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 기자는 설교한 시점의 컨텍스트를 존중해야 한다에 대하여

옳다. 모든 설교는 그 시점의 컨텍스트, 즉 사회적, 역사적 공간의 특수성을 전제하지 않고 읽어나가면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성경독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리일 것이다. 설교가 행해진 시대적 상황이 경제적 곤경에 빠져 있는 암울한 형편이어서 젊은이들에게 진취적 기상을 불어넣어 주고 쉬운 길로 가지 말고 대가를 지불하는 노력을 하라고 촉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선호 님은 "전 목사의 소위 성취이데올로기도 선교적 필요성의 앞자리인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선교적 열정을 간과한 채 그를 신자유주의 성공주의자로 매도하지 말라. 법조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교인들에게 사법고시를 준비시켰다는 전 목사의 말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이것도 엘리트주의, 성취주의로 몰아세운다면 이성규 기자는 운동권 근본주의자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앞길이 막막하고 기운을 잃은 청년들에게 진취적 기상을 심어주고 시대의 선도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은 좋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법조계의 변화를 위해 선교적 열정을 근거로 한 사법고시 준비 격려 또한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러한 선교적 열정과 진취성을 강조하는 강좌가 이렇게 끝맺음해도 되는 것일까?

"잔치를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가나안의 혼인잔치 같은 경우는 혼인할 때 예수님을 부른 거죠.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준 것은 이 장면이 처음이예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고귀한 향유를 부어 주었습니다. 300데나리온 자리를 박살을 내서 콸콸콸 붓지 않습니까? 1데나리온이 일당이니까 일당 한 5만원 잡으면 천오백만원 짜리를 깨서 콸콸콸 붓자 그러자 옆에 있던 가롯 유다가 그 향유 아깝다,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 라고 말합니다. 꼭 은혜를 모르는 녀석들은 이따위 소리를 한다고요. 한번 생각을 해봐요. 여러분들이 일곱귀신 들렸고, 결손가정에다 창기였는데, 그것을 다 회복시켜줬어요. 천오백만원짜리 그것 하나 못깨서 회복못시켜 줘요? 그걸 못붑니까? 저는 은혜받은 사람의 증거 중의 하나가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생각할 때 드릴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입니다. 돈. 돈 바치는 게 뭐가 힘들어요? 여러분, 1억을 바칠까요? 팔 하나를 자를까요? 뭘 하시겠습니까? 1억이요. 있으면 1억이 아니라 10억도 주죠. 팔을 왜 잘라요? 1억을 바칠래 네 딸을 바칠래? 하면 무엇을 바칠까요? 1억을 바치죠. 생각만 해도 귀중하고 가슴이 뭉클한 딸을 어떻게 바쳐요. 생각해 보라고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제일 드리기 쉬운 것이 뭐예요? 돈이죠, 돈. 그래서 성경은 헌금에 대해서 헌신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일이 뭔지 아십니까? 돈이 없답니다. 6억이 없어서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용하라고 주신 것 아닙니까? 목요일날 헌금하겠습니다. 여기 만명이 모였다고 하는데 돈 없는 사람 있다는 거 다 알아요. 만원만 헌금하십시오. 1억이 나옵니다. 여기 장년들 많지 않습니까? 100만원씩만 헌금하십시오. 돈 뒀다 다 뭐할 거예요. 1억 나와요. 그리고 4억은 판매해서 만듭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이 있는데 1억만 쓰면 만명이 주님께 돌아오는데, 10억을 쓰면 10만명이 주님께 돌아오는데 그거 안 하겠습니까?" 그리고는 하나님을 위한 귀한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그의 강좌를 마치고 있다.

전 목사가 김선호 님 이야기대로 젊은이들을 이 시대의 선교적 열정으로 뭉친 존재로 만들어 오늘의 역사적 현실의 암담함을 뚫어낼 역꾼으로 길러내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러나 그의 강좌와 설교는 "성경은 헌금에 대해서 헌신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의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그의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청년들이 어떤 마음을 먹게 될 것인지 이 시대의 청년 기독교인들의 삶이 처참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슴이 아프다. 우리의 컨텍스트, 즉 역사적 문맥과 사회적 현실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세속적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려 할 때에, 누가 보든 안보든 인정하든 아니하든 상관하지 않고 있거나 없거나 자신의 삶을 다해 하나님의 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해 도처에서 누룩같은 존재가 되어 이 시대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다. 이 기획의 본질적 메시지에 김선호 님이 귀를 기울인다면, 전병욱 목사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그토록 적대감을 느끼지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7. (1)이 기자는 정말 전병욱 목사를 사랑해서 이런 글을 쓰는가?/(2)이성규 기자는 유령선 글쓰기를 중단하고 커밍 아웃하라./(3)이성규 기자는 패거리주의자인가?/(4)뉴스앤조이의 한탕주의, 선정주의를 경계한다 등에 대하여

