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선호 님의 반박과 관련하여

우선 무척 반가운 일이다. 전병욱 목사의 신학적 관점과 그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해부를 하고 있는 본 기획에 대한 지지반응을 제외하고는, 반대의 입장을 표하는 경우 김선호 님의 글만큼이나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세우고 비판하는 글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내용도 대목 대목에서 글쓴이에 대한 논리적 공박을 넘어서는 인신공격적 적의(敵意)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의 아쉬움을 제외하고는, 기존의 비판적 반응에 비해서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문제제기도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논쟁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기획이 기대하는 일 가운데에는 바로 이러한 논쟁의 장이 진지하고 풍부하게 펼쳐지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김선호 님의 글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고뇌와 신학적 진로를 정리해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까닭에 이번 글에서는 김선호 님의 반박을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해보도록 하자.

본 기획기사에 대하여 김선호 님의 기본적인 느낌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뭘 좀 안다고 오만한 착각에 빠져 교만한 지적과시(知的誇示)에 치중해 있으며, 혹 80년대에나 담론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말까 한, 그래서 운동권에서조차 한물간 사회과학적 담론으로 독자들을 압도하려는 유치한 자세를 가진 것으로 되어 있는 듯 싶다. 그래서 독자들이 글의 내용 비판에 침묵하고 있는 것을 마치 자신의 글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또한 전병욱 목사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시기심이 기본 동기가 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마음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신학적 관점도 이미 폐기처분의 대상이 되고 있다시피 한, 계급갈등을 부추기는 편향된 해방신학적 논리에 물들어 가난한 자나 부자 모두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성서적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인문학적 기초 소양도 부족해서, 작품의 '독자비평'적 관점에 대한 몰이해로 말미암아 설교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작품의 일부를 충분히 활용해나갈 수 있는 여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설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그 설교가 행해지고 있는 시점에서의 사회적 문맥을 도외시한 채 함부로 난도질함으로써 설교의 본질적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 이제 김선호 님의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필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2. 기획기사의 본질적 목적

첫째, 이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기획의 목적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빠지고 있는 물량주의와 성공주의, 그리고 기득권 질서에로의 편입에 대한 야망 부채질하기를 논란의 주제로 삼고 이를 극복하자는 점과 관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기획의 그러한 본질적 메시지에 문제가 있는가 없는가가 우선적인 비판의 초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 메시지 자체에 문제가 없다면, 그래서 전병욱 목사의 논리를 옹호 내지는 변호하기 위해서는 그가 한국교회의 그와 같은 모순과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없는가에 그 관건이 있다.

전병욱 목사가 한국교회의 물량적 성공주의를 비판하고, 오늘날 여러 가지로 고난받으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의 의와 선, 생명의 영을 불어넣는 나사렛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한다면, 그리고 부당한 기득권 질서를 움켜쥐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파는 자들을 향해 예언자적 칼날을 세우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면 이 기획기사는 출발부터 그 대상선정에 잘못을 범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전병욱 목사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비판은 그의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이끌고 있는 교회와 한국교회의 청년층의 진로에 중대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기획에 대한 비판의 첫 출발은 기획 의도의 본질적 목적과 관련한 논란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만일 그 목적 자체에 대한 합의가 있다면, 그 다음으로는 전병욱 목사의 경우에는 이 합의된 가치에 전병욱 목사 또한 마찬가지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또한 오늘날 한국교회가 빠지고 있는 물량적 승리주의를 함께 부추기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기획을 통해서 그가 한국교회의 모순을 도리어 심화시키고 있는 목회자의 한 대표적인 경우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획의 본질적 목적과 그 대상 선정에 문제가 있다면, 전병욱 목사야말로 한국교회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여 한국교회가 그간 그토록 비판받아온 물량적 성공주의의 덫에서 빠져 나온 의미있는 경우라는 점이 입증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입증을 위한 증거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만일 목적에 대하여서는 합의할 수 있으나, 그 방식에 대하여서는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면 그 방식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방식과 관련하여 김선호 님은 이 기획기사의 신학적 모항(母港)이 자유주의적 해방신학으로서 성서적 전거(典據)의 복음성과는 거리가 있는 편협한 좌파적 계급투쟁론에 근거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을 이후의 마르크스나 레닌의 관점에서 해석해 들어가는 시점의 오류에 빠져 이들 두 사람의 종교개혁자들의 총체적 업적을 도외시했으며, 예수의 경우에도 보편적 인류에 대한 구원자가 아니라 가난한 민중에게 편향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결국 그러한 신학적 편협성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복음과 예수님의 실존에 대한 훼손을 가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에 중대한 왜곡을 가져왔다는 논리가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한 논평을 하겠으나, 간략하게 그 핵심을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즉, 오늘날 교회가 부당한 기득권 질서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대하여 함께 마음 아파하며, 이들의 아우성을 대변함으로써 주기도문에서 명백하게 선포되듯이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작업에 자신을 내놓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뿌리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부자들의 회개'라는 것도 이들이 자신들의 삶만 누리는데 치중한 나머지 가난한 자들의 삶을 방치하고 있다는 점에 나사렛 예수의 요구가 가로 놓여 있다는 점은 부자 청년의 경우나, 삭개오의 경우에서도 명징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무수한 부정의와 부패, 그리고 모순의 주범들은 대체로 누구인가? 힘없고 약한 가난한 자들인가? 가난한 민중들의 회개란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는 삶 대신에, 이들이 부자들의 욕망과 자기보다 약한 인간에 대한 멸시를 그대로 베껴 자신들의 삶도 그렇게 탐욕스럽고 죄 되게 살면 잘 사는 줄로 아는 생각에서부터 벗어나라는 것에 그 초점이 있다. 전편의 글에서 전병욱 목사가 한때 운동권이었던 친구들이 좋은 차에 힘있는 자리에 오르니 괜찮은 인간이 되었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한 것을 비판한 경우를 보더라도, 전병욱 목사는 인간의 진정한 변화의 중심에 물질과 권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전제를 내면에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을 축복으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김선호 님의 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자리와 그 편에 서는 일에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섬뜩함이 있다. 이들의 가난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발생한 가난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으나, 하나님의 의가 세상에 이루어지지 못한 차원에서 발생한, 즉 그 사회 구성원들의 영적 상태와 방향이 모두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에 몰두한 총체적 집적의 결과라는 차원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우는 일이, 그리고 이들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세상에 호소하고 그것을 함께 풀어나갈 정신적 자세의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 만일 계급갈등을 증폭시키는 일이라고 한다면, 가난한 이들의 아우성은 과연 누가 대변해 줄 수 있을까?  

