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멜렉
사사 기드온이 첩에게서 난 아들 아비멜렉은 외가와 세겜 사람을 충동하여 그들의 지원을 받아 배다른 형제 70명을 죽이고 3년 동안 왕 노릇 하다가, 세겜 사람들이 배반하자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벌이다가 그 와중에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죽습니다.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이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해준 기드온의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우상을 섬겨 하나님을 배반하는 백성들의 죄악상을 고발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악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인물입니다.

아비멜렉의 손에서 도망친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은 그리심 산에서 비유로 나무 이야기를 하는데, 이 비유는 기드온과 그 아들들의 삶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그 이름 때문에 기드온의 생애를 평가하고 또 그 시대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그 해석과 평가의 타당성 여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큰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 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2장, 75절이나 할애하여 기록한 인물을 통하여 아무 교훈도 받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요, 책망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1. 세겜의 왕 아비멜렉
(1) 이름의 내력(삿8:28-32)

아비멜렉은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으로 기드온의 첩이 낳은 아들입니다. 기드온이 지어준 이름이라고도 하지만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만, 혹 기드온이 자신을 왕이라 주장하고 싶었다면 70명이나 되는 아들 중에 이름을 지어주지, 하필 첩의 자식에게 그런 이름을 주겠습니까.

또 막내아들 요담은 ‘여호와는 완전하시다’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백성들이 왕이 되어달라고 할 때에는 ‘여호와께서 너희의 왕’이라면서 사양해 놓고, 마음이 바뀌어 슬그머니 ‘내가 왕이다’라고 하다가 다시 ‘여호와는 완전하시다’라고 하였다면 기드온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또 막내아들 요담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금방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삿9:7이하) 아비멜렉이란 이름은 왕 되기를 사양한 기드온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첩이 욕심으로 지은 것으로 보아야 하며 여러 정황과 문맥으로도 맞습니다.

특히 기드온이 죽은 후부터 한결같이 여룹바알로 부르는 이유도 우상을 깨뜨리고 여호와의 단을 쌓은 사람임을 강조하여 다른 오해가 없게 하려는 의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까짓 이름을 가지고 왜 그렇게 과민하냐고 하겠지만 이 이름의 뜻이 기드온의 일생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드온이 지어준 이름이라면 기드온의 생애 전부를 뒤집어야 하고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해석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지은 이름이라면, 하나님께서 그토록 공들여 길러낸 기드온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허무한 결론을 낼 수밖에 없으며, 이후의 아비멜렉 사건도 기드온의 잘못으로 인한 인과응보(因果應報)로 해석하여야 하고, 그렇게 되면 요담의 이야기나 하나님의 평가도 해석할 길이 없게 됩니다.

이 아비멜렉 사건을 푸는 열쇠(keyword)는 하나님 말씀이거나 성경의 평가이어야 하는데, ‘사면 대적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지신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하며, 또 여룹바알 즉 기드온이 베푼 은혜대로 그 집을 후대하지도 않았다.

즉 하나님께나 기드온에게 배은망덕한 백성들의 행태를 고발하는 내용을 근거로 풀어야 할 것입니다.(삿8:34-35) 그런데 기드온의 자세를 자꾸 문제 삼다보면 여기서 얻어낼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배반당하신 자신의 아픔을, 배반당하는 기드온을 통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왕이 되는 아비멜렉(삿9:1-6)
아버지 기드온이 백성의 말대로 왕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버리지 못한 아비멜렉은 세겜에 있는 자기 외가 쪽에 청을 넣습니다. 세겜 사람들에게 ‘기드온의 70명 아들이 왕이 되는 것과 나 한 사람이 왕이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으냐. 또 나는 너희의 친족임을 생각하라’는 말을 전해 달랍니다.

아비멜렉의 외가 식구들이 총동원하여 세겜 사람들을 설득하고, 외가 식구들의 말을 들은 세겜 사람들 마음이 아비멜렉에게 기울어서 ‘그는 우리의 형제’라며 바알브릿이라는 우상의 묘(廟 사당)에서 거사자금을 마련해줍니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불량배들을 사서 아버지 집으로 가서 자기 형제들 70명을 죽이고, 세겜 사람들은 그 아비멜렉을 우상을 섬기는 장소인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왕을 삼습니다.

아비멜렉이 ‘70명과 한 사람 중 어느 쪽이 좋으냐’고 묻지만, 아베멜렉이나 왕이 되려는 흑심을 품고 있지, 70명은 왕이 되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아비멜렉의 탐욕과, 말도 안 되는 말장난에 놀아나는 세겜 사람의 어리석음이 어우러져 비열한 배반과 살인을 빚어냅니다.

요즘 나오는 책 중에 비슷한 논리를 볼 수 있습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병들어 골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부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난뱅이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그럴듯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질문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도 환난도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눈에 좋아 보인다고 좋은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극한 가난 중에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던 마게도냐 교회를 자랑스러워하는 바울과(고후8:2), 두 렙돈의 연보로 많은 부자를 부끄럽게 하였던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식의 공교한 질문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위험한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45:7)

기드온의 70명 아들들이 왕이 되겠다고 한 일이 없는데, 그들이 왕이 되는 것과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비교할 수가 있습니까? 이와 같이 건강과 질병, 부자와 가난 중 택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데도 그런 질문으로 답을 유도하는 것은 교활한 술수입니다.

