나머지 교회는 단 10명도 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것은 결코 영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 풍토에서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하거나 특수목회를 하는 목사들은 목사도 아니고 목회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교회 성장이냐, 사회 활동이냐

▲민중교회 목사님들과 함께 국회 앞에서 이주노동자 고용허가제를 외치는 모습. (사진제공 해인교회)

최근 이주노동자들을 상담하고 돌보는 일을 하는 한 목사님이 출입국관리소 공무원에게 폭행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주노동자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목사님까지 연행하려 하자 목사님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자 그 공무원은 “네가 목사면 난 하나님이다”고 하면서 목사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우리 사회는 이런 류의 목사들을 목사로 생각하지 않는다.

70∼80년대에는 이런 류의 목사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사람, 좀 심하게 말하면 '빨갱이'로 취급당하기도 했다. 경찰 쪽에서 보면, 이런 목사는 목사도 아니었다. 순복음교회 권사이신 나의 어머니의 눈에, 사회적으로나 내가 속한 교단의 교세로나 나의 목회에 대한 염려가 많으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실직자 문제는 게으르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왜곡된 사회 구조와 잘못된 정부 정책의 문제를 직접 체험하면서 생각이 변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변화와 미국과의 관계 변화도 우리 개인의 삶과 결코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국민은 분명 변하고 있다. 나의 어머니도 변하고 있다.

▲영국 교회 목사님들과 선교 현안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모습. (사진제공 해인교회)

우선 지역 사회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교인들을 관리하고 신앙적으로 이끄는 것만 목회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대형교회들이 외면했던 실직자 노숙자 문제를 끌어안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이게 진짜 목사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일부 대형교회들의 목사들이 고급 승용차에 기사를 두고 타고 다니면서 교회를 기업처럼 세습하는 일이 지역사회에 알려지면서, 지역주민들은 목사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전통 교회의 목사만 목사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다. 얼마 전 쪽방상담소 소장으로 있던 한 목사님이 개척교회 청빙을 받아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이 사실을 노회 어른들에게 알리니 "잘했다. 역시 목사는 목회를 해야지" 하는 것이다.

제사장과 예언자의 통합을 꿈꾸며

▲유아세례를 받는 해인교회 아기들. (사진제공 해인교회)

목사 세계의 혼란스러운 목사관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 현실은 작은 교회 목사나 기관에서 일하는 목사들을 주눅들게 한다. 큰 교회에서 나와 다른 교회 청빙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복지기관장이 되어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는 한 목사님은 그 일을 하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사역에 대한 보람과 자부심도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가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인가 고민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

목사는 예배와 성찬식, 세례를 집행하며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고 그들을 거룩한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영적인 상태 또한 철저히 점검하여 더 깊은 훈련을 통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물론 이는 교회 안이나 밖, 어느 곳에서든지 이루어 질 수 있다.

민족의 문제를 놓고 눈물로 기도했던 예레미야나 사회 정의를 부르짖었던 아모스 등 많은 예언자들의 활동을 목사의 역할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성서적 가르침이다. 많은 제도권 내의 목사들은 이를 외면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설교를 잘하는 목사를 선호한다. 그러나 그 설교는 삶에서 나온다. 우리의 삶은 편향되지 않고 바른 신앙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 또한 게을리 하지 않을 때 성숙해진다.

제사장적 역할과 예언자적 역할이 바로 우리 예수님에게서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르는 목사는 충실한 교회의 관리자인 동시에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사회적이고 공적인 책무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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