마리아의 그 시대 전체의 불의를 치는 매서운 기도를 기억하는가?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갈릴리의 촌무지렁이 같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의 권세자들에게 겪고 있던 고통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던 시절, 그 마리아의 기도는 하나님의 의를 바라는 모든 이들의 절절한 간구였으며 나사렛 예수는 바로 그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실체적 응답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의 성경을 읽으신 첫 대목은 무엇이었던가?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여기서 가난한 이들은 단지 물질적 가난과는 관련이 없는 영적 빈곤만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가난한 민중, '오클로스'가 하나님의 은혜 하나만을 절박하게 바라고 몰려들었던 점을 통해서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가난하다는 것이 주는 그 엄청난 고통에 대해서 인간적 고뇌와 아픔을 느끼는 이들이라면, 하나님이 그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강하고 부한 이들의 횡포를 막아주시고 그들에게 의로운 평화와 참된 번영을 주시고자 하는 것에 어찌하여 적의를 느낄 수 있을까?

가난한 이들의 문제만 제기하면 무조건하고 해방신학 운운으로 매카시즘적 발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해방신학의 역사적 현실인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그 고통스럽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던 삶에 대해서도 아파하지 않는 마음의 발로이자, 성경의 출발이 바로 '노예해방'의 사건에서 그 웅대한 시작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망각한 결과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신학의 문제는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부한 자들, 강한 자들과 짝하여 부당한 기득권 질서를 옹호하고 유지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는 점이 아닌가?  

그러면서 이들 부하고 강한 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언제나 계급 투쟁적 편향성이 된다면, 기독교 신앙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삭개오의 회개가 어떤 고백을 낳았는지 성서의 육성을 직접 경청해보자.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이 놀라운 삶의 실질적 전환을 보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세례 요한은 부르짖었는데, 삭개오는 바로 그 열매의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그 삶 전체로 증명해내고 있지 않은가?  

한국교회, 그리고 전병욱 목사는 이 삭개오의 고백이 갖는 신학적 의미를 가볍게 여기지 말기를 바라며, 김선호 님 역시 이 글의 절절한 심사가 어디에 비롯되고 있는지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예수께서는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의 구원자라는 점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바로 이 가난한 자들의 삶에 사랑의 눈길을 돌리신 예수님의 삶은 한사코 외면하고자 하며 그 가난은 언제나 개념화하거나 관념화하려는 한국교회의 위선적 현실을 우리는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셋째, 뉴스앤조이가 선정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언론의 선정성'이란 그 언론의 가치를 부상시키기 위해서 누군가를 악의적으로 희생토록 만드는 방식이다. 우리는 뉴스앤조이가 '뜨기' 위해서 전병욱 목사를 첫 비판의 대상으로 고른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점에 대해서는 수 차례 언급한 바 있기에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뉴스앤조이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 출발한 언론이다. 그 출발의 본지(本志)에 따라 기획기사를 마련하고 있음을 이미 밝힌 바 있으며 전병욱 목사의 경우는 이제 그 시작에 불과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의 기획과 그 비판의 대상은 전병욱 목사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이며, 이 기획에서 확립된 논리와 관점을 통해서 그 전선을 점차적으로 확대해나갈 것이다. 독자들은 전병욱 목사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현실을 유지하고 있는 일체의 신학적 논리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논쟁의 형식을 통해서 현실을 정리하는 일에 노력할 것이며 이것은 고정된 사고에만 맴돌던 한국교회와 신앙유형에 중대한 도전과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만일 전병욱 목사에 대한 비판적인 기획이 독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획의도에 중대한 사회적 의미가 실리게 된 실례라는 점이 입증된 것이며, 이것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귀중한 장이 확보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장을 포기할 의사가 없으며, 더더욱 중요한 영향력을 가져서 한국교회의 현실적 모순과 신학적 한계를 돌파해내는 공동의 작업이라는 의미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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