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들 정진이가 아빠에게 숙제를 가져왔다. '숙제', 겨우 그 힘든 멍에를 빠져나온 것이 불과 얼마 전인데, 이젠 아이가 나에게 숙제를 맡긴다. 정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가훈을 정해서 다음주까지 가져오라는 것이다.

"엄마한테 물어봐!" 나는 그렇게 귀찮은 목소리로 말해버렸다. "독수리 오형제가 고만한 귀찮은 일에까지 간섭을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훌륭한 처신에 만족을 느끼며 신문을 펼쳤다.

조금 후, 어디선가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가 날아왔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가훈을 정해오라는 것인데 가장이 해야지 그걸 나한테 떠맡기면 어떡해요!" 듣고 보니 그럴듯한 소리다. 내가 아무리 집안일에 무심한 남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은 가장이다.

가장 노릇을 못해도 가장이라고 치켜 주는 아내도 고맙지만,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우리 큰아들도 안됐다. “정진아 걱정 마. 내가 꼭 만들어 줄게.” 나는 손가락 도장까지 찍으며 굳게 약속을 했다.

웬걸. 그리곤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아니 몇 번 생각은 해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듯한 가훈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흔히 쓰는 말들은 어쩐지 유치해보여서 차마 그런 것을 내 가훈으로 삼을 수가 없었다. 참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곤란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차일피일 미루다 잊어버렸다.

다음주가 되자 아내가 뜻밖의 부탁을 한다. 토요일에 '아빠' 참관수업이 있으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요일에 내가 오후 늦게까지 일하는걸 알면서...”라고 피해갈려는데 이번엔 쉽게 안 된다.

“마침 퇴근시간 후인 5시부터 시작이예요. 아이 실망시키지 않을 거죠?” 우와, 꼼짝없이 걸렸다고 생각하며, 혹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약속이 없을까 하고 머리를 굴리는데, 또 한 마디. “이번 참관수업에서 아빠가 직접 붓글씨로 가훈을 쓴데요”라는 게 아닌가.

시간은 비정하게 꼬박꼬박 흘러가고 어느 듯 토요일이 되었다. 즐겁고 기다려지던 토요일이 그날은 왜 그리 슬프고 비참하던지... 다 내 성격 탓이었다.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무지 소심하고, 낯을 가리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 아빠 참관수업이란 나에겐 거의 고문이었다.

그래도 아이의 일인데, 나도 한 아이의 아빠가 아니었던가. 엄청난 용기를 내어 유치원에 갔다. 아이의 유치원 부근을 지난 적은 많지만 안에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이었다. 풍선을 붙이고 삐에로 아저씨가 재주를 부리고, 아이들은 물이 든 풍선던지기를 하는데 완전 축제 분위기다.

흘러나오는 흥겨운 노래를 들으며 나는 한없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오늘 하루 어떤 봉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입구에서 낯선 여자가 묻는다. “누구 아빠세요?” 그 말이 채 끝나기가 전에 정진이가 나를 발견하곤 “아빠-”하고 달려온다. “아, 정진이 아빠시군요.”

일부러 조금 늦게 가려고 시간을 맞추었는데, 다른 아빠들도 만만치가 않다. 나보다 먼저 온 아빠는 몇 안 된다. ‘역시 나는 마음이 약해서 안돼.’ 자책을 한다. 선생님과 아빠가 없는 아이들과, 몇 사람의 아빠들이 멀뚱멀뚱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

한 두 사람씩 아빠가 올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엔 희색이 돈다. 끝까지 아빠가 오지 않는 아이들은 울상이 되었다. 한 아이는 직장 일로 올 수 없는 아빠 대신 엄마가 왔다. 그렇게 대충 자리가 차자 본격적인 고문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이들과 과학실험하기. 이런 건 일도 아니다. 내가 이래도 소시적에 로케트 만들다 집을 불태워 먹을 뻔한 사람이 아닌가. 아이와 풍선 만들어 터트리기. 돈 천 원으로 아이가 사고 싶은 중고 물품사기. 아이와 사진찍기. 생각보다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런 거라면...’ 정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기 시작했다.

그 다음 순서가 바로 ‘가훈쓰기’였다. “으악-” 나는 그때까지도 가훈을 정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정진이와 동생 길진이의 이름은 뼈대 있는 집안의 예의라면서 아버님께 떠맡겨서 지었다. 자영업을 하는 내 직장의 이름은 아내가 생각해 내었다. 그런데 가훈만은 내가 지어야 하는 거란다.

붓에 먹을 묻혔다. 종이를 펴고 자리를 잡는다. 정진이가 옆에 바짝 다가와 앉는다. “아빠, 뭐라고 적을 거야?” 정진이 얼굴이 호기심에 젖어있는 게 보인다. “기다려봐...” 그리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종이에 한글로 슥슥 저었다. 정진이가 따라 읽는다. “정-. 진-. ”

“아빠, 이거 내 이름 아냐?” 하고 묻는다. “선생님이 가훈을 적으랬는데...” 하는 아이에게 나는 대답한다. “이게 우리 집 가훈이야. 정진아 네 이름이 얼마나 좋은 줄 아니. 바를 정에 나아갈 진, 그 말은 바르게 산다는 거야. 그러니 우리집 가훈은 ‘바르게 살아가기’다. 알겠어?”

그날 저녁 그 가훈을 들고 집에 왔다. 정진이가 문을 열자마자 아내에게 소리친다. “엄마, 우리 집 가훈은 내 이름이야!” 아내가 종이를 보고선 반쯤 웃고, 반쯤 째려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님께서 이름 하난 잘 지으셨다니까. ‘바르게살기’가 앞으로 우리 집 가훈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더 좋은 가훈 있으면 어디 한번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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