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님의 판화. 생명천하지대본

우연한 기회에 교동 지석교회에 시무하시는 박철목사님이 운영하시는 홈페이지인 느릿느릿 이야기(www.slowslow.org)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즐겨 모이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올리는 글과 박 목사님의 글들을 보면서 참 많은 것을 느꼈다. 그중의 하나가 목사이신 박철 목사님의 글 첫머리에 자주 등장하는 ‘농부 하느님’ 이란 용어이다.

‘농부 하느님’ 참 인상 깊은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름은 존재의 성질을 규정한다. 정체성의 표현이다. 박 목사님의 홈페이지 ‘느릿느릿’이란 이름도 단지 재미로 그렇게 지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이름은 아마도 그분과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또 지향하는 진정한 삶의 방법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것입니다.  

‘농부 하느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농촌에 시무하시고, 교인들이 농민들이기에 의례적으로 그렇게 글을 쓰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용어에 녹아있는 박 목사님의 신학적 입장을 대충은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박 목사님이 큰 아들의 이름을 아딧줄이라 지은 것도 의미를 부여해서 일 것인데, 하물며 하느님을 부르는 명칭이 아닌가.

우리 신앙의 원형을 이룬 이스라엘 민족은 사막에서 형성되었다. 애급을 탈출한 일단의 노예무리들이 오랜 세월 동안 광야를 유랑하면서 겪은 수많은 고난과, 크고 작은 여러 번의 전쟁에서 그들은 사막의 신이자 그들을 전쟁에서 승리하게 만드는 ‘야훼’신을 신앙하는 종교공동체로서의, 또 하나의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경의 장면이 바뀌어서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야훼는 그들이 사막에서의 유랑을 통해 얻은 신앙적 정체성을 잃을 것을 우려하셨다. 한국농촌의 현실과는 달리 당시 가나안의 농경사회는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풍요는 자칫 사람의 가슴을 무디게 만들고 눈을 흐리게 만들기 쉽다. 야훼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의 강물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

나의 가장 큰 묵상주제 중 하나는 사막을 유랑하는 떠돌이 노예민족의 곤한 여정이다. 하루하루 삶을 절실함으로 살아가는 삶, 날마다 닥쳐오는 삶의 위험과 가난 중에서 그들은 구원하는 신의 영광과 정의로움을 체감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지나온 수 천 년 역사 중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김용님. 73×61cm, 캠버스에 유채, 1991

역설적으로 나는 오늘날의 농촌에서 사막을 유랑하는 그들의 모습을 본다. 오늘의 농촌은 그 옛날 사막을 유량하던 그들의 기약 없는 삶과 흡사하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그 옛날 노예에서 탈출한 유랑의 무리를 이끄시던 정의와 사랑에 넘치던 사막의 신 야훼처럼, 오늘의 하느님은 숱한 고난과 날마다의 노동 속에서 살아가는 농촌사람들 사이에 계실 것 같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축복이 함께 있다‘ 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처럼 오늘도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함께 신음하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농촌에 하느님은 햇빛에 찌든 농부의 모습으로 구슬땀을 흘리시며 자신의 큰 평화와 사랑을 끊임없이 내리고 계실 것이다.

농부 하느님의 큰 사랑이 느릿느릿 가족들에게 함께하는 그 평안을 나도 멀리서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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