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을 기리며

3월 첫째 주일은 한국 교회가 기미년 만세 운동을 기리는 '삼일절 기념 주일'로 정해 두었습니다. 올해로 85돌을 맞습니다. 교회가 이 날을 되새겨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교회가 교회 바깥으로 나아가 겨레의 문제에 직접 참여한 전국 규모의 운동 형태가 바로 3·1운동이었다는 것으로부터,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이나 되고 교인들이 이 운동에 앞장서게 되어 기독교가 비로소 뚜렷한 '사회 이미지'를 얻고 '기독교의 위상'을 크게 높이게 되었다는 것, 나아가 반일 민족 운동에 비폭력 평화주의를 불어넣었다는 데 이르기까지, 어느 한두 가지로 그 뜻을 줄일 수 없을 정도입니다.

19세기 한말의 격변기에 기독교가 독립협회 운동에 잠시 관여한 바가 있기는 하지만, 기미년 만세 운동처럼 그 참여의 폭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1910년대 후반에 들어 기독교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침투하여 널리 퍼졌습니다. 비록 전체 인구의 1% 남짓을 차지하는 정도였지만, 기독교는 전도와 교육 활동을 펼치면서 확장 일로에 있었습니다. 열심히 전도하며 교회를 세우고 모두 배워야 한다며 학교를 세운 나머지, 전국 각처에 교회와 학교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들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가 이른바 우리 겨레 공동체의 풀뿌리 조직이었고 풀뿌리 운동 세력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교인과 교회와 교회 학교를 통하여 전달하였으며, 만세 운동에 참가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조직 또한 교회와 교회 학교였습니다. 전국으로 조직망을 갖추게 된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가 운동의 조직망이었으며 동원의 통로였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가 없었다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동시다발로 만세 운동을 일으키자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운동은 선언문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앞세웠으며, 교회는 줄곧 이 길을 표방하고자 했습니다. 3·1운동의 돋보이는 점입니다. 포악한 강탈 식민 세력에 맞서 폭력을 쓰지 않고 평화를 지키려 했다는 것은 놀랍기조차 합니다.

그럼에도 희생과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만세운동 때 붙들려 재판을 받게 된 기소 피고인은 6,500명에 가까웠습니다. 그 가운데 기독교인의 수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만큼 두드러졌습니다. 총 기소 피고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24%(1,543명)가 넘었습니다. 여성의 경우 거의 모두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기소된 여성이 모두 135명이었는데 110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이렇게 적극 참여하였으니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도 컸습니다. 제암리교회에서는 참혹한 학살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이것만으로 교회가 삼일절 기념 주일을 정하여 그 날을 함께 기억해야 할 넉넉한 이유가 됩니다. 교회가 3·1운동에 준 기여를 여기에 길게, 길게 적어 뽐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특별히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대목이 있습니다. 기독교와 나라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나라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애국심 또는 애국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와도 관련되는 물음입니다.

▲박영신 목사는, 예수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면서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되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사진제공 한시미션)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을 정의하는 것도 만만찮고 이를 우리 역사와 이어놓고 풀이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인들이 민족주의에 대하여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명쾌히 대답해 주는 성경의 가르침을 쉽게 찾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피해갈 수도 없습니다. 3·1절을 기리는 날, 믿음의 사람으로 함께 생각해봄직한 문제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아주 잘 알려졌으면서도 꽤 까다로운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그 뜻을 풀이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이 유대 땅을 지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은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기고 또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로마에 대한 반감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벌써부터 로마에 세금을 내지 말자는 납세거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식민 통치에 맞서려한 민족저항운동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 하나가 주후 6년에 갈릴리 지방 출신인 유다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폭동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어떻게 로마 황제에게 바칠 수 있는가" 하고 소리치며, 그 지방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라 로마와 대항하자고 했습니다. 대항하지 않는 자는 비겁자일 뿐이라고 이들을 몰아붙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에 저항한 유대 민족주의자들을 일컬어 '열심당원'(zealots)이라 합니다. 당연히 로마가 걷는 세금을 내지 말자며 납세거부투쟁을 벌이고자 열심당원의 호전 세력이 널리 호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갈릴리 지방을 통치해 온 헤롯왕 집안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헤롯당원'이라 하는 친로마세력이었습니다. 예수를 마땅하지 않게 여겨온 바리세인들이 이들 헤롯당원들과 제휴를 맺었습니다. 예수를 곤경에 빠트리고자 한 데서 두 세력이 손을 잡은 것입니다.

한껏 예수를 치켜세우는 척 하면서 이들이 말을 건넸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며, 하나님의 길을 올바르게 가르치시며,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이 흔들리지 않으신 분이라 생각합니다"고 운을 떼었습니다. 그렇게 알랑거리며 간사를 떨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당시의 역사 상황으로 보아, 참으로 어렵고 껄껄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는 단숨에 이들의 간사하고 교활한 속내를 꿰뚫어 알아차렸습니다. "위선자들아, 왜 이렇게 나를 테스트하려 하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리고 세금으로 내는 돈을 보여달라고 말했습니다. 은전 하나를 예수에게 건넸습니다.

