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이 직접 만든 평화기원등.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어른들에게 존재하는 편견과 오해가 그곳에는 없었다. 서로 한번도 만나지 않았던 낯선 사람들이 모여 꾸린 캠프. 첫날의 어색함은 금세 사라졌다. 함께 뛰놀고 장난치는 아이들 사이에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분단의 장벽'은 발견할 수 없었다.

통일교육협의회 청소년분과가 주관한 '2003 겨레사랑 평화사랑 청소년 민족화해 통일캠프'가 열리는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 천안의 온순한 산세 아래 조용히 자리잡고 있던 수련원 주변이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즐거운 소음으로 왁자하다. 통일캠프는 남한에 와 있는 북한이탈 청소년들과 남한 청소년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이해하고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준비된 행사. 이번 캠프에는 30여 명의 북한이탈 청소년과 70여 명의 남한 청소년들이 참가했다.

7월 21일부터 총 4일에 걸쳐 진행된 이번 캠프의 가장 큰 특징은 남북 청소년들이 서로 직접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소그룹 모임을 대폭 강화했다는 점.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은 조모임 성격이 강한 '두레' 모임과 각자 원하는 특별활동을 같이 하는 '분반활동'을 통해 서로를 알아갔다. 분반은 △스테인드글라스 만들기 △흙장승 만들기 △심리극 △난타 공연 △힙합 댄스 △미디어반으로 나뉘었다. 15명 내외로 구성된 두레 모임 역시 남북 아이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자신이 만든 등을 들고 야외무대로 향하는 참가자들.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비록 4일이라는 길지 않은 일정이지만 남북 아이들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북한말의 거센 억양도 이제는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남한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던 북한이탈 청소년들도 좋은 친구와 동생들을 많이 얻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소득은 서로에 대한 막연한 오해와 편견이 사라졌다는 것. 역삼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조현수 군은 "언어와 행동이 좀 다르지만 같이 지내는 것이 재미있다"고 캠프 참가 소감을 밝혔다. 한 북한이탈 청소년(19)은 "처음에는 별로였는데 같이 놀고 지내니 좋다"면서 "평소에 남한 친구들을 별로 사귀지 않았는데 여기서 좋은 동생이 생겨서 기쁘다"고 말했다.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이러한 소득이 아이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자원봉사자로 캠프에 참여한 이성구 씨(26·대학생)는 "캠프를 통해 북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난타 공연을 지도하기 위해 캠프에 참여한 김병호 씨(30·난타 배우)는 "아이들의 생활 환경은 서로 달라도 동심의 세계는 똑같다"라며 "이대로 바로 통일이 되면 혼란이 심할 것이다. 문화적, 사회적으로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통합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만나서 같이 지내니 편견이 사라진다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흙장승.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캠프 셋째 날인 7월 23일,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을 찾아갔다. 아이들은 이날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저녁에 열릴 발표회 자리에서 마음껏 뽐내기 위해 마지막 연습이 한창이었다. 저녁을 먹은 아이들은 길놀이를 하기 위해 각 두레에서 만든 '평화등불'을 들고 운동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운동장 한켠에는 아이들이 직접 만든 흙장승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화등불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소박한 문구들이 적혀있었다. 마음속에 묻어둔 기원을 자신만의 말로 적어낸 구호는 어른들의 정치적인 구호보다 훨씬 더 힘 있고 강하게 다가왔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는 마음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손수 적은 문구. '조국통일'이라는 글귀가 이채롭다.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통일"
"우리는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서로를 안았습니다"
"마음을 열면 평화가 보입니다"
"통일은 우리가 이룬다"
"태극기나 인공기 대신 단일기를 쓰는 그날"
"저도 불쌍하지만 더 불쌍한 사람들 힘내세요"
"이라크 국민 여러분 힘내세요"


▲강강수월래를 하는 아이들.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은 함께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 놀이를 시작했다. 곳곳에서 북한이탈 청소년에게 풀피리를 만들고 부는 방법을 배우는 남한 아이들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붙잡은 손 굳게 잡고 절대로 놓지 말라"는 사회자의 말이 강한 여운을 남긴다.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 소리가 점점 커져 가는 가운데, 주변이 어둑해지기 시작한다. 흙장승 주변에 아이들이 모였다.

