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로 접어들면서 느림이란 개념이 각광을 받고 있다. 느림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닫는 지는, 최근의 베스트셀러 책들의 목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극심한 출판 경기의 불황 속에서도, 처세에 관한 책들과 함께 느림을 다루는 책이 나란히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특질을 신자유주의적 사고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원칙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정의하는 것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마도 이젠 별로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란 무한경쟁을 원칙으로 한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쟁이 지배되는 자유무역과 자유 경쟁의 시대가 다시 도래 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이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이미 경쟁력을 확보한 국가들에 의해, 때로는 직간접적인 무력의 협박까지 동원한 거의 강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시장경제의 발전단계가 다른 나라들 사이의 격차를 무시한 채,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차별적인 자유무역은 빈국과 부국의 격차를 더욱 벌려놓고 사회적 부정의를 낮게 된다.

일부국가들은 세상을 지배하는 이 새로운 이데올로기 아래서 국가부도의 상태에 놓이게 되고, 자신들의 노동의 대가를 부당하게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성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일부 국가들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룰에 재빨리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바로 우리나라가 그와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비교적 성공적으로 적응한 우리도 고통을 겪는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보다 기술력과 자본과 신자본주의 운영의 노하우를 갖춘 부자국가들과, 보다 싼 임금으로 밀어붙이는 빈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격심한 고통을 치루어야 하게 되었다. 기업은 엄청난 경쟁력을 요구당하고 그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경쟁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혹사당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뒤에는 그들의 자리를 노리는 엄청난 규모의 실업, 반실업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것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힘들게 한다. 무한 경쟁에서 경쟁력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우리들의 피를 말린다. [큰 것이 아니나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잡아먹는다]란 이름의 책이 있었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그대로 오늘날의 세상은 빠름을 요구한다. 빠름이야 말로 경쟁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제품을 더 빨리 만들어서 더 빨리 돈을 벌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이다. 그러한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염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느린’ 세상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느림이 각광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빨라야만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정신없이 뛰어야만 하는 세상에 적응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느리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서 서점에는 빠름에 대한 책과 함께 나란히 느림에 대한 책이 진열되는 것이다. 느림이란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반영하는 정신적인 갈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느끼고 깨닫게 되는 바람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세상에서 느림이란 용어로 포함되는 것이다. 즉 느림은 오늘날의 사회상의 정신적인 반영물이다. 또한 느림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일구어 가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느림이 단순한 빠름에 대한 반발로만 머문다면 느림은 한풀이에 그칠 뿐일 것이다. 느림에 대한 갈망은 세상을 지배하는 빠름을 이길 새로운 방법론적 모색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느림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삶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실제적 변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진정한 느림을 영위하며 살 수가 없을 것이다. 느림의 씨앗은 우리들 속에 있다. 빠름의 삶에 지치기 시작하는 우리들이 염원하기 시작하는 느림에 대한 소망이 바로 느린 사회, 느린 세상을 만들기 시작하는 조그만 출발점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느림을 단순히 감상적인 차원, 막연한 바람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느림에 대한 바람이 진정 느린 삶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한 구체적인 논의로 진행 되어가고, 마침내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 깃발아래 모여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들의 느린 세상은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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