당시 화폐는 물건을 사고 팔 때 쓰는 지방 화폐가 있었지만 세금을 낼 때는 로마 화폐를 써야 했습니다. 이 은전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리키며, "이것이 누구의 얼굴이고, 누구라고 쓰여져 있는가"고 예수가 물었습니다. "가이사"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의 유명한 대답이 이어졌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그들은 두 가지 대답만이 가능하고, 그 둘 가운데 예수가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나는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대답하는 것이고, 다를 하나는 바쳐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만일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하면 로마의 식민지 아래 놓여 있던 유대민족으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받아 매국노 취급을 받을 것이 뻔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지 않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 열심당원들처럼 유대 민족주의자로 단숨에 민중의 인기와 지지를 얻고 추앙을 받을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세금을 거부하며 투쟁했던 저항 운동의 지도자처럼 그도 곧바로 로마병사들에게 잡혀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예수를 빠트리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함정에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바리세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언뜻 보아 이 대답은 오직 이들 모함하는 자들이 파놓은 함정을 교묘하게 비켜가려 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대답인 듯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이 가르침을 두고, 여러 가지로 풀이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 뚜렷한 것 하나는, 세속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을 완전히 따로 떼어놓아야 한다고 풀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세상에 다 맡겨 놓아야지 여기에 기독교가 관여하거나 개입할 것이 없다는 논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언뜻 그럴싸한 주장도 덧붙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일은 세상의 일이라는 것을 모두 제외해 둔 나머지의 일, 말하자면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제한시켜 놓은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자체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제한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영역의 분리입니다. 서로 무관하고 상관이 없어 서로 참견하지 않는 두 영역, 두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은전은 마땅히 그 얼굴이 새겨진 로마황제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예수는 이 말로 끝맺음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준엄한 명령을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고 명했습니다. 이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결론이었습니다.

'나라' 그 너머

세속의 요구와 하나님의 요구, 이 두 영역은 서로 달라 같지 않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면 됩니다. 아무 탈 없이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커다란 무리를 일으키지 않고 어느 만큼 서로 공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사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속의 요구와 하나님의 요구 사이에서 대립하게 되고, 갈등하고 충돌할 수 있는 경우입니다. 이 두 영역이 서로 동떨어져 전혀 무관하다며 방치해 둘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그 권위에 기대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되돌려야 한다"는 가르침이 위력을 발동해야 할 상황에 든 것입니다.

여기 우리의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입니다. 영원히 신실하신 분으로 믿습니다. 박해 당하는 자들이 부르짖는 것을 편드시는 분이고, 배고픈 자들에게 음식을 주시는 분이며, 갇힌 자들을 풀어 주시며 눈먼 자를 보게 하시며, 낮은 자를 들어올리시며, 의로운 자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섬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진실로 이러한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면, 신실함을 저버리고, 사람들을 박해하고,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사람을 갇혀두기만 하고, 눈먼 자를 보살피지 않고 낮은 자를 짓밟기만 하고, 의로운 자를 미워하는 그러한 세상의 질서는 하나님의 질서와 어긋납니다. 갈등합니다. 충돌합니다. 이 모든 세상의 지배 체제를 하나님의 요구하심과 명령이라는 빛에 비춰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바로 여기에서 팔짱 끼고 세상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방관할 수 없습니다. 85년 전 우리 조상들은 바로 이러한 눈으로 이 땅의 사람들이 겪는 아픔과 억눌림과 박해, 가난과 불의를 바라보았습니다. 왜인의 식민 통치는 하나님의 뜻과 갈등하고 충돌하였습니다. 모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거사는 평화주의였습니다. 비폭력 평화주의였습니다. 예수가 열성당원과 달리 비폭력 평화를 외쳤듯이, 우리의 선조들도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따랐습니다. 동학 농민전쟁 때 나타난 폭력 때문에 기독교 측에서 천도교와 합작하기를 꺼리기까지 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입장이 관철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이 기독교 학교인 경신학교 교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가 일본으로 기울어지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는 자유독립이란 말뿐만 아니라 비폭력 정신도 성경에서 배웠다고 했습니다. 이 점에서 선언문에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고 하여 도덕 차원의 운동 정신을 강조해 둔 것은 특기할 일입니다. 일본의 강탈지배체제에 대한 비폭력 저항의 윤리 근거이자 이상이었습니다.

▲박영신 목사.
기독교는 도덕 성찰에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를 귀히 여깁니다. 기독교가 남긴 역사 전통입니다. 힘보다 더 높은 도덕 차원의 힘에 3·1운동이 터하고 있었습니다.

겨레사랑, 나라사랑은 맹목의 사랑일 수도 절대의 사랑일 수도 없습니다. 남의 나라라 하여 폭력으로 지배하려 하고, 자기 나라라 하여 무턱대고 치켜세우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말라는 법이 없고, 자기 겨레를 귀하게 여기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의 나라라 하여 지배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자기 나라라 하여 무조건 예찬하고 칭송하고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비좁은 민족주의, 극복되어야 할 민족주의입니다. 국가를 절대화하는 또 다른 우상숭배입니다. 어떤 이념의 옷을 걸치든, 그 어떤 것도 '절대'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놓여 있어야 하기에, 우리의 애국애족 또한 초월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뜻 아래 놓여 있어야 합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