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포지엄에 참석한 발제자들. ⓒ뉴스앤조이 신철민

온누리교회(하용조)가 300억원의 헌금을 모아 국내와 해외에 30여 곳의 교회를 건설하겠다는 이른바 ACTS29라는 의욕적인 교회개척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대형교회 지성전 문제가 관심의 초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월간 <기독교사상>이 마련한 '한국교회 지성전 체제 무엇이 문제인가' 심포지엄에 참석한 여러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지성전은 우선 명칭부터 비성서적이고 신학적으로도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발제자들의 원고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다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바른목회실천협의회 이사장)


▲손인웅 목사. ⓒ뉴스앤조이 신철민
*대형교회가 낳은 지성전이라는 기형아

한국인들은 큰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강하다. 자신이 너무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작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큰 것을 지향하는 사대사상(事大思想)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한 콤플렉스가 작용해 교회도 대형교회를 선호하고, 대형교회 교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

대형교회는 재정적, 인적 자원의 풍부함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에게 많은 서비스를 하고 있다. 따라서 가난하고 작은 교회를 힘겹게 섬기면서 고생하는 성도들은 대형교회를 부러워한 나머지 기회만 있으면 대형교회로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작은 교회는 더욱 약화되고 쇠퇴하며 문을 닫는 수가 늘어나는 실정이다. 대형교회들이 한 곳에 교인을 모으다가 수용능력이 한계에 부딪히자 이것을 돌파하기 위해서 부속시설에 TV 수상기를 설치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동서남북에 지성전을 설립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욕심이 지나쳐서 위성중계를 통해 전국적으로 지성전을 확장하고 심지어는 유명 브랜드로 세일하는 기업체처럼 해외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어떤 인물을 부각시켜 교세를 확장하고 그 교회 이름으로 지성전을 설립해 세계를 복음화하려는 선교적 시도는 위험한 발상이다. 모든 교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한다는 신앙고백으로 예수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이다.

*지성전이란 신조어의 근거와 출처

지성전이라는 말은 1990년대 초 모 교회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그 교회는 본 교회에서 예배드린 실황을 비디오테이프로 만들어 서울 경기 지역 여러 곳에 예배당 형식의 지성전을 마련하여 그 지역에 가까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비디오 영상예배를 드렸다.

그 위에 위성중계로 화상예배를 드리면서 그 지역은 물론 국내 여러 곳과 외국에까지 확산되었다. 지성전이라는 아이디어는 지교회라는 개념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성전이라는 말은 구약시대의 예루살렘 중앙 성소를 지칭하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전'의 개념과 '교회당' '예배당'의 개념, 지성전과 지교회의 개념에 따른 제사장과 목사의 개염, 성전제사와 교회의 예배에 대한 이해 등을 바르게 확립해서 오늘의 엄청난 혼동과 오류를 극복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정립해야 할 과제는 '성전'이라는 말을 예배당(교회당)의 뜻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성전제사'라는 용어도 '교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혼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목사'가 '제사장'이라는 의식도 보리고 오히려 '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지교회의 개념을 '지성전'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을 철저히 금해야 한다.

*TV 모니터 앞에서 위성중계로 드리는 영상예배의 문제점

영상매체를 활용한 선교와 교육, 문화활동, 지식전달은 많은 효과를 거두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앙에서 송출하는 예배 프로그램으로 지성전에서 예배드리는 방법만은 분명히 사탄의 유혹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모시고 설교자와 성도들과 함께 인격적 만남 속에서 지고지선의 정성을 드려서 경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탄의 유혹이라는 사실의 증거는 예배의 본질 훼손과 모이는 교회의 파괴, 교회의 쇠퇴현상 등이다. 특별히 성만찬 의식의 의미약화 현상이나 설교자와 인격적인 만남이 없는 가운데 영상 앞에서 인간을 높이며 따르는 행위는 설교자를 우상화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약화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멀어지게 한다.

*장로교회의 원리와 헌법정신, 교회설립 규정에 따르면 지성전의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

회중교회들이 지성전을 세우는 것은 개교회의 자유로운 결정으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장로교회는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라는 전제 아래 '노회의 교회'이므로 지교회라고 부른다.

