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되새김질하다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이야기의 만남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 이야기를 하고,  좋아하는 사이라면 이런저런 삶의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공부 이야기를 통해서 공부의 뜻을 새기고,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사랑의 뜻을 새깁니다. 그 새김과 되새김을 통해서 도타운 신의와 두터운 사랑이 일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나눔이 사람 사이의 역사가 되고 역사를 만듭니다.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어떤 이야기를 두고 대화하는지, 함께 나누는 그 이야기의 내용과 형식에 따라 그 집안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의 성격이 규정됩니다. 집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손쉽게 그 집안의 가풍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도 그들 나름의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구약 전체가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구약에 적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긴 민족의 역사 이야기를 때로 짧게 줄여 놓기도 했습니다. 보기를 들어, 하나님이 어떻게 종노릇하며 살던 조상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셨는지, 왜 십계명과 같은 명령과 규례를 내려 주셨는지, 그 출애굽의 뜻은 어디에 있으며 계명을 받게 된 뜻은 또 어디에 있는지 후손들이 묻게 되면, 이렇게 이야기해주라며 긴 역사를 간결하게 요약해 둔 곳들이 있습니다(신6:20∼24).  

▲박영신 목사 "내세워야 할 하나님을 내세우지 않고 잡스런 욕구와 잔재주를 송아지로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묻는다. (사진제공 한시미션)

이렇게 공동체의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어, '바람직한' 이스라엘 '백성됨'의 뜻을 새기게 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규례를 지키는 선택된 민족으로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후손들을 키웠습니다. 이야기를 들려주어 공동체의 역사에 대한 기억을 놓치지 않고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서로 나누어 이스라엘 민족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 자기 참모습을 지키고 또 이를 잇고자 했습니다.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를 끊임없이 새김질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박대하고 살해한 이스라엘 백성의 비통한 역사를 예수 스스로 비유를 통하여 풀이하고 있는 특이한 내용도 있습니다(막12:1∼12). 오늘 읽은 사도행전 7장 또한 이스라엘 역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로마서 9∼11장에 바울이 꽤 길게 적어 놓은 내용과, 히브리서 11장 2절∼12장 2절에 담고 있는 이야기도 보기로 들 수 있습니다.) 군중의 돌을 맞아 순교한 저 유명한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의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긴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가 아주 짧게 정리되어 있는 본문입니다.

여기에서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 맥락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담아 풀이합니다. 구약으로부터 예수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 드라마를 기독교의 눈으로 해석하는 최초의 문서가 될 것입니다. 의인 메시아가 오시리라 하고 알려준 예언자들을 잡아죽이고 드디어는 바로 그 의인 메시아를 잡아 넘기고 살인하기까지 했다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예수의 죽음을 연결해 놓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존재와 그의 죽음은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새김질하도록 했습니다.

이 역사를 오늘 다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 하나님과 그의 뜻을 제쳐두고, 그 대신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거기에 제사를 지냈던 이스라엘 조상들의 수치스런 과오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의 모자람

지난 두 해 동안 제가 녹색연합에서 파송을 받아 관여해 왔던 서울시 환경 관계 모임의 임기가 끝나, 마지막 만찬을 하던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제 옆에는 기업 측 대표가 앉아 있고 바로 그 옆자리에는 행정 책임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책임자가 말했습니다.

청계천을 살리자는 복원 공사와 관련된 이야기였습니다. 우선 청계천 고가도로를 철거하도록 했습니다. 교통 문제를 걱정하는 소리들이 빗발쳐 나왔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교통 혼잡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이른바 교통 대란의 예측도 나왔습니다. 교통 전문가라는 어느 교수가 열을 올리며 교통 대란을 예측하였다고 합니다. 행정 책임자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 교수는 돌처럼 굳어져 자기 주장을 더욱 강하게 폈다고 합니다. 만일 자기가 예측한 교통 대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자기 손가락에 불을 지르겠다고 말했다 합니다. 자기 주장이 틀림없다고 장담하면서 그 절대의 확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 교수가 서슴지 않고 끌어들여 썼던 말이었습니다.

