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얼마나 소중한 이름인가?

“친구 따라 강남 간다”
“벗은 옛 벗이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
“친구를 일년이 걸려도 얻기가 힘들지만 친구를 잃기에는 한 시간도 안 걸린다”
“有朋目遠方來 不亦樂呼-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으면 이보다 즐거움이 없도다”

친구에 대한 생각을 할 때 생각나는 많은 글들이 있습니다. 특히 ‘천리 길 떠나는 날 처자를 맡기고 갈 수 있는 한 사람 친구가 있느냐’고 물으며 시작하는 함석헌의 글은 마음을 뭉클하게 하면서 좋은 친구의 필요성에 절감하게 합니다.

바울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의 서신들에는 많은 친구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의 처음 친구들은 율법적 엘리트 의식을 가졌던 유대주의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친구들도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유대적 전통을 위하여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절대화하였으며 여기에 반하는 어떤 생각이나 논리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배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그의 처음 친구들은 유대의 전통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을 일삼는 ‘예수당’을 적으로 간주하여 그 일당을 타도하기 위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바울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회심을 통하여 옛친구들과 결렬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이 뜻했던 바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라 바울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친구들도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절교에 그의 처음 친구들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의 처음 친구들은 바울에게 마지막까지 친구의 입장에 서 있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변심한 바울을 향하여 이를 갈며 옛친구를 죽이는 일에 마음을 모으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념과 우정에 대한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친구의 배신에 이를 갈며 분노에 치를 떨었을 뿐 무엇이 친구를 변하게 했는지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념과 우정, 사랑과 이데올로기,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물론 쉽게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과 그의 처음 친구들 사이에 다른 점이 있었다면 친구들은 바울을 배반자로 부르며 적대시하고 척결하려 노력하였지만 바울은 자신의 옛친구들에게 새로운 세계에로의 초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친구를 만드는 일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같은 가치에 공감하고, 오랫동안의 노력과 정성, 서로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 관계란 일방적이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나는 좋은 친구를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처음 친구를 끝까지 잃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친구라고 부르는 당신을 끝까지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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