지교회는 반드시 지역노회에 소속되어 교회를 설립 합병 분립 폐쇄할 때 노회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노회에서 파송하는 당회장이 담임목회를 해야하며, 교회의 재산은 노회 유지재단에 편입하여 보존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가 타 노회 지역에나 같은 노회 지역에 교회를 설립 할 때는 반드시 그 노회의 소속 지교회가 되는 것이지, 설립한 교회의 지교회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대형교회들이 여러 지역에 지성전을 건립해서 실제로는 교회의 기능으로 운영하면서도 재산권 문제 대문에 기도처나, 여러 지역에 지성전 형태로 운영하는 것은 불법이다.

지성전 개념의 교회들이 중앙 성전에서 재산권을 가지고 교역자를 파송하고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통제하며, 예배권까지 장악해서 위성으로 송출하는 예배 프로그램을 TV 수상기로 수용하도록 운영하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지역교회들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지성전은 '선교' 아니라 '선전'이다
한국일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학)


▲한국일 교수. ⓒ뉴스앤조이 신철민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처럼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교회는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보기 드물다. 교회를 중히 여기며, 교회를 세우는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신앙형태는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독특한 점이다. 해외 선교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선교사들이 가장 잘하는 것도 교회개척 사역이다.

그러나 교회를 중요시하는 태도 이면에 교회를 병들게 하는 원인이 작용하고 있다. 교회지상주의 현상이다.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교회생활과 동일시하고 하나님 나라의 활동은 교회의 내부 활동으로만 이해한다. 목회자와 성도의 최대 관심사와 비중을 교회 자체에 두었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를 절대화하며 신성시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지교회 체제는 교회성장운동 과정에서 교회 자체를 절대화하는 교회지상주의와 개교회주의와 내부 지향적 성향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형태이다. 몇몇 대형교회나 성장하는 교회들에 의하여 주도되는 지교회 체제는 교회성장운동이 한국적 상황에서 낳은 역기능적 현상으로서 한국교회의 성장에 어두운 그림자가 되고 있다.

*교회 안의 종교적 세속 형태

지교회 체제는 표면적으로는 개교회 성장과 한국의 복음화를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나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세속주의적 동기와 배경이 반영되어 있다. 교회사를 보면 어떤 시대나 교회는 항상 세속주의적 유혹에 노출되었으며 또한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아왔다.

지교회 체제는 한국교회 안에 반영된 종교적 세속형태 중 하나이다. 지교회 체제에서 발견되는 구체적인 세속화 현상은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원리이다. 사회학자의 분석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은 개인의 창의성에 힘입어 번영하기 때문에 어떤 통제나 간섭을 받지 않아야 가장 잘 움직인다고 믿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장은 끊임없이 성장을 조달하는 영구적 장치라고 말한다.

*왜곡된 교회성장론: 성장제일주의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모든 교회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고 더 나아가 성장하는 것 자체가 교회의 목표가 되면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을 위해서 도구로 세워진 교회가 오히려 목적이 되는 목적전치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성장 과정에 가장 자주 발생하는 문제점이다.

교회성장이 목회와 선교의 목적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크게 문제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동기나 과정이 결과에 따라 합리화되는 실용주의적 사고의 토대 위에 전개된 1970-1980년대의 한국교회 성장은 한국사회의 자본주의화 과정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물질주의, 기복주의, 현실주의, 경쟁적 교회성장주의, 성직자중심주의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개교회주의, 교회 대형화주의의 산물

지교회 체제의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지교회의 문제점은 개교회주의가 낳은 당연한 결과이다. 개교회주의는 한국교회 운영의 기본적 원리로서 교회 성격을 결정하며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발생시키는 원천이 되고 있다.

국내 목회와 해외 선교활동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과정이 모두 개교회주의 구조와 방식으로 진행된다. 개교회주의는 한국 상황에서는 교회의 특성을 결정하는 데 교파주의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지교회 체제 역시 이러한 개교회주의가 교회의 대형화 욕구와 결합하여 빚어진 현상이다.  

*선교와 선전의 혼돈
지교회 제도에서는 선교와 선전이 서로 혼돈되고 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선교와 선전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이나, 선전은 그 복음의 전달자인 교회 자신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다. 선전은 교인을 얻기에 급급하여 선교활동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선교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이다. 선교는 물론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자기 교회의 유지와 확장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느 교회에 소속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교회 선전은 지명도가 있는 목회자와 교회의 인지도를 사용하여 기존의 지역교회에 소속된 교인들을 유혹할 수 있다.

