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시절 나의 스승은 '설교는 모든 신학의 종합'이라 하셨다. 정열적이고 지성적이고 영감에 찬 그 분의 설교를 떠올리며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새기곤 했다. 설교 강단에 선 지 20년이 다 되었지만 설교는 여전히 어렵다. 무슨 일이든 십년 세월이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설교만큼은 숙련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설교 준비가 버겁다고 느낄 때마다 설교는 마치 시지프스의 바위인 양 어깨를 짓누른다. 마치 종말처럼 다가오는 주일을 앞두고 영혼의 메마름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면 침묵을 선택할 여지조차 없는 설교자의 고통은 폭발할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듣지 않고는 설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침묵을 깨뜨리고, 그 말씀이 사건이 되는 지점을 목표 삼아야 한다고 들었기에 부담은 더욱 크다. 그뿐인가. "한 나라의 장래는 결국 그 땅에 있는 설교자의 성실성에 좌우되는 것이다." 루돌프 보렌의 이 말은 공의가 땅에 떨어진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설교가들에게 정문일침이 되고 있다.

주일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넘치지만, 인격을 변화시키고 삶의 방식을 바꾸어 예수적 존재가 되도록 하는 말씀은 드물다. 홍수에 마실 물 얻기 어려운 격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하나님에 관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한국교회의 강단에 지적인 담론이나 예언자의 사자후, 영성가의 뜨거운 외침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듣는 이의 존재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 기어코 변화 사건을 일으키고야 마는 말씀은 드물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먼저 선포의 내용을 살펴보자. 현대의 많은 설교자들이 성서의 내용 중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될 만한 대목은 좀처럼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대중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말로는 세상살이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에게 교회에서조차 짐을 더해 줄 수는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예수의 복음이 현대인들에게 매력있는 상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공급한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선포한다. 정말 그런가? 우리의 경험은 그런 지나친 단순화를 추인할 수 없다. 생물계의 복잡성만큼이나 생은 복잡하고 모호하다. 예수 믿는 이들도 예기치 않았던 생의 어려움을 만난다. 그것이 모두 그의 죄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설교자들은 인생의 문제에 대한 산뜻한 해답을 갖고 있다. 우리가 겪는 모든 불행의 뿌리는 죄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착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도 생의 악조건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타자화' 하는 행위이다. 한국의 강단에 욥의 고뇌나 시편 기자들의 탄식이 설 자리가 정녕 없는 것인가?

한국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위로와 도전 사이의 균형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몸의 균형을 깨고 병을 일으키는 상태, 곧 '파탄'을 뜻하는 그리스어 '모나르키아'는 한 쪽의 지배를 뜻한다고 한다. '위로'는 물론 소중하다. 하지만 '도전'도 또한 중요하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욕망의 구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말씀, 우리를 가두고 있는 욕망의 굳은 성벽을 깨뜨리는 '망치 말씀', 가파른 욕망의 절벽에 틈을 만드는 '칼날 말씀'이 배제된 '미풍 말씀'만으로는 하나님의 침묵을 깰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물질적인 복이나 건강이나 영혼의 평안을 위해 죽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독교가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중산층의 아편'이 되었다는 자조적 자평은 우리가 예언자적 야성을 내동댕이쳤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우리의 안이한 생을 질타하는 예언자적 소리, 종말론적 긴박성을 일깨우려는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복음적이냐이다. 아마겟돈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이들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두려움'을 주입하여 그들을 지배하려 한다. 종교적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두려움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듯한 어떤 개인을 '우상화'함으로써 마음의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유를 저당잡힌 대가로 천국을 약속받는다. 저들에게 세상은 '장망성'이지 '하나님이 거니시는 땅'이 아니다.

시인은 "모든 생명이 흥청대는 세상을" 꿈꾸지만 두려움의 창조자들은  생명이 숨죽인 세상에서 만족의 웃음을 터뜨린다. 사람들을 몽매함으로 몰아넣는 이런 일단의 사람들 때문에 한국교회는 '미성숙의 난장판'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설교의 문제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설교자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은 '말하는 자'의 존재를 반영한다. 오늘의 설교가 변화사건을 일으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말하는 이의 삶이 그들의 증언을 뒷받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개하는 말은 힘있는 이들의 남용에 의해 타락하고 만다.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이가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를 들고 나오지 않았던가. 누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말하는 그가 누구이냐가 중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첫번째 반응은 놀람이었다. 그것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기"(마 7:29) 때문인데, 사람들에게 놀람을 불러일으킨 것은 메시지의 새로움이 아니라 메신저의 존재가 아닐까?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과 민중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그의 존재에서 방사된  빛 앞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어둠이 폭로되는 동시에 치유되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말은 매끄러운 말, 세련된 말이 아니다. 투박할지라도, 어눌할지라도 진정이 담긴 말, 진실이 배어있는 말이라야 조개를 닮은 우리 자아의 껍질을 뚫고 들어가 우리 속에서 변화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나를 신앙의 길로 이끌고, 신학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신 목사님은 설교를 잘하는 분이 아니었다. 농담삼아 하는 말이지만 그는 설교 못하기 대회에 나가면 일등은 못해도 입상은 하실 만한 분이었다. 그러나 그를 통해 하나님은 나를 사로잡으셨다. 참 말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말은 맒(勿)이라 했다. 참 말은 말이 없어도 통한다. "낮은 낮에게 그의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그의 지식을 알려 준다"(시 19:2)지 않던가?

남을 가리킬 것 없이 다짐하듯 내게 말한다. "한 나라의 장래는 결국 그 땅에 있는 설교자의 성실성에 좌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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