(1) 이 기자는 정말 전병욱 목사를 사랑해서 이런 글을 쓰는가?: 김선호 님은 필자가 전 목사의 목회가 부흥하고 건방져서 등의 이유로 이 글을 쓴다고 고백하라고 다그치고 있다. 필자는 그렇게 개인적인 시기심의 한풀이를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전 목사보다 위 세대 선배로서, 그의 젊음에 대하여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신학적으로 바로 세워 새롭게 사용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사랑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시대 한국교회의 현장에서 스타로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그 스타성의 가치를 전 목사가 잘 사용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더 이상 기득권 질서의 세속성에 물든 신학에서 빠져 나와, 통렬한 마음으로 이 시대의 진정한 변혁을 바라는 심정으로 새로이 출발하라. 그러면, 전병욱 목사는 그 개인적의 삶에 있어서나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나 귀중한 역량으로 자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그의 스타성의 수명은 의외로 짧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글과 말에서 배어나오는 인격적 미성숙함에 대하여 아프게 지적하자면, 그의 발전의 가능성은 매우 제한될 것이다. 김선호 님 또한 그를 아낀다면, 그런 차원에서 적절한 충고를 해주기를 바란다.

(2) 이성규 기자는 유령선 글쓰기를 중단하고 커밍 아웃하라.: 필자 이성규 기자는 뉴스앤조이의 고정기자이며, 한국교회의 신학과 목회와 관련한 팀의 대표집필자이다. 이 팀의 구성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의 목회자, 신학자, 언론인, 평신도로 되어 있으며 적절한 시기에 공개할 것이다. 이 작업의 이론적 성과가 충분히 익어 가면 이 팀은 한국교회의 개혁적 변화를 위한 운동의 역량을 규합해 나갈 것이다. 이 작업은 전병욱 목사 한 사람을 목표로 한 개인적 음해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점이 오기 전까지는 우선은 이들 역량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신상공개는 사절이다. 이 점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상황에서 아직 역부족인 개혁세력이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함 때문이며, 전력(戰力)노출이 가져올 피해를 막기 위함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며 한국교회의 개혁적 변화를 소망하는 이들의 양해와 성원을 구하는 바이다. 이들은 이 작업이 갖는 사회적 파장 때문에 자칫 소속 교단이나 소속교회, 그리고 소속 신학교, 소속 언론사의 현실적 압박에 처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차원이 있기에 지금으로서는 김선호 님이 바라는 '커밍 아웃'에 응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비판의 요점과 그 메시지의 교회적, 사회적 의미이다. 이 점 우리로서도 내부에서, 이 논쟁을 계속 전개시켜나가는데 있어서 최대의 약점으로 인정하고 있는 바이지만, 일단 필자 이성규 기자의 대표집필 방식에 독자들의 우호적 이해를 소망한다.

(3) 이성규 기자는 패거리주의자인가?: 이 대목은 이미 (2)항에서 밝힌 바 대로이다.

(4) 뉴스앤조이의 한탕주의, 선정주의를 경계한다: 앞서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이 기획은 뉴스앤조이가 한국교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개혁적으로 극복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것은 한탕주의나 선정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의 기획은 철저하게 논리적 해부를 중심으로 삼고 있으며, 인기를 모으기 위해 위악적(僞惡的)으로 근거도 없이 누군가를 매도하거나 인신공격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이 기획은 오늘날 한국교회와 신학을 지배하고 있는 집단적 잠재의식의 문제를 깊이 성찰하고 그 실상을 파악하는 가운데, 새로운 변화의 돌파구를 마련해보려는 노력에 있다. 그러한 점에서 김선호 님의 반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반론이 없던 차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문제를 놓고 장문의 논쟁을 벌일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것이 향후 여러 가지 새로운 논쟁의 계기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선호 님의 반론제기와 같은 작업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단, 사족을 붙이자면, 김선호 님의 글에서 "일반운동권에서는 한물 간 담론들을 기독교권으로 끌어와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으면서 순진한 크리스천들에게는 마치 굉장한 디스꾸르를 구사하고 있는 것처럼 분장하는 유치함을 보인다" 또는, "이성규 기자는 지금까지 자신의 텍스트를 아무도 문제삼지 못했음을 은근히 과시하면서 자신에 대한 텍스트 비판을 목마르게 사모하는 것 같다. 독자들의 침묵을 자신의 글쓰기 실력에 제압당한 것으로 오만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의 이런 사랑타령을 들을 때마다 어느 유명한 왕년의 은막스타가 이혼하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이런 신파조 논리로 이성규기자의 글쓰기를 정당화하지 말라. 아예 사내답게 전목사가 미워서 쓴다고 고백하라. 그가 부흥해서 싫고 건방져서 싫고 잘 나가는 자 자빠뜨려서 좋다고 하라. 나는 솔직히 이 기자를 사랑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 기자가 좁은 기독교권에서 교만한 글쓰기의 전범을 보이기 때문에 나는 이 글쓰기를 시도했을 뿐이다." 식의 표현은 앞으로 피해주었으면 한다. 필자는 김선호 님의 글에 대하여 이런 식의 감정적 규정을 한 바가 전혀 없음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일종의 공개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의 기본적인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닐까? 상대의 연령이나 처지에 대하여 일체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비평적 논쟁은 더더욱 조심스럽지 않은가. 그리고 이 기획의 주요 비평대상은 어디까지나 전병욱 목사를 비롯한 한국교회의 현실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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