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 대한 사진

요즘 한국 교계에서는 교단의 지도자인 총회장을 선출하는데 제비뽑기 방식을 적용하자는 논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장로교단에서는 작년 총회에서 처음으로 '제비뽑기' 방식으로 총회장을 선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찬반의 논란이 많았습니다.

제비뽑기를 지지하는 분들의 견해는, 모든 역사의 주권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니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을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하긴 구약시대에 이 '제비뽑기' 방식이 사용되었습니다.

'제비뽑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랄'(gowral)의 본래 문자적 의미는 '제비뽑기'를 위해 사용된 조약돌 혹은 작은 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비를 뽑다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제비가 '나오다', '떨어지다'라는 동사와 함께 쓰여진 것을 보면, 추첨을 하는 표식인 돌이나, 주사위가 어떤 통 안에 들어 있지 않았는가 추측됩니다.

그러나 '이 방식을 사용하는 때가 언제였는가'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이 방식은 의혹이나 다툼이 있을 경우, 또 몇몇 사람이 나누어 가질 몫이 있을 때 '제비뽑기'로 결정했던 관습인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 교계에서도 '제비뽑기'로 총회장을 선출해야 하는 배경에 이러한 모습이 숨어 있습니다. 그동안 총회장을 비롯한 총회 임원 선거에서 금전수수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때론 법정 다툼까지 벌어지는 등 금권타락선거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행운'이라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현대는 물질사회입니다. 그러므로 행운 금액이 큰 복권에 당첨된 것이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렇게 행운을 거머쥔 것이 복받은 것인가, 재수 좋은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즈음에는 재수 좋다는 말과 복받았다는 말을 혼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종교나 복과 재수라는 말이 항상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할 것 없이 그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을 때 기복적인 것과 탄탄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회 속에서 점쟁이가 나타납니다. 서양 기독교 국가의 점쟁이 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걸려 있으며, 불교가 발전한 우리 나라에서는 점쟁이 집에 꼭 불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점쟁이의 손에서는 복이 되고 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교회에 다니는가" 하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복받기 위해 나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한다는 것을 좀 유식하게 설명해도 그 속에 있는 깊은 심정은 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도대체 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로 같이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제비를 뽑았더니 마티아가 뽑혀서 열 한 사도와 같이 사도직을 맡게 되었다"(사도행전 1:25)라는 말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부활 후에 배신한 유다를 대신할 열 두 번째 사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요셉'과 '마티아' 두 후보 중에서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마티아'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12제자 명단에 들어가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해 마티아가 뽑혀 복을 받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인 제1편 말씀을 보면 복있는 사람의 모습이 정확하게 정의되고 있습니다."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야훼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으며, 그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니, 모든 일들이 다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시편 자는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한다"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자리와 함께 멀리에 희망의 배 한 척.

여기서 생각해 볼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악인의 길'은 또한 '죄인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이 죄인의 '자리'(yasab)라는 말은 '잘못된 장소'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잘못된 장소로 '스올'(sheowl)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스올'이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종종 '지옥'이라고 번역됩니다. 또한, 요나서에서는 이 '스올'이 '요나'를 삼켜버린 큰 물고기(고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지옥이라는 곳은 요나가 갇혀 있었던 어두컴컴하고, 끈적거리며, 질퍽거리는 고래 뱃속과 같다는 말도 됩니다.

이 장면에서 '피노키오'라는 서양의 재미있는 동화가 떠오릅니다. 가족이 있기를 바라는 선한 한 목공, '제페트'가 지극정성으로 만든 나무인형이 요정의 도움으로 생명을 갖게 되어서 그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길어졌습니다.

이런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까? 살아가면서 죄와 잘못이라는 것에 쌓여 우리의 모습이 못나게 변합니다. 그리고는 피노키오와 같이 물고기의 뱃속에 갇히는 모습이 됩니다. 바로 그러한 곳이 '스올'이라고 구약성경은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스올'을 오늘 시편 말씀에서 다른 말로는 '악인의 회중'이라고 공동체적 의미로도 또한 사용됩니다. 우리 말로는 '악인의 길'이라고 했지만, '길'보다는 '회중'이라는 의미가 더 가깝습니다.

요즘말로는 '지옥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의인의 길'이라는 것은 '천당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인과 악인은 한 개인이라기 보다는 '무리'입니다. 사회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물든다는 것입니다. 사회에 편중되어 살다보니 어느새 강남에 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 뜻도 이것입니다.

이 사회적 의미로 복을 해석하면 오늘의 의문점인 '도대체 복이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풀리게 됩니다.

다시 사도행전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마티아'를 열 두 번째로 선택한 사도공동체는 '성령의 체험' 사건이라는 오순절 사건을 체험합니다. 사도행전 2장 1절 이하에 보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라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에 의해 서로 한(一, 大, 全)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로 대표된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다고 전해 줍니다. '지옥사회'에서 '천당사회'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당사회로 나온 사람들의 성격이 사도행전 2장 44절 이하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즉 신도들이 공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라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 '마티아'가 '제비뽑기'에 의해 결정된 사실의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제비뽑기'로 12사도 명단에 들어가는 복받는 사람을 결정해도 아무 문제 거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의인의 사회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천당사회'가 된 것입니다. 가진 소유물을 포기할 정도로 남을 생각하는 '공동사회'를 건설한 것이 바로 천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받는 사람의 전제조건입니다.

1947년 이스라엘땅 남쪽, '쿰란'(Qumran)지방에서 사해문서(Dead Sea Scrolls)가 발견되었습니다. 신약신학자인 베얼즐리(W.A. Beardslee, 에모리대학교 은퇴/명예교수)는 사해문서에서 "'제비뽑기'라는 '고랄'은 문자적인 의미로서 '제비뽑기' 행위의 뜻으로 사용되었다기 보다는 은유적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사해문서에서의 '고랄'은 여러 가지 상징적 혹은 은유적인 뜻을 갖고 있는데, 그 주요한 것들은 ①인간의 운명, ②종말론적 보상과 보응(징계)으로서의 몫, ③하나님의 결정을 반영하는 공동체의 결정, ④빈도나 횟수(times), 혹은 때(time)의 의미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쿰란(Qumran)문서에서 이 '제비뽑기'라는 '고랄'이라는 단어는 또한 '집단', '떼', '당파'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빛의 자녀들, 의의 자식들이 되길 바라는 쿰란공동체 사람들의 종말론적 소망이 이 '고랄'이라는 단어에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소망 안의 사회성을 지닌 당파적 카이로스 공동체).

잠언에서 솔로몬 왕이 후손에게 주는 지혜의 말씀을 보면,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없는 자를 까닭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음부같이 그들을 산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잠언 1:11-16).

여기서도 악인의 회중, 음부, 즉 '스올'로 내려가는 것 역시 제비뽑는 '통'에 묻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박승환 목사.
이제 복이라는 것의 실체가 보입니다. 복의 근원은 공동체성, 사회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홀로 쟁취하는 재수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 주일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삽니다…"(cf. 캐나다연합교회 신앙고백서, New Creed 참조)라는 고백이 현실화되고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133편 1절)이라고 고백했던 시편 기자의 가슴 깊은 말이 비로소 나의 것,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복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박승환 목사 / 토론토한인연합교회(www.mek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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