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러다가, 그 거지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눅16: 19-25)

왜 부자는 지옥으로 가야만 했을까요?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손쉽게 나오는 대답은 아마도 '부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나사로는 하나님을 믿었다' 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고통을 면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씀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복락이 보장되기에 힘겨운 세상에서의 삶을 견디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본문을 아무리 뒤져봐도 믿음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부자가 갖고 있던 종교적 신념이나 행위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저 고운 옷을 입고 호사스럽게 살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부자는 넉넉한 재산 덕택에 여유 있게 인생을 즐겼던 것입니다. 재산이 많아서 잘먹고 잘살았다는 것이 지옥에 갈 이유가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혹자는 그가 세속적인 것을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재물을 숭상하고 마음에 두었기에, 그에게는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는 얘깁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성경 말씀에 따라, 재물이라는 우상을 섬긴 그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자신의 수중에 있는 재물이 자신의 행복을 지켜주고 자신의 가치를 지켜주는 것으로 믿고 의지했기에, 그는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그는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숭상하는 자였을까요?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가 하나님을 몰랐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아브라함을 알아보고 그에게 호소하는 것을 보면 그도 역시 유대의 종교적 관습을 잘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훌륭한 유대인이라 불려질 만한 사람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종교적 계율을 잘 지키고 하나님 섬기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보여지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얘기의 전개는 더욱 충격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 도대체 저가 왜 저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고통을 호소하며 도움을 청하는 그를 향해 조상 아브라함이 던진 대답은 너무도 단순명쾌합니다.
- 너는 살아서 온갖 복을 누렸지만, 나사로는 그렇지 못했다. 너는 이제 여기서 고통을 받고 나사로는 위로를 받는다.

어떤 분에게서 어린 시절 자기 집안에서 보았던 일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집이 좀 부유한 편이어서 거지들이 자주 구걸하러 왔다고 합니다. 거지들이 구걸하러 오면 어머니께서는 항상 작은 상에 음식을 차려 마루에 가져다 놓으셨다고 합니다. 아무리 얻어 먹는 것이지만 사람으로서 격식을 차려 대접한 것이지요. 그러면 거지는 상을 들고 마당 한 켠으로 가서 상을 내려놓고 앉아서 밥을 먹곤 했다고 합니다. 주인 마님의 호의에 대해 거지는 자기 나름대로 격식을 차린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어찌되었든, 상을 마루에 차려주는 주인 마님과 이 상을 들고 마당 한켠으로 옮겨가는 거지의 의례는 말없이 지속되었습니다.

지저분한 몰골이지만 그에게 사람으로서 격식을 갖추어 대접하는 주인 마님과 자신의 누추함이 사람들에게 불편함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상을 받아들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거지.  
이들에게서 사람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이라는 인간미가 은은히 배어나지 않습니까?

한국이라는 나라가 먹고 살만한 곳이 되었나 봅니다. 동남아를 비롯한 곳곳에서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노동자들이 많아진 것을 보면 과거에 우리가 돈 좀 벌어보겠다고 미국으로 독일로 일본으로 가던 일이 생각납니다.

모든 게 낯 설은 이국 땅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것도 어렵건만, 그렇게 노동을 한 후에 받아야 할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울분을 삭히는 노동자들이 심심치 않게 있는 모양입니다. 온 재산을 다 팔고 빚까지 얻어서 마련한 수천 만원을 대가로 주고 몰래 들어온 사람들이기에, 몇 년을 머물면서 빚도 갚고 돈도 벌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든 경찰에 신고만 되면 그 즉시 쫓겨나게 될 신분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사장이 일만 부려먹고 임금을 갈취해 버리는 일이 많이 있는 듯 합니다. 과연 그들이 내 형제라면, 내 자식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명품이 판매가 불황을 모르고 상승무드를 타는 모양입니다. 한쪽에서는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렵다고 아우성 치지만, 또 한쪽에서는 돈을 쓸 데가 없어 안달입니다. 어디서든 비싸다는 소리만 들으면 남들보다 앞서서 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 남이야 어떻든 자기의 부를 누리는 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데리고 있는 직원들에게는 단 돈 몇 만원 월급 올려주는 것도 사색이 되어 난리를 치는 사장이 제 자식 명품 사대고 룸싸롱 술값과 팁 지불하는 자리에서는 호탕함이 넘쳐납니다. 자기가 고용한 직원들은, 가급적 일은 많이 시키고 대가인 임금은 가급적 깎아야 내려야 할 소모품 정도로 여기는 사람도 꽤 많이 있습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부모의 눈에 비친 모습을 한번 상상해 봅니다. 큰애는 냉장고에 있는 온갖 음식을 잘 요리해서 배불리 먹고 살이 쪘건만, 막내 동생은 음식 할 줄을 몰라 형이 먹다 남은 부스러기나 주어먹다가 비쩍 말라 병들어 있고, 개가 와서 그 아이의 상처를 핥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면, 그 부모는 어떻게 했을까요?

호화롭게 사는 부자와 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는 나사로, 이들 사이에 이웃이라는 말이 끼어 들 여지가 있을까요? 이들 사이에 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끼여들 소지가 있을까요? 부자는 아마도 나사로가 자기 이웃도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저 무능력하게 빌어먹고 사는 거지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런 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로는 부자가 돌보아야 할 이웃이며 형제라고 선언하십니다. 부자가 누리는 사치와 호사스러움은, 이웃이며 형제인 나사로에게 나누어졌어야 할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네 눈에는 원수지만, 실은 그가 네 형제다 라는 선언으로 말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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