'교회'이길 거부하는 '지성전'은 반성서적
정훈택 교수(총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정훈택 교수. ⓒ뉴스앤조이 신철민
지성전은 기독교적 개념이 전혀 아니다. 신약성서는 신자들이나 교회가 사용하는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신약시대에 새롭게 탄생하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신부', '그리스도의 몸'을 지칭하는 용어로 예수님은 '교회'로 번역되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마 16:18, 18:17).

'교회'는 근본적으로 건물을 지시하지는 않지만 신자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는 항상 장소나 건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교회가 모이는 곳, 혹은 사용하는 건물도 자연히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에서 '교회'는 더 이상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하나의 뜻으로만 사용되지 않고 신자들이 사용하는 건물/장소란 파생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기독교와 한국교회의 전통에서 보면 지성전이란 지교회일 뿐이다. 비록 경제적, 정치적, 구조적, 예전적 차원에서 본성전에 예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지성전은 교회 구성의 요건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몇몇 교회 지도자들, 목사들이 고의적으로 전통적 용어를 회피하고 파격적인 새 용어를 만들어 내어 새로운 체제를 적용해 가는 것은 반기독교적이고 비기독교적이다.

지성전은 성서적 개념이 전혀 아니다. 오래된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운 규칙이나 제도를 끌어들이려는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성서에서 한 단어를 발췌하여 자신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 특수하게 이념화하는 것이다. 지성전이라는 이름도 그런 과정을 밟은 것으로 보인다. 성전은 구약 신앙과 구약성서의 중심에 서 있는 개념이다.

그 주 기능은 제사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규정하셨다. 서기 70년 파괴된 성전 대신 교회가 사용하는 건물을 "기도하는 집"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이 '교회=성전'이라는 한국적 등식을 탄생시켰다. '모교회-지교회'라는 용어들은 오래 전부터 한국교회에 사용되어 왔으므로 지교회를 지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지성전 개념을 비성서적이라고 규정하는 까닭은 성서에는 어느 시대에나 하나의 성전이 등장할 뿐이어서 그렇다. 한편으로는 교회 건물을 신성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부속관계와 일치된 지도력을 표현하기 위하여 구약적 개념인 (지)성전을 사용했지만 개신교 전통을 버리고 저 먼 옛날, 즉 구약 시대와 유대교적 사고로 돌아가 보았자 지성전은 그 개념도 형체도 없다.

더군다나 현대로 돌아와서도 성전이든 지성전이든 이를 대체할 만한 다른 어떤 건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성전 없는 미래를 이미 예언하셨고 그 예언대로 성전은 파괴되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치워지고 말았다.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 "하나님과 그의 어린양이 그 성전이기 때문이다"(계 21:22). 그런데 무슨 지성전인가?

지성전 개념은 완전히 이교적이다. 하나님은 한 성전 이외에는 다른 성전 즉 지성전을 명령하신 적이 없다. 인정하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뿐이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누구나 이곳에 와서 지정된 단에서 바쳐야 했다. 다른 성전 다른 단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였다. 물론 지성전의 개념을 가진 다른 단을 세우고 다른 성전을 세운 사람들이 있기는 하였다.

백성의 마음을 뺏기지 않으려고 여로보암 왕이 벧엘과 단에 다른 단을 만들고 백성들이 그곳에서 분향하게 했다(왕상 12:28-33).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보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심 산에 그들의 성전을 지었다. 이집트로 도망친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를 위해 이집트 왕이 기원전 150년경 레온토폴리스에 다른 성전을 지어준 적이 있다.

유대인들이 관계된 다른 성전, 다른 단의 얘기는 이것뿐이다. 하나님이 외면하시거나 징계하시는 잘못된 것 외에는 지성전과 비교할 만한 것이 어디에도 없으므로 지성전 개념은 이교적 개념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상적 교회는 없다

한 지역교회가 그들의 이름을 다른 지역 교회에도 사용하며 체제를 확장하고 그 한 부분을 (본)성전으로, 다른 부분을 지성전으로 구별하여 지도력을 광범위하게 구사하려는 생각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 그런 사고방식 뒤에는 '이상적(理想的) 교회'에 대한 향수와 열정 그리고 이를 성취하려는 목회자 개인의 욕망과 교만이 깊게 깔려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이 세상에 이상적 교회란 없다. 물론 신약성서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지역교회들의 모체가 되었던 예루살렘 교회도 일시적으로 모교회(母敎會)의 역할을 잠시 한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오순절 이후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동생활을 했던 것도 잠시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 특히 그 초기 공동생활을 그리워하며 이상적 교회의 본을 그곳에서 찾으려 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오늘날의 교회가 모형으로 삼기에는 비교하기 어려운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차이점들을 해소하지 않은 채 예루살렘 교회를 이상적 교회의 모델로 삼는 일은 지극히 위험하다.  