그 행정 책임자는 이어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들에게 말했습니다. "'손가락에 불지르겠다'고 한 사람 치고 불지른 사람 본 적 없고, '목숨 걸겠다'고 한 사람 치고 목숨 끊은 사람 본 적이 없다"고 그 교수에게 일러주었다고 했습니다. 아주 의기양양한 어조였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정치 입장과는 아무 상관없이, 청계천 복원 공사에 대한 견해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기에 그 교통 전문가라는 교수가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데서, 그가 들려준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저는 그 교통 전문가라는 교수의 예측이 어떻게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는가 하고 물어보았고, 거기에 대하여 그는 단순한 예감이 아니라 다른 외국 전문가의 지식과 자문에서 그 교수와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후 예상했던 교통 대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전문 지식은 틀렸고 다른 또 한 사람의 전문 지식은 맞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식이라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는 점을 저는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이 경우에 맞았다고 해서 그 전문가가 다른 경우에도 언제나 맞으란 법은 없지 않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 어느 경우에든 '손가락에 불지르겠다'거나 '목숨 걸겠다'고 큰소리 땅땅 치면서 자기 주장을 편다면, 그것은 오직 천치만이 저지를 수 있는 오기입니다. 자기가 만든 것을 그렇게까지 절대시하여 내세운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람들이 작당하여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신처럼 중심에 모셔 놓고 그것을 앞세우고자 하는 인간의 모자람은 지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만 나타났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인간의 모자람입니다.

인간이 바람직하다고 만들어 낸 것, 인간이 그럼직하다고 생각하는 것, 인간이 원한다고 하여 앞세우는 것, 그리하여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높이 치켜세우는 데서 느끼는 쾌감과 즐거움, 성경의 표현으로 우리가 만든 '송아지', 우리가 값지게 여기는 금붙이를 끌어 모아 만든 금송아지의 군상들이 벌이는 정경입니다.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인 인간을 마치 온전한 존재인 것처럼 이해하거나, 그러한 한계투성이의 인간이 주장하는 것을 마치 완전한 지식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이 시대의 송아지 만들기이며, 송아지 숭배의 짓거리입니다.

무엇에 기대려는 인간의 연약함

마땅히 찬양하며 예배해야 할 하나님 대신에 숭배해서는 안 될 송아지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대상 착오'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인간이 만든 송아지를 대신 넣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에 송아지를 모시고자 했습니다. 자리바꿈의 '치환 현상'입니다. 그릇된 자리바꿈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기대고 싶어한다는 이론이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현상을 풀이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논지를 끌어들입니다. 무엇인가에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럴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베리아와 만주 지방으로부터 전래했다는 민속 신앙에 기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도로부터 온 종교나 수련에 기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중국에서부터 온 가르침에 기대기도 합니다. 모두가 무엇인가에 기댑니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등속의 전통 신앙을 받아들이기에는 지난날의 무지몽매함으로부터 벌써부터 멀리 벗어나 '깨어났다'며 거드름부리는 속칭 현대인들도 있습니다. 전통이니 신앙이니 종교니 신이니 하는 언어를 팽개쳐 버리고 이성이니 합리성이니 하는 개념을 끌어들여 거기에 기대고자 합니다. '현대인'입니다. 앞서 계몽주의자들이 이를 표상하고 프랑스혁명의 주체 세력들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현대 의식을 굳혀 놓은 현대의 의식 세계입니다.  

요즘에 와서 또 다른 주장이 등장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 온 이성이니 합리성이라는 것은 모두 터무니없이 경직된 지배 개념이라며 이 모든 것을 허물어버리고자 하는 '탈현대'의 소리가 그것입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지배해 왔던 '현대'를 벗어나고자 하여 몸부림치는 자유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이도 저도 아닌 듯 하여 지극히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아무데도 기대려 하지 않고 기대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기존하는 '큰 틀'이나 '거대 개념'을 거부할 뿐입니다. '작은 틀'이나 '미소한 개념'을 새삼 끌어들입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기대어 자기를 이해하고 삶을 풀이합니다.

