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절친한 전명훈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전 목사님은 대학 시절 갑자기 실명한 분이다. 그러나 좌절을 딛고 대학을 졸업한 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셨다. 현재는 '에벤엘선교단'이라는 장애인 선교기관을 설립해 시각장애인과 가족들을 돕고 있다.

전명훈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군대 제대 후였다. 총신대학교 신학과에 막 복학하고 기숙사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전 목사님을 보았다. 당시 나는 시각장애인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있던 터라 시각장애인에 대한 기본 예절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고 우리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15년 동안 우정을 쌓아오고 있다. 이후에 나는 후배들이 지금 전 목사님의 사모님을 내게 소개해 주려고 했던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스개 소리지만 자칫하면 전 목사님의 사모님과 내가 같이 살 뻔한 것이다.

"이 목사 동사무소 가서 쌀 좀 타다 줄래?"

▲에벤엘선교단 사무실에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전명훈 목사님이다. (사진제공 함께가는공동체교회)

전 목사님이 전화를 한 이유는 사무실에 꼭 한 번 들르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던 일을 대충 정리하고 부리나케 사무실로 갔다. 함께 식사를 한 후 전 목사님은 내게 사무실에 들르라고 하신 진짜 이유를 말씀하셨다. "이 목사, 동사무소에 가서 쌀 좀 타다 줄래. 이 목사는 아직 젊잖아."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보지도 못하면서 내가 젊은지 늙었는지 어떻게 아시죠?"

전 목사님이 비록 보지는 못하시지만 나는 그 분의 장애를 스스럼없이 대한다. 그 분 역시 내가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자신의 장애를 극복한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장애를 장애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조금 불편하다고 여길 뿐. 전 목사님은 그동안 만난 그 어떤 분보다 사랑이 많으시며 남을 편안하게 해 주시는 분이다.

그런데 "쌀을 좀 타다 달라"는 부탁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그룹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시각장애인들인데 앞을 보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직접 쌀을 가져가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간사님에게 동사무소 직원들이 항상 이렇게 일을 하냐고 물었다. 간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전에는 직접 가져다 주었는데 담당 직원이 새로 바뀐 다음에는 늘 직접 가지러 오라 그런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경우를 당하면 화가 치밀어 잘 참지 못한다. 전 목사님 말씀처럼 나는 아직 젊지 않은가.

▲그룹홈 식구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나들이를 갔다. (사진제공 함께가는공동체교회)

간사님과 함께 차를 몰고 동사무소로 향했다. 그리고 담당 직원에게 물었다. "이 쌀을 그룹홈으로 직접 가져다 줄 수는 없나요? 여기는 모두 시각장애가 있는 분들인데…." 그러자 담당 직원이란 분이 말한다. "직원들이 모두 바빠서요. 차도 없고, 있던 차는 다른 일 때문에…." 그리고는 기분 나쁘게 웃는 것 아닌가. 나는 격앙되어서 말했다. "그룹홈에 있는 분들 모두 시각 장애를 가진 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 사람들에게 쌀 타러 오라는 당신들의 말은 도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입니까? 그 사람들 놀리겠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쌀 주지 않기 위해 술수를 쓰는 것인가요? 공무원들이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더구나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인데 당연히 먼저 배려해야 되지 않습니까?"

사실 간사님만 옆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더 강하게 말하려고 했다. 동사무소에 있는 높은 사람까지 만나서 이 사실을 추궁하려 했지만 그만 두었다. 혹시 나로 인해 '에벤엘 선교단'이 어떤 피해라도 당하면 안되겠기에 말이다. 장애인들이 복지 혜택을 누리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비굴해져야 하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정부가 장애인들을 위해 복지 시책을 마련한 것은 그들이 그 시책을 잘 사용하고 잘 누릴 권리가 있다는 말 아닌가. 그런데도 이 땅의 장애인들은 장애를 입은 것만도 서러운데 당연한 권리마저 행사하지 못하고 눈치를 봐야 하니 참으로 어이없어 말도 안 나왔다. 동사무소를 빠져 나왔다. 한참 후에 동사무소 직원이 내려와 좀 전과 사뭇 다른 태도로 "앞으론 이런 일 없을 것이라"고 사과했다. 우리나라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일이 풀리지 않는 이상한 나라다. 돌아오는 길이 마냥 무거웠다.

"저를 불러주셔서 오히려 고맙습니다"

▲장애인 가족을 초청해 놀이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사진제공 함께가는공동체교회)

노 대통령을 탄핵시킨 국회의원들에게 분노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드높다. 연일연야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정할 수 없나 보다. 책임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언론에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보면서 그나마 "다음부터 이런 일 없을 것"이라고 사과하던 동사무소 말단공무원이 이 나라 국회의원보다 백 배는 더 낫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후에 전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목사님, 간사님에게 다 들었어요. 잘했어요. 나는 당사자라서 싫은 소리 못했는데, 고마워요." 그러나 오히려 내가 고맙다. 쌀을 옮기는 사소한 일(시각장애인에게는 사소한 일이 아닐 것이다)에도 부족한 동생을 생각하고 부르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오늘도 어려운 길을 꿋꿋이 걸어가시는 전 목사님 같은 든든한 동역자가 곁에 있어 내가 더 감사하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들과 이들을 위해 사역하는 목사님, 에벤엘선교단에 하나님의 감사와 은혜가 함께 있기를 기도한다.

함께가는공동체교회 홈페이지 : www.gotogeth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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