*이상적 목회자는 없다

지성전에도 담임목회자가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앙도, 신학도, 전도하고 교인들을 돕는 독자적 목회 방법도 소신껏 구축하거나 실행하기 어렵다. 예배에서도 그는 극히 제한된 역할을 할뿐이다. 지성전의 모든 것은 (본)성전에서 나온다. 설교도 영상을 통하여 (본)성전의 목회자의 설교가 교인들에게 중계된다.

이런 과정에서 (본)성전의 목회자는 이상적 목회자로 부각되고 (본)성전과 지성전에 절대적 지도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것은 (본)성전의 목회자에게서 강요된 것이다. 즉 한 목회자가 소위 성공한 목회자라는 평판에 편승하여 자신의 목회관, 목회자상을 모든 교인들과 지성전의 담임목회자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 목회자상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신약성서에서도 이상적 목회자 상을 얻어내기 어렵다. 신약성서에서 어떤 인물도 한국에서 지성전을 세우는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는 활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지도하면서 다른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을 뿐 자신의 이름이나, 자신이 간여한 교회의 이름으로 자신의 공적과 능력을 확산해 가지 않았다.

교회의 편법이 기독교 위기를 앞당긴다
이정배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이정배 교수. ⓒ뉴스앤조이 신철민
*편법이 판치는 오늘의 한국교회

한국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고 교회가 생겨난 지 1세기를 지나면서 개신교는 사회의 지탄을 받으며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20-1930년대 한국 기독교가 민족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선교사에 빌붙어 자기 배를 채우고 있을 때, 당시 사회는 예수를 길바닥에 내쳐 버리고 말았다.

타락한 이승만 정권을 한국교회가 감싸 안고 있을 때 백성들은 교회를 향해 돌팔매질을 해댔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 이상이다. 교회를 향해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의 비판이 거세다. 사회적 부가 세습되고 가난이 대물림되는 상황에서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온갖 이유로 자식의 세습을 정당화하며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하는 구조 속에 편입되어 있다.

종교귀족이란 말이 회자된 지 오래이다. 감독과 총회장을 뽑는 선거의 타락상은 성직을 의심케 한다. 거룩의 탈을 쓰고 세속 정치인의 권모술수를 배우며 피와 땀이 배어 있는 헌금을 똥으로 만들어 버린다. 해서 제비뽑기라는 자기 모멸적인 선거방식이 거론되고 있을 정도이다. 소수이긴 하나 교회 헌금으로 치부한 목회자가 있고, 도덕적 순결함을 상실한 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며, 성직 매매, 교회 매매가 그럴듯한 명목으로 행해지고 있다.

얼마 전부터 몇몇 대형교회는 시대에 뒤진 기업 경영원리를 배워 문어발식 확장을 시도해 왔다. 목회자의 유명세에 따른 교회 브랜드를 사용하여 다른 지역에 서너 개의 지교회를 세웠고 최근에는 수십 개의 교회를 세워 '신(新)사도행전'을 쓰려고 하는 교회도 있다. 경험하고 있는 중이지만 지교회에서는 독자적인 설교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관리자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교회 창립자의 카리스마를 각 지역으로 확산시키려는 통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청의 하부구조로 존재했던 교회에게 독자성을 되찾아 준 것이 종교개혁이었건만 오늘의 교회는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논리가 크게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에 왜 그렇게 많은 돈이 몰리는지도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지만- 암흑시대로 불리는 중세의 교회는(12-13세기) 고리대금업을 하는 상인계급들을 하느님의 것(시간)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보고 교회에 발들이지 못하게 했었다- 기존 지역 교회들의 존재 기반을 흔들 만한 물질적 투자를 동반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대형 할인점에 의해 소형 슈퍼마켓들이 폐점되는 경우와 비교될 상황이 교회에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교회는 그 자체로 완결된 독자적인 구원 공동체로서 하느님 나라의 지표여야 한다. 특정 목회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의 설교만이 전달되어야 하는 사적 공동체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친족 혹은 자신의 뜻에 부합한 사람에게 그 교회의 관리를 맡겨 거대한 족벌 경영체제를 만들려 한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표현하더라도 이런 형식 자체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로 이해할 수 없다. 우선 지역 교회 목회자들이 반발하고 있지 않은가?