삶의 지향성이 어떤 것이든 모두가 무엇인가 기댈 것을 찾고 있으며, 무엇인가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약합니다. 어떤 심원함과 초월성을 풍기는 것은 모두가 관심 밖이자 인식의 밖입니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귀로 듣고, 혀로 맛을 깨닫고,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어야만 비로소 기댈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강렬한 직접성과 격렬한 파괴력과 폭력성이 없으면 감각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하여, 강렬함과 직접성의 기어를 한 단계 높여 파괴력과 폭력성을 더욱 격화시킵니다. 이 직접성, 폭력성, 파괴 지향성은 어지간해서는 자극을 받지 않게 된 무디고 무감각한 오늘의 의식 세계를 반영합니다. 깊은 세계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예민한 분별력도 쇠진하고 높은 세계를 관통해 올라갈 수 있는 초월 능력도 파산 상태입니다.

기고만장한 현대판 송아지를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만든 송아지에 기대어 그 송아지를 숭배하여 제사지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스스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자기 도취 능력을 남김없이 발동하여 자기 성취감에 빠집니다. 거기에 취하여 비틀걸음을 걷기까지 합니다. 아무렇게나 걸어다니는 현대인의 걸음걸이입니다. 감추어진 '방황의 비밀'입니다.

이 송아지는 여러 꼴로 나타나고 여러 내용물을 담아냅니다. 유혹하는 어떤 지식이나 유행하는 어떤 사상일 수도 있고, 무모하고 음흉한 계획일 수도 있고, 익숙한 어떤 생활 습관이나 벗어버리지 못하는 타성일 수도 있고, 알게 모르게 익숙해진 집안의 분위기나 주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내 맘이에요' 하며 자기 주장을 강하게 펼치며 사는 것 같은데 실상은 어떤 탐욕과 유혹에 사로잡혀 있거나 시대의 유행에 이끌리기도 하고, 여전히 습관과 타성에 젖어 있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의 그늘 안에 들어있기도 합니다. 의식하지 못하나 무엇인가에 이끌리어 송아지를 만든 다음 그것을 앞세워 거기에 기대어 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의 금 송아지는 무엇인가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이 세대의 흐름에 휘말려들어 우리도 갖가지 신들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온갖 것에 대한 욕심을 부리면서 그 욕심을 송아지로 빚어 만들어 그 앞에 스스로 무릎꿇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각기 어떤 금송아지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키고 앞세우고 높이 내세울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목소리이어야 하고, 그의 말씀이어야 하는데, 과연 우리가 그 하나님을 내세우고 있으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의 말씀을 실행하고 있습니까?

▲박영신 목사.
아니면,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나의 탐욕과 나의 지식과 나의 주장과 나의 계획과 잔꾀를 들여놓고 있습니까? 내세워야 할 하나님을 내세우지 않고 잡스런 욕구와 잔재주를 송아지로 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말하지 못하는 금송아지를 내세워 나의 목소리, 인간의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를 하나님의 목소리와 자리바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의 말씀을 실행하기보다 제한된 인간의 머리와 뒤틀린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를 값있게 여겨 그것을 뒤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모두 제한된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을 하나님의 자리로 올려놓고 그것을 신으로 우러러보며, 우리가 만든 것이라며 기꺼워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물어볼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가 참 하나님을 제쳐두고 거짓된 것을, 헛된 것을 신으로, 하나님으로 믿어 섬기려 하는 '잘 못된 신뢰'의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봐야 합니다.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 인간이 만든 것,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설 수도 없고 올라서서도 안 됩니다. 그 어떤 것도 피조물인 한 창조주의 자리로 올라서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시편에 나오는 시구처럼, '오 주여, 주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NIV: Who is like you, O Lord?) 하고 읊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견줄 자 어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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