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경기도 화성에서 목회할 때였다. 새해 벽두에 성경말씀을 묵상하다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는 말씀이 한 줄기 바람처럼 내 마음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래서 한동안 그 말씀을 삭이며 하느님이 내게 주신 화두로 삼았다. 그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묵상할 적마다, 이 말씀을 앞으로 나의 목회의 방향으로 잡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장인어른에게 부탁을 해서 큰 붓으로 이 말씀을 써서 교회 강대 앞에 걸어 놓았다.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면 이 말씀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어줍잖은 목회를 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신앙과 생활이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때이다. 주로 나의 설교의 특징은 생활 신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 예배당 신앙으로만 그치고 만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배당 신앙이 생활 신앙으로 이어져야 한다. 교회나 성당에서는 가장 모범적이고 독실한 그리스도인 같은데 세상에 나가서는 시궁창 냄새나 풍기고 고약한 짓이나 한다면 그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끝마다 ‘주여, 주여’를 외치고 하느님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문가인 것처럼 행세하고 독점하면서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남에게 가시노릇이나 하고 산다면 그 신앙과 종교적인 열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믿음과 생활의 불일치는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일 것이다.

본 회퍼는 '기독교가 무엇이냐?'하는 물음을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는 때때로 본질적인 것은 버려두고, 전혀 본질과는 관계없는 것을 붙들고 그것을 목숨처럼 지키려고 하는 때가 있다. 신앙과 생활의 일치된 모습이 가장 바람직한 길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울이 강조한 ‘믿음’과 야고보가 강조한 ‘행함’은 동전의 양면같은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의 관념적이거나 추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 그 자체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는 말이요, 또 야고보가 강조한 행함이라는 것도 역시 믿음의 바탕을 떠나서, 믿음이 없이 자기 의를 내세우는 무슨 공적이나 자랑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는 자의 삶의 구체적인 형태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믿음과 생활이 일치되지 못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둘이 따로따로 제 멋대로 놀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은 신앙대로 따로 있고, 생활은 생활대로 따로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 둘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따로 놀게 될 경우, 그 신앙이라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신앙일 수 없다.

문제는 믿음과 생활의 불일치

우리가 기도할 때 흔히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듣는다. "내가 믿음은 있는데 그 믿는 대로 실행하지 못하니, 실행을 할 수 있게 해 주소서"하고 기도한다. 그것이 과연 사실인가? 신앙 하는 일은 별로 문제가 없는데 실천하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인가? 마음에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 있는데 생활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자문(自問)을 진지하게 가져볼 때 그런 주장이 어딘가 공허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그것이 진짜 문제가 아니겠는가.

복음서에서 어느 날 예수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었다고 바리새파와 율법사들이 ‘부정한 손’이라고 예수에게 공격해 온 일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부정한 손’이란 손에 무슨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관습이나 형식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항의에 대해서 예수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서 껍데기와 무늬는 신앙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삶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사람들 보기에 그럴 듯하게 보이고 신앙적인 열심도 있고 종교 생활의 훈련이 잘 되어 있는데, 그 마음에는 그런 것들과 관계없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속으로는 예수를 꽤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예배 출석도 하고, 헌금도 하고 행사 참여도 하는데,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을 감찰(監察)하시는 하느님의 눈앞에 그런 모든 자부심이 진정한 신앙의 열매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점이다. 그렇게 볼 때 그런 경우에서의 문제는 행위의 문제이기보다는 신앙, 그 자체의 문제이며, 실천이나 생활의 문제이기보다는 마음 바탕, 그것의 문제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신앙과 행위, 이 둘이 분리되어 따로 따로 놀거나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우리 삶의 걸음이 뜻밖의 방향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앙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비주의나 현실 도피로 빠져들기 쉽고, 행위에만 집착하다보면 부지불식간에 체면이나 과대포장 놀음에 휘말려서 구역질나는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위선자들은 자신이 위선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만한 자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불꽃 같으신 눈 앞에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의 거울 속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자기를 반성하거나 성찰하는 노력 대신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인기나 신망을 얻고 체면을 유지하는 것만을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근사하지만 속 빈 강정이나 마찬가지고, 시궁창 냄새나 풍기는 저급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목회자와 장로의 자녀들이 예수 믿기가 제일 어렵다는 말이 있다. 남들보다 더 잘 믿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실상은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의 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자녀들의 부모의 위선적 생활에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위선자 되기 쉽상

12년 전 정회원(감리교단) 자격 심사를 받을 때의 일이다. 내 이름이 불릴 때까지 초조한 심정으로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어 심사장에 들어갔다. 여섯 분의 심사위원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그 중에 연세가 지긋하신 어느 목사님이 내게 물으셨다.

“박 목사, 박 목사는 어느 때가 제일 괴롭습니까?”
“…… 네, 제가 강단에서 좋은 말은 다하고 저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그때가 참 괴롭습니다.”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답은 마찬가지이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것은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양은 있으되, 그리고 모양은 세월과 함께 더욱 무르익었으되, 진심, 성심(誠心), 언행일치의 믿음이 옳게 인격의 바탕을 떠 받쳐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나무가 되고 싶다. 비록 열매는 많이 맺지 못한다 해도 열매다운 열매를 맺고 싶은 나무가 되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이다.

쫓기는 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 끝의 풍경 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 주시고
굳어 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을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 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 낱에서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정채봉 詩. 기도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