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색깔, 공기 / 김동건 / 대한기독
교서회 / 224페이지 / 7,800원
누구에게나 죽음은 피하고 싶은,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주제다. 부활과 영생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죽음이 있기에 부활도 가능하고 이후의 영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죽음의 문제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 이후 펼쳐지는 천국에 대해서는 그토록 열광하면서도, 이를 위해 누구나 거쳐야하는 죽음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세 차례 정도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할 기회가 있었다. 중국에 있던 2000년 가을 처음으로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 고민은 아주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출발했다. 중국의 한 농장에서 가을걷이를 거들다가 고랑 사이에 누워 잠시 혼곤한 낮잠에 빠진 순간, 마치 땅 속으로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경험을 했다. 그 찰나에 "죽음이 이런 것인가?"하는 짧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전해 결국 유서 비슷한 글을 쓰게 되었다. 물론 자살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불의에 죽을 경우를 대비해 미리 유서를 쓴 것이다.

친할머니의 죽음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막연한 관념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할머니는 마치 이청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날이 갈수록 자그맣게 변하시더니 결국은 숨을 거두셨다. 90세를 넘기시고도 한참을 더 사셨으니 호상(好喪)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이 아프도록 시렸다. 할머니는 마지막 며칠 동안 식구들 모두 한동안 잊고 있었던 큰아버지(6·25 때 실종되셨다고 한다)와 할머니의 '어무이'를 연달아 부르셨다.

신혼여행으로 간 티벳에서는 그저 삶의 일부인 자연스러운 죽음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동안 말로만 듣던 조장(鳥葬)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조장을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시체를 그냥 독수리가 많은 곳에 두는 줄로만 알았다. 막상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 일을 전담하는 사제들은 죽은 사람의 몸을 독수리가 먹기 좋게 칼로 발라내었다. 그 광경에 함께 구경 간 한국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 옆에 있던 티벳 아이들은 이런 우리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죽음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늘 삶 가까이 있는 일상이었다.

죽음, 생각해 보셨습니까?

김동건의 「빛, 색깔, 공기」는 한동안 잊고 있던 주제 '죽음'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질문을 던지며 다가온 책이다. 암으로 죽어가는 노신학자와 아들 신학자 사이의 대화를 책으로 옮겼다는 광고 문안을 예전에 본 일이 있기 때문에, 내용이 신학적이고 딱딱할 것이라는 예상을 가지고 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고(故) 김치영 목사와 아들 김동건 교수 사이의 대화는 진지했고 깊었다. 그러나 어렵지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 주책맞게도 나는 전철에서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쳐야 했다.

암 선고를 받고 투병을 하면서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따듯한 배려를 잃지 않는 모습, 자신의 장례예배에 쓰일 설교를 혼신의 힘을 다해 작성하는 모습은 죽음과 삶에 임하는 태도에 대한 어떤 신학적 이론보다 더 많은 생각을 던졌다.

아버지가 평생을 모은 책들을 죽음을 앞두고 기증하는 모습을 보면서 두 아들이 자신들의 책도 기꺼이 후학에 기증하는 모습은 "누구나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그라들어가는 생명에 미련을 두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빛과 색깔, 늘 곁에 있어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공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진지함 역시 고개가 절로 숙여지게 만든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새로 시작된 고민은 이 감동을 누구와 나눌 것인가의 문제였다. 거저 얻은 책이니 꼭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암으로 투병중인 장로님이 생각났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 선물했다간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불치병을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했다'는 식의 책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 암에 걸려 죽어간 목사님 이야기가 장로님과 왠지 안 어울릴 것 같았다. 다행히 며칠 전에 이 책에 딱 어울릴만한 주인을 만났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인데, 죽음의 문제에 대해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있다고 말하신다. 이 책이 좋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뻔한 이야기지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대부분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진 않지만, 그와 관계없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나님이 주신 삶, 어떻게 성실히 사느냐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과연 어떻게 잘 죽는가'이다. 죽음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준비할수록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 죽음을 잘 맞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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