특정 교회의 확장을 지향하는 지 교회가 지역 내 교회들과 화합하지 못함은 당연지사이며 또한 관리자로서만 만족할 수 없는 목회자의 자의식이 결국에는 교회 브랜드 창시자를 배반하는 꼴이 되어 상호간에 온갖 험담이 오고가는 사례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필자는 교회가 동종교배로 인해 열등한 기관이 될 것을 염려한다.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 운영이 지속되고 목회가 정형화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불고 싶은 대로 불기에 인간이 예상치 못하는 이질적 경험도 요구하는 하느님 영의 창조역사를 거역하는 교회는 자기 몸체를 불리다가 멸망한 공룡의 운명을 뒤따를 수 있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브랜드 창시자의 교회를 크게 하지 않고 다양한 지교회를 세우는 일이 왜 비난받을 일이냐고. 다시 강조하지만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표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21세기 시대 인식의 한계, 교회 존립 근거 및 이유에 대한 시각차 그리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편협성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더 이상 자본주의 방식으로 교회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이며 예수를 새롭게 다시 보고 우리 시대의 징표를 바르게 읽는 신학적 작업이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현실의 교회는 성경이 제시하는 본질적 교회상과는 너무도 멀리 떠나 있다. 하느님 권위를 등에 업고 위계질서를 만들어 내는 교회구조가 복음 자체를 위협한다. 교회가 제도로 전락해 버리고 거룩을 빌미로 권력이 남용된다.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사적인 친밀 공동체로 전락한 것도 교회의 일면이다.

교회중심주의 또한 신앙인의 삶을 교회 종속적으로 만들고 있다. 시민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을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본다. 질문이 허용되지 않으며, 생각하는 신앙,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믿음의 율법화 현상 또한 심각한 수준이다. 신앙인을 진정한 믿음의 세계로 안내하기보다는 교회를 숫자놀음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런 현상들은 특정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해 유지되는 대형교회에서 잘 드러난다. 바로 교회 세습이나 지교회에 대한 발상 등은 이런 교회들에 의해 발단이 된 것이다. 하느님의 권위가 목회자 개인의 카리스마와 혼동되고, 그로써 목회자 권위에 의존한 인간관계가 아들세대로까지 이어지게 되며 그 와중에서 목회자를 추종하는 가신그룹들이 생겨나 세습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하느님을 빌미로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소수의 종교가들에 의해 운영되는 사기관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이런 교회일수록 교회지상주의를 말하고 신앙인을 오로지 '처치맨'(church man)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람들을 끼리끼리의 친밀 집단으로 묶어 놓고 조직에 충성할 것을 학습시킨다. 이런 교회들은 대외적 자선사업을 하는 집단으로 비쳐지기 원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자기 과시적 업적을 많이 쌓는다. 하지만 교회의 구조 자체가 민주적이지 못하고 유무형의 부모 자산이 그대로 세습되는 전근대적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없다. 많은 일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결국 세상에 영향을 주지도 않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지도 않으려는 자기 독백적이며 폐쇄적인 구조 속에 교회가 갇혀 있기 때문이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개교회주의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중계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조기연 교수(서울신학대학교 예배학)


▲조기연 교수. ⓒ뉴스앤조이 신철민
*예배의 중심: 예수인가, 목사인가?

지성전 예배를 실시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지성전 제도는 하나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굳이 본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드는 게 현실이지만 본당에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어차피 이 사람들을 교육관 등 부속건물에 수용해야 하는데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해당 지역에 지성전을 세워, 멀리 떨어진 교회까지 오는 거리와 시간상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자는 필요에 따라 세워진 것이 지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성전 제도는 소위 '설교 듣는 것이 곧 예배'라고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풍토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하나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설교를 듣는 것이 본 교회 출석의 목적이라면 굳이 본 교회까지 갈 필요가 없이 지성전에서 '중계방송'(그것이 생방송이든 녹화방송이든)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설교를 듣는 것이 곧 예배'라는 사고로는 '설교를 잘하는' 목사가 훌륭한 목사이며, '잘하는 설교'를 들을 때 회중은 '은혜를 받는다'고 느낀다. 따라서 소위 설교를 잘하는 목사의 교회에 사람들이 몰리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더구나 현대에는 방송이나 컴퓨터 등을 통해 특정 목사의 설교가 전국 방방곡곡에 실시간으로 전파되기 때문에 '능력 있는 설교자'는 세계 어디에서라도 단박에 유명해진다.

