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373장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잘 묘사한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하게 되었네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 소리뿐일세.
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채우는
사랑 얻기 위해 모두 오래 참았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위해 모두들 오래 참고 있었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악을 선하게 만들고 모두의 소망을 채우는 사랑을 고대했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도, 중동에서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참된 사랑을 학수고대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도 생명을 새롭게 하는 사랑을 고대한 자들이 수두룩하다. 이 고대하는 사랑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사랑의 원천은 어디 있는가?

요한1서 4장에 보면 이 사랑의 원천은 하느님이시라고 한다. 위대한 영웅이나 정치가도 아니고 도통한 성자나 종교가도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느님이시라고 한다. 시편 100편을 지은 시인도 그 사랑의 원천은 인자하심이 한량이 없으신 창조주 하느님이시라고 한다.

사랑의 샘을 막는 '자기 중심주의'

창조주 하느님이 사랑의 원천이라면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도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기수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도 참된 사랑의 샘구멍이 있어야 한다. 유명한 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 본성에 있어서 사랑을 받으려는 욕망보다 사랑을 하려는 욕망이 더 크다라고 했다. 이것이 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밝혀준다.

그런데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살벌하게 되었는가? 모두 사랑의 샘구멍이 터지기를 고대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사랑의 샘구멍이 막혀있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주의로 말미암아 사랑의 샘구멍이 솟지 못하고 있다. 첫 인간인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선악을 분별함으로 자기가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려는 자기 중심주의에 사로 잡혔기 때문이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것도 자기 중심주의 때문이다. 노아 시대의 사회가 암흑으로 뒤덮여 있은 것도 이 자기중심주의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미국에 있어서 결혼의 반은 이혼으로 끝난다고 한다. 한국도 이에 뒤지지 않으려고 맹추격하고있다. 이것 역시 모든 것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자기 주장 때문이다. 어디 가나 발견하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긴장도 꼭 같은 이유다. 요즈음 신문지를 어지럽게 하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분쟁을 보라. 모두 자기 나라의 국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고백 한마디를 해보겠다. 우리 아이들이 이따금 우리가 자기들에게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자기 변명을 했다. "그들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면 그들의 자주성에 지장을 준다"고. 그랬는데 지난 주말 벌몬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문득 발견한 것이 있다. 우리 두 아들이 대학을 졸업했을 때 아무도 그 졸업식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러치도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넓은 미국 땅에서 홀로 졸업한 저들의 심정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을 발견한 우리는 너무나 어처구니없었다. 왜 그랬는지를 미루어 생각을 해 보았더니 그것은 내가 훌륭한 되려고, 내가 관여하는 민주화운동에서 인정받으려고 자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고려에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집사람의 경우도 그렇다. 미군에게 몸을 파는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열중하면서 자녀들을 향한 생각은 9만리 먼 곳에 있었다. 이 자기 중심적인 자세가 사랑의 샘구멍을 막아 버리고 만 것이다.

자식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는 부모들의 경우도 같은 과오를 범하기 쉽다. 흔히 자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욕구 충족을 기도하는 수가 많다. 따라서 자식을 못살게 채찍질을 해서 성공의 가도에 오르게 하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과정에 자식들의 당연한 삶의 권리를 짓밟게 된다. 혹은 자식들에게 지나친 사랑을 퍼부음으로 자식들을 부모에게 예속시키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 자녀들의 건전한 독립에 지장을 준다. 이것은 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범하는 과오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인 삶의 자세를 벗어버려야 한다. '나'가 아니라 '너'의 건전한 성장과 발전을 기원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나를 줄 수가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자기 중심적인 삶의 자세'를 벗어버릴 수가 있을까? 사랑의 샘구멍을 막는 악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가 있을까? 그래서 참된 사랑의 셈이 솟아오르게 할 수 있을까?

악의 열매에 몸서리 쳐야

이 자기 중심주의 적인 삶의 자세를 벗어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의 샘구멍을 막는 악의 뿌리를 뽑는 일이란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까닭이란 우리는 언제나 자기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일을 미화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 전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까지를 이용하려고 한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라. 저들은 언제나 자기 행동을 율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로마와 한통속이 된 사두게파나 대사제들을 보라. 삶이란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와 타협을 해야 한다고 자기 정당화했다. 그래야 로마 치하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라. 저들은 예수님을 성실히 쫓아 다녔으나 다윗 왕국에서 한 자리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이 삶과 말로 가르치신 사랑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각 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삶은 나날이 매 말라 간다.

어떻게 이 자기 중심적인 삶의 해악을 깨닫고 이를 뿌리뽑을 수가 있을까? 사랑의 생수가 우리 속에서 용솟음치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그릇된 삶이 맺는 악의 열매를 직시할 때 이룩된다. 우리들의 자기중심적인 삶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치는 악한 결과를 보고 몸서리칠 때 이룩된다.

대만 오지에 오봉이라고 하는 한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사람을 잡아 제사 드리는 풍습을 가진 원주민들에게 그것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에게 역행하는 일이기에 중단해야 한다고 강하게 설득을 했다. 하루는 저들이 오봉에게 와서 한번만 더 전처럼 제사 드리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이 요청에 오봉은 "내일 이 시간 검은 의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우고 오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을 잡아서 제사를 들이라"고 말하고 그들 곁을 떠났다. 그 다음 날 정말 검은 의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다. 저들은 그를 몽치로 때려죽이고 가린 얼굴을 벗겨 보았더니 그것이 바로 오봉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저들은 다시 사람을 잡아 제사 들이는 것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오봉은 산 제물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자기 중심주의가 인류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참 좋다고 감탄을 하신 창조세계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을 보신 하느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하셨다. 이 사건에 놀란 저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히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은 물론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무리들이 하루에 3,000명씩 회개하고 예수님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유무를 상통하는 인정공동체를 이룩한 것이다. 자기들이 저지른 악이 초래한 무서운 결과를 본 데서 이룩된 기적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발견했다.

샘을 터 인정공동체 만들자

우리는 자신을 솔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고질처럼 우리에게 달라붙은 자기중심주의 때문에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없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들의 무관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일이 없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유대인들의 죄와 같다. 따라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루에 3,000명씩 가슴을 치면서 회개한 예루살렘 시민들처럼.

이렇게 샘구멍을 막는 자기중심주의를 제거할 때 하느님의 사랑이 다시 우리들 속에서도 솟아오를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 새로워지고 우리들에게서 솟는 샘이 이웃에게도 흘러 새로운 인정공동체를 이룩하게 될 것이다.

문동환은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일본 동경 일본신학교, 조선신학교와 미국의 웨스턴신학교,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61년 미국 하트포트신학교에서 종교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 한신대학에 교수로 재직한 이후 민주화 투쟁 속에서 해직과 복직을 거듭했다. '한국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와 '제3세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공동체 '새벽의 집'을 세워 새로운 생명문화의 삶을 실험했다.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 국회 외무통일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저서로 「자아확립」, 「인간해방과 기독교교육」, 「아리랑고개의 교육」,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생명공동체와 氣化敎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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