잘못된 질문을 하는 사람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유도질문을 하는 것인데, 여기에 놀아나는 사람은 자기의 어리석음 때문에 속거나 비슷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맞장구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 했는데 골육지친은 아버지 쪽이지 외가 쪽이 아닙니다.(성경적 관점으로) 아비멜렉에게 골육지친은 기드온의 아들 70명이지 외가인 세겜이 아닙니다. 더구나 세겜에 사는 외가식구는 피가 섞였겠지만 세겜 사람들이 무슨 골육지친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우리 형제랍니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0-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아비멜렉의 말대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세겜 사람들이 이 허술한 말에 넘어간 이유는 바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악한 생각이 나오는 것이고, 또 악한 생각에 동의하고 한 통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본래 악하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4-35)

아베멜렉의 외가 식구들이 동원된 것은 인척이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70명 아들보다 가깝기 때문입니다. 인척이 왕이 되면 왜 안 좋겠습니까? 그런 것처럼 세겜 사람들에게도 이해가 맞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비멜렉이 동향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편안할 것 같아 아비멜렉의 손을 들어줍니다. 선거 때마다 동향 사람을 찍어주는 풍토에 교회도 놀아나는 경향이 있는데 두려움으로 경계하여야 할 일입니다.

기드온의 아들 70명은 이 일에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아비멜렉이 자기가 왕이 되고 싶으니까 해본 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생깁니다. 기드온의 70명 아들들은 우선 타 지역 사람들이고 녹녹치가 않아 보이고 가까이 지내기가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자신들은 바알브릿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의 말이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쪽이 편안하고 이득도 있을 것 같으니 마음을 정하고 밀어주자는 겁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정의나 은혜 같은 것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당장 눈앞에 이득이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아비멜렉을 선택하고 우상의 묘(廟 사당)에서 거사 자금을 마련해 주면서 한 통속이 되는 것입니다.

(3) 은혜를 원수로
성경은 기드온이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후부터 여룹바알로 부르기 시작하여 그가 죽은 후부터는 기드온이라 하지 않고 한결같이 여룹바알이라고 부릅니다. 기드온이 부르기 위한 이름이라면 여룹바알은 ‘바알과 다툰다’는 뜻으로 ‘바알의 단을 헐고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그래서 ‘하나님의 편에 서서 싸우고 백성을 위하여 헌신한’ 기드온을 기념하는 이름입니다.

성경이 여룹바알로 부르는 이유는 기드온이(아들들도) 변질되지 않고 이름처럼 여룹바알로 살았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이 기드온의 헌신을 기억하시고 인정하신다는 것, 그러나 이 백성이 그의 공로와 은혜를 잊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너희가 이런 기드온에게 그럴 수 있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오브라에 있는 기드온의 집은 하나님을 만난 기드온이 그 우상의 단을 헐고 하나님께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그런데 우상의 돈으로 산 불량배들을 이끌고 이 집을 유린하고 자기들의 왕이 돼달라고 했던 그 기드온의 아들들을 무참히 살해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요담은 스스로 숨고 70명의 아들들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다는 말은 요담만 아비멜렉을 경계하여 숨었고 다른 형제들은 경계하거나 숨을 이유가 없으므로 무방비 상태에서 아비멜렉을 맞이하였다가 잡혀 죽었음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죽일 하등의 잘못도 이유도 없는 자기 형제 70인을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량배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너희의 왕을 삼을 수 있느냐고 힐문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아비멜렉과 그에게 거사 자금을 대준 세겜 사람은 물론 온 이스라엘을 향하여, 눈에 보이는 기드온의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 사람들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는 너희의 모습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드온이 백성들을 위해 베푼 은혜가 얼마나 크게 생각되었으면 기드온과 그 아들과 손자가 대대로 왕이 되기를 원하였겠습니까? 그래 놓고서 왕이 되기를 원했던 그 아들들을 깡그리 죽일 수가 있는 겁니까? 그것도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을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말입니다.

여러분이 기드온이라면, 또 그 아들들이라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하는 심정을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그 원통함과 울분과 답답함을,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그 아들들이 배반당하는 아픔을 함께 겪고 계신 것입니다.

보이는 기드온이 그 백성에게 철저히 배반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도 그 백성에게 이처럼 배반당하여 왔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 합니다. 얼핏 생각해봐도 스스로 속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스스로 속이는 어리석은 존재가 사람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성경말씀이 맞습니까? 내 생각이 맞습니까? 당연히 성경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의 권고를 듣습니까? 아니면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한 세상의 생각을 따릅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맞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하면서 토를 달고 이유를 붙여 외면하고 우리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요 세겜 사람과 아비멜렉의 문제입니다. 아비멜렉과 그 외가 식구들과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우면서 그 결과가 어떠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물론 상상해보았겠지요.

그러나 아비멜렉의 말처럼 골육도 아니고, 세겜 사람의 말처럼 형제도 아니지만, 같은 지역 출신이라서 은근히 기대했던 바가 없지 않았을 텐데, 이득은커녕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의 결과를 빚어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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