그러니 '설교 잘하는 목사'의 교회와 '설교 못하는 목사'의 교회 사이에 초래되는 회중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된다. 그러니까 '설교 잘하는 000목사' 혹은 '능력 있는 000목사'만을 찾아다니는 신자들이 늘어나게 되고, 급기야 다른 교회에서 예배드리느니 차라리 화상(畵像)일지언정 그 목사가 인도하는 지성전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현대 한국교회에서 지성전 제도가 날로 확산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들이 '설교 잘하는 목사'만을 찾기 때문에, 소위 대형교회에서 그 목사를 하나의 '기호' 혹은 '상표'(brand)로 삼아 곳곳에 지성전을 세움으로써 소위 '교회의 성장'을 꾀하는 것이다.

또한 지성전 제도는 '목사의 성직'에 있어서 차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본당의 담임목사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탁월한 '설교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 인식되는 반면, 지성전의 목사는 그보다 훨씬 '능력이 떨어지는' 목사로 인식된다. 따라서 신자들은 지성전의 목사가 수행하는 목회적 직무에 대해 신뢰를 덜 하게 된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목사를 설교 수행능력에 따라 '능력 있는 목사'와 '능력이 떨어지는 목사'로 인식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지성전의 예배는 '목사 중심'의 예배이다. 담임목사에 의존하는 은혜, 담임목사에 의존하는 성장, 담임목사 중심의 일치, 이 모든 것들은 신자들의 머리와 가슴을 담임목사로 가득 채우도록 만들 뿐이다.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에 의존하는 은혜, 그리스도에 의한 성장,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일치를 회복하여야 한다.

'화면 속의 인물'이 예배를 집례하는 것은 예배학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우선 설교자와 지성전의 성도들 사이에 인격적 접촉과 교감이 일어날 수가 없다. 본당 목사가 예배를 집례하고 설교를 할 때 그가 바라보는 회중은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뿐이다. 그는 지성전에 모인 회중들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예배의 주체와 행위: 일방적 전달인가, 공동체적 참여인가?

지성전 예배가 지닌 또 다른 한계점은 바로 예배의 '일방성' 내지 '공동체성의 부재'에 있다. 지성전 예배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행위의 '일방 통행성'이다. 지성전 예배에는 오로지 정보와 행위의 일방전달만이 존재한다. 인도자와 회중의 쌍방통행이 불가능한 것이다. 스크린 속에 있는 예배인도자와 설교자는 지성전의 회중들을 볼 수 없다.

또 하나, 혹자는 "지성전 예배에서 '감동'도 받고 '은혜'도 받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필자도 여기에 동의한다. 지성전 예배에도 찬송이 있고, 감사와 봉헌도 있으며, 말씀을 깨닫는 은혜도 있다. 성령님도 분명 역사하시리라 믿는다. 그러나, '감동' 받고 '은혜'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감동'은 음악회에도 있으며, 영화에도 많이 있다. 어려움을 극복한 신앙인의 간증이나 심지어 훌륭한 연사의 웅변에도 눈물을 쏟을 정도로 감동을 받기도 한다. 그러니 감동과 은혜가 있다고 해서 다 예배는 아닌 것이다.

*예배의 수단: 기술 의존적 예배인가, 몸으로 드리는 전인격적 예배인가?

지성전 예배는 기본적으로 인공위성으로 영상을 송수신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예배이다. 다시 말해서 '멀티미디어를 매개로 한 중계예배'가 그 본질이다. 여기에서 야기되는 가장 치명적인 위험성은 바로 예배의 '기술 의존성'이다. 예배가 전기와 전자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때는 정전이나, 시스템 고장, 일기불순, 기기 조작 미숙 등에 의해 시스템이 일시 정지되거나 화면 불량 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예배는 중단되고 회중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멀티미디어를 이용하는 예배에도 공히 적용되는 사항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볼 때 지성전 예배는 진정한 의미의 예배라고 보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엄밀히 말해서 본당에 있는 회중들은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만, 지성전에 모인 회중들은 예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만 참여할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들이 하는 일의 본질은 본당의 예배를 화면으로 보면서 '개인적 경건'을 증진시키거나, 또는 화면을 함께 보면서 갖는 '신앙집회'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