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통일신앙을 갖자! (1)
- 신앙통일이 민족통일 이룬다! 이효삼 목사

하나님이 한국인 기독교인에게 주신 지상과제는 통일입니다. 그런데 그 민족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성서적 신앙통일을 가져야 합니다. 해방 전후에도 기독교계가 갈라져 싸우더니, 분단이 되고 전쟁이 났습니다. 지금 가장 문제되는 것은 한국기독교인의 배타주의와 보혁 양극화입니다. 신앙통일 없이 민족통일 없습니다. 신약성서의 전반부를 형성하는 복음서와 후반부를 형성하는 바울서신들과 야고보서 등의 일반서신 그리고 요한일서 등의 요한의 문서들을 보면서 그들이 어떤 통일신앙을 가졌는지 생각해 봅니다.

종교사회학자 이원규교수는 우리 한국 기독교인의 문제는 세 가지인데, 첫째가 배타주의, 둘째가 보-혁 양극화, 셋째가 배금주의라고 합니다.일차적으로 첫째와 둘째는 바로 자기 중심적 성경해석에 따라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런 자기 중심적 복음을 오르띠즈목사님은 <제자입니까?>에서 그것을 “제5복음서”, 또는 “내가복음서”라고 부릅니다. 내가복음서를 가진 내가복음주의자들은 요한 3:16, 5:24절과 같은 몇 개의 성경구절들을 가지고 조직신학을 만드는데, 반면 바로 다음 요 5:29절과 같이,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들어가리라”는 구절들은 그 내가복음서에 넣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구절들은 무시하고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12:32절에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느니라”했는데, 다음의 33절, “너희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했을 때, 제5복음주의자들에게는 32절만 들어있고 33절은 들어있지 않다며, “어떤 말씀은 지키고 어떤 말씀은 지키지 말아야 하는가?”고 그는 반문합니다. 그래서 내가복음주의자들은 일치와 화해, 또는 전체를 보기보다는 부분을 강조하고, 분단을 일삼고 쉽게 통일을 기피하게 됩니다.

통일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을 보는 눈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가져야 합니다. 성경(정경) 66권에 나오지 않는 말은 우리가 극구 주장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가감하지 말고, 우리가 전체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수용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타주의와 보혁 양극화에 젖어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제 일치, 화해, 통일되는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바로 성경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그리고 “전체적으로” 성경의 짝들을 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1. 바울은 “오직...믿음”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통일신앙가입니다. 바울은 “오직...믿음”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을 이해하기 위하여, 믿음과 율법의 잣대만으로 바울서신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수준을 넘어 바울 서신 전체를 보면 바울은 믿음으로만이 아닌, 사랑과 선행과 함께 통일된 신앙을 가진 사람임을 알게됩니다.   

우선 한글개역성경은 바울서신에서 "오직...믿음"이란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오직...믿음"이란 표현은 루터가 사용한 말이지, 원래 바울 서신 안에 없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글개역성경에 보면, “오직 선행”, “오직 사랑”이란 말도 바울이 사용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니, 왜 이렇게 “오직”이 많은 거지요? 오직 믿음으로만 이라고 썼다면, 오직은 하나 뿐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바울이 “오직 선행”이라고 한글개역성경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그런 오직”(only)은 없습니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라고 말했는데, 그걸 영어로는 “by faith alone”, “by faith only”, 또는 “by only faith”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헬라어 원문은 물론, 영어 독어 등 타언어 성경에도 없는 구절입니다. 헬라어원문성경, 영어성경, 루터의 국어인 독일어성경을 찾아보십시오. 최근에 번역된 한글표준새번역성서를 보십시오. 거기에 “오직... 믿음”이란 말은 없습니다. 지금 인터넷 영어성경에서 ‘only’를 검색해 보십시오. “오직 믿음으로”가 성경에 있다고 믿는 한인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찾아보고 말해봅시다!

물론 루터가 무릎으로 기어서 계단을 오르는 수행을 하다가 문득, “구원은 이렇게 피 흘리며 수행하는 행위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야!” 하고 외치면서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내려 왔다고 해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루터가 말했다는 “오직...믿음”은 바울에게는 등장하지 않는 말입니다. 한글성경의 바울서신에 나타난, “오직...믿음”의 “오직”은 원문에 그리고 기타 성경에 없는 단어입니다.

저는, 목회 10년을 지나 나이 40세가 다 되어 미국 유학 와서 여러 다른 나라의 성경을 보다가 이 사실을 알았고, 과거의 “오직... 믿음”이라는 입장에 대해 상당한 곤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만 그러한가?’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물으면서 답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놀라기만 하고 아무도 답을 해 주지 못하는 거였습니다.

“목사님, 로마서 1장 17절 등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는데 그 ‘오직’이란 말이 원문, 영어성경, 독일어성경에 없는 걸 아세요? 그걸 목사님은 어떻게 배우셨나요? 제가 정말 몰라서 묻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개혁교단의 목사님이, “글쎄요, 나도 그 부분을 연구한 적이 없네요” 했습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이번에는 40년 간 조직신학 교수를 하신 C교수님을 우연히 만나 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저는 과거에 신학교에 있을 때, 그분에게 조직신학을 배운 학생이었지요. 그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그래요, 저 몰랐어요?” 하셨습니다. 가히 충격이었습니다. 그분의 반응이 저에게 매우 이상하고도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다음엔, 헬라어교수이신 선배 S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찾아봐야겠네.”
또 조직신학 가르치시는 선배 K교수님은 이 글을 읽더니, “성경을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경악하셨습니다. 여기서 저는 더 이상 이 문제는 제 개인의 성경해석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린 분명히 뭔가 잘못 가고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어느 개혁장로교회에서 성경공부웍샵을 인도하며 가르치다가 “오직 믿음의 오직이란 말은 없는 말입니다” 했더니 서울대를 나오고 미국 신학교 성서신학박사과정에 있는 그 교회 담임이신 K목사님이 즉석에서 영어성경을 뒤지더니, “어라, 정말 없네!”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대대로 신앙생활하시는 가정에서 지내시고, 그 담임목사님의 실력을 인정하시는, 그 교회 장로님도 깜짝 놀라면서 “그럴 수가 있나?”하며, 성경공부 내내 인상이 굳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정말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정말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아니 그 보다 충격, 충격, 충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 기독교를 반신불수로 만든 장본인이 있다면, 이 “오직”이란 것입니다. 이 “오직”이란 것이 한국 신앙인들의 성경 보는 눈을 편파적으로 만들었고, "오직 내 것만”, “오직 우리 보수교단만”, 오직 우리 복음주의자만”, “오직 내 교회만”, “오직 우리 ~만!” 하며 파당을 짓게 만들었고, 분단을 일삼고 통일을 반대해 왔습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팽개쳐지고, 멸시 당했고, 도덕 수준으로만 가르쳐서, 영생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등한시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한국 기독교이기에 이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제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오직”이란 단어입니다.

사실 지난 한국 개신교 100여 년 동안에 오직 믿음이 큰 일을 했음을 저는 인정합니다. 이 “오직” 때문에 이방인인 한국인들이 예수님을 잘 믿게 되었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장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도 이미 기독교역사 100살이 훨씬 더 되었습니다. 성숙하고 온전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 한국인의 신앙 양태가 편향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번역의 영향력은 정말로 커서 한국인들의 신앙을 너무 한쪽으로 몰아가서, 배타적이 되었고 양극화를 일으켜서 이제는 한국 기독교를 절름발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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