▲새끼줄에 소원을 담은 종이를 꽂는 참가자들.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자신의 소원을 적은 종이를 들고 나온 아이들은 그 종이를 장승 뒤에 있는 새끼줄에 걸었다. 각 두레 대표들이 나와 두레원들과 함께 적은 소원을 낭독하는 시간도 가졌다. 아이들의 소원은 저마다 가지가지다. 어떤 소원에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웃음을 짓기도 하고 또 어떤 소원에는 한동안 무거운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차별하지 않게 해 주소서"
"모두 행복하게 살게 해 주소서"
"독일 월드컵 우승하게 해 주소서"
"주 5일제 수업 이루어지게 해 주소서"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북한에 있는 할머니를 만나게 해 주소서"


▲기원문을 태워 하늘로 날려보내는 모습.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각 두레의 소원을 적은 기원문을 태우는 것을 마지막으로 아이들은 자신이 만든 등을 들고 야외공연장으로 향했다.

"북한에 있는 할머니가 보고 싶어요"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낸 야외무대. 주변에 평화기원등이 곱게 빛나고 있다.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시간은 어느덧 9시가 되어간다. 풀벌레 소리가 조용히 울리는 야외공연장 주변에 걸린 평화등불이 고운 빛깔을 자랑한다. 율동을 하며 노래 '반갑습니다'를 같이 부른 아이들은 본격적인 행사 발표에 기대가 가득한 얼굴이다. 첫 무대를 장식한 것은 미디어반의 영상 작품. 지난 3일간의 캠프를 촬영한 작품이다. 영상을 보던 아이들은 친구들의 모습이 대형스크린에 나타나자 환호를 지르며 즐거워한다.

▲난타 공연을 하며 신나게 북을 치는 모습.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두 번째 공연은 난타. 북 하나를 각자 앞에 두고 무대에 올랐다. 지도 교사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서서 공연 시작을 알렸다. 씩씩한 북소리가 조용한 밤하늘을 뒤덮는다. 신나게 북을 치는 아이들의 얼굴에 즐거운 웃음이 가득 번진다. 잦아들었다가 어느새 커지고 느렸다가 빨라지는 북소리에 북을 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흠뻑 빠져들었다. 이어서 '조선의 보아'라고 소개 받은 북한이탈 청소년 한 명이 무대에 올랐다. 엄청난 환호에 화답하듯, 정말 보아를 능가하는 현란한 춤 솜씨가 이어진다. 이 친구의 꿈은 탈북자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주연배우를 맡는 것.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할 자신 있다"고 당차게 포부를 밝힌다.

▲조선의 '보아'.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뒤에 걸린 그림이 아이들이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다.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흙장승, 스테인드글라스 분반이 뒤 이어 무대에 올랐다. 힘을 합쳐 작품을 만들면서 느꼈던 소감을 발표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진지하다. 뜻을 하나로 모아 가는 과정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 과정을 통해 더 좋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스태인드글라스 작품에는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한다 △어떤 어려움도 같이 극복한다 △서로가 평등하다는 세 가지 의미가 숨어있다. 아이들을 지도한 박현우 교사(31·현직 미술교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의 힘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는 것이 큰 자랑"이라고 회상했다. 두 분반의 발표가 끝나고 연극분반의 공연이 이어졌다.

▲연극분반의 공연. ⓒ뉴스앤조이 양정지건

그 곳엔 남북이 따로 없었다

독일 통일 이후 동독 주민들과 서독 사람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겼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동독 사람들은 통일이 된 후에도 서독 사람들에게 '이등 국민' 대접을 받아야 했다. 서로를 베시스(Wessis) 혹은 오시스(Ossis)라고 비하하여 부르는 모습만 봐도 통일 이후 그들이 겪는 갈등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통일 이후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를 막기 위해 통일 이전에 서로가 자주 만나 차이를 줄이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쉽게 서로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그러한 희망이 몽상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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