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중 우리의 마음을 가장 설레게 하는 계절은 봄이다. 남쪽으로 기울어졌던 태양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대지를 보듬어 안게 되자 얼었던 땅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여기저기에 민들레꽃이 피는가 하면 나비들이 꽃에서 꽃으로 춤을 추면서 돌아다닌다. 언덕 위 진달래 꽃 사이에는 봄을 즐기는 어린이들의 소리가 즐겁기만 하고 밭을 가는 농부들의 소모는 소리가 흥겹기만 하다.

하느님은 이렇게 모든 것을 새롭게 해 주신다. 이를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들에게 사랑의 훈풍을 불어넣어 인정의 봄 동산을 이룩해 주셨다. 인류에게 세로운 길이 열려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많은 사람은 이 사랑의 훈풍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는다. 겨울 내 껴입었던 옷들을 부둥켜안고 긴 한숨만을 쉰다.

봄을 향한 갈망

요한복음 4장에 있는 사마리아 여인이 그런 사람이다. 물동이를 이고 그리심 산 언덕을 올라오는 여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우물가에 앉은 나사렛 청년을 보는 그녀의 눈은 차기만 하다. 물 한 모금을 청하는 청년의 말에 응하는 그녀의 음성은 매섭기만 하다. 모든 것이 다 귀찮다는 것이다. 확실히 겨울의 사신에 사로잡힌 여인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여인은 생명을 갈구하는 여인이다. 봄을 기다리는 여인이다. 무거운 발을 끌고 언덕 위 야곱의 우물로 올라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청년이 영원히 솟는 생수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때 이에 응하는 자세를 보아 알 수 있다.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는 음성은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나에게 물을 달라는 거요?" 하고 비꼴 때와는 아주 다르다. 생수를 향한 간절함을 그 음성에서 들을 수 있다. 이 간절함이란 그렇게도 중요하다. 봄을 향한 간절함이 없고서는 봄 동산의 훈풍이 불어오지 않는다.

"야훼여,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오니
주여, 이 부르는 소리 들어주소서.
애원하는 이 소리, 귀기울여 들어주소서."

이렇게 읊은 시편 130의 시인의 심정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따뜻한 훈풍을 받아드려 하늘나라 시민이 된 자들은 다 이 간절함이 있었다. 하느님은 이렇게 애원하는 자들의 호소를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생명을 소생하는 훈풍

그러나 그런 간절함만으로는 새 내일을 맞이할 수 없다. 새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소해야 한다. 처리해야 할 것을 처리해야 한다. 예수님 앞에 절을 하면서 구원의 길을 찾은 청년을 보라. 그에게는 새로운 삶을 향한 간절함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사랑의 눈으로 보시었다. 그러나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하고 예수님이 말했을 때 그는 머리를 떨어트리고 돌아갔다. 처리해야 할 것을 처리하지 못했다.

이 사마리아 연인은 어떠했는가? 예수님이 그녀를 보고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녀의 남편이 처리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이 지시에 여인은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다. 전에 남편이 다섯 식이나 있었는데. 지금 남편도 아닌 자와 같이 살면서 남편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남편이라는 것은 한 여자의 배우자가 되는 남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남편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 여인은 벌서 돌에 맞아 죽었거나 동리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남편 다섯씩이나 이었고 지금 남편도 아닌 남자와 같이 산다면 동리에 발을 붙이고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보면 온 동리가 그녀의 말을 듣고 예수를 찾아 왔다는 것이 아닌가!

이 여인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보자 곧 예배에 관한 질문을 한다. 진정으로 하느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예배란 예루살렘에서 드릴 것인지 아니면 그리심 산에서 드릴 것인지 물었다. 하느님과의 영교를 갈망하는 여자다. 그렇다면 이 남편이라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그녀가 의지하고 살려고 한 그릇된 가치를 말한다. 잘못된 삶의 길을 말한다. 돈, 지위, 권력, 명예, 향락 등을 지향하는 그릇된 삶의 자세를 말한다. 남편이 없다는 것은 그 어느 것에서도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무엇에 의지하고 사나 그것에도 기대를 가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은 다 처리되었습니다" 하는 것과 같다. 봄을 맞이할 청소는 벌서 다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도 그리심 산도 아니다. 참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다" 하고 말하자 그녀는 생명을 소생하게 하는 훈풍에 느꼈다. 사랑의 '영'만이 삶을 새롭게 한다는 '진리'를 인자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통해서 느낀 것이다.

봄맞이 한 성서 속 사람들

성서에는 봄맞이 청소를 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은 여인, 옥합을 깨고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 가진 것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한 사깨오, 아니 예수님을 따른 갈릴리의 떠돌이들은 다 그런 무리들이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자 율법주의를 헌신짝처럼 버린 바울도 그런 사람이다.

주후 4세기 기독교 신앙을 아름답게 정리한 성 어거스틴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본래 명철한 머리로 당시의 철학을 다 통달했다. 기독교에 대한 진리도 다 받아드렸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그의 생에 받아 드릴 수 없었다. 여성과의 향락에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그는 몹시 괴로워했다. 하로는 에치오피아에서 온 한 수도승을 만나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말할 수 없는 번민에 사로잡혔다. "별로 배운 것도 없는 저들이 저렇게 깨끗하게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비참한 심정으로 사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는 정원에 나가 그곳에 있는 의자에 하염없이 주저앉았다. 그 때 "책을 펴서 읽어라" 하는 담 밖에서 놀이하는 어린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들은 그는 얼른 방에 들어와서 성서를 펼쳐 들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그는 마음에 결단을 내렸다.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것이라고. 봄을 맞이할 청소를 감행할 것이라고. 그렇게 해서 그는 당시 가장 거룩한 주교가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역사를 한 새로운 차원으로 이끈 분이다. 그가 이런 위대한 업적을 올린 것은 마음을 비우고 봄을 향한 청소를 했기 때문이다. 문익환 목사 역시 남북화해를 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역시 마음을 비웠기 때문이다.

봄을 맞아 버려야 할 그릇된 야망

예수님과 더불어 삶에 한 새로운 장이 전개되기를 바라는가? 생명이 차 넘치는 봄 동산에서 기쁨에 찬 삶을 살기를 갈망하는가? 봄을 맞이할 청소를 해야 한다. 우리들의 삶에는 언제나 청소해야 할 것들이 있다. 버려야 할 그릇된 야망, 그릇된 습성이 있다.

그것들을 다 청소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새로워져서 사랑의 훈풍이 부는 봄 동산에서 살 것이다.

 

문동환은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일본 동경 일본신학교, 조선신학교와 미국의 웨스턴신학교,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61년 미국 하트포트신학교에서 종교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 한신대학에 교수로 재직한 이후 민주화 투쟁 속에서 해직과 복직을 거듭했다. '한국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와 '제3세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공동체 '새벽의 집'을 세워 새로운 생명문화의 삶을 실험했다.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 국회 외무통일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저서로 「자아확립」, 「인간해방과 기독교교육」, 「아리랑고개의 교육」,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생명공동체와 氣化敎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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