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에서 온 목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오랫동안 한 교회에서 훌륭하게 목회를 해온 노(老) 목사의 뒤를 이어 젊은 후임 목사가 부임했다. 새로 부임한 젊은 목사가 첫 설교 시간에 강대상에 올라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강대상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노 목사가 수년간 서서 설교했기 때문에 그가 섰던 자리가 낡고 해어져 발 모양의 자국이 나 있었다. 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자리에도 무릎 닿은 자리가 색이 바래 있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젊은 목사가 전임 목사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카펫 부위를 가위로 잘라서는 교인들에게 흔들어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제 발의 크기는 은퇴하신 노 목사님의 발보다 더 큽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카펫의 낡은 발자국에 제 발을 맞추기가 힘듭니다. 여러분이 저를 이 교회의 새로운 담임목사로 맞은 이상 노 목사님의 발 크기에 제 발을 맞추도록 강요해선 안 됩니다. 저는 제 발을 잘라서 노 목사님의 발 크기에 맞출 자신이 없고 또 그러지도 않을 것입니다. 대신 이 카펫의 발자국은 우리 교회의 자랑스런 기념물이 되도록 보관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원로목사(또는 명예목사)와 다르다, 그렇게 선언하며 지도자가 바뀌었으니 이제는 원로목사의 목회가 아닌 새 담임목사의 목회 방식을 수용해 달라고 떳떳이 말했던 것이다. 실제로 노 목사의 목회에 만족하며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해온 성도들에게 젊은 후임 목사는 허점 많은 사람으로 비치기 십상이고 이러다 보니 예전처럼 탄탄한 신뢰 관계를 만들어 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물론 잘못하면 이런 관계를 갖기도 전에 틀어지고 깨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는 후임자를 맞는 교회가 가져야 할 자세는 새로운 리더가 세워졌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후임자는 자신이 전임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빨리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얘기다.

"후임 목사는 성도들이 선택해야 한다"

한국 교회로 다시 눈을 돌려보자. 며칠 전 우리는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을 겪었다. 서울 강남의 대형 교회가 세습하지 않고 담임목사를 세운다는 것이 어느 일간지를 온통 도배하다시피 장식된 것이다. 당연한 일이 '뉴스거리'가 되어 버린 것도 부끄러운데, 하물며 그 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담임목사직 이양의 속내를 알고 나면 쓴웃음밖에 안 나올,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작태가 어찌된 영문인지 칭찬거리로 둔갑해서 그 비슷한 성격의 족벌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난 것이다.

2001년 한국 교회는 그래도 이런 우울한 풍경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데 위안을 삼아보자.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동광교회(기장·교인 500명 규모)를 지난 11월25일 사임한 김인호 목사와 이 교회 성도들의 후임자 세우기 모습은 다행히 한국 교회에 많은 교훈을 던져준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동광교회는 1981년 이번에 은퇴한 김인호 목사를 중심으로 설립된 교회다. 따라서 김 목사는 동광교회의 창립자인 동시에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곳에서 목회한, 그야말로 동광교회의 ‘터줏대감’이다. 게다가 당회원들 역시 김 목사를 형님처럼 아버지처럼 따르는 장로들이며, 그들 고백처럼 “김 목사님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수 있다”는 사람들, 곧 ‘김 목사맨’들로 빈틈 하나 없는 교회다.

대개 이런 교회들이 후임자 선정에 있어, 또 선정한 이후 말썽을 빚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물러나는 목사의 목소리에 의존하기 쉽고 또 은퇴한 이후에도 ‘섭정’의 여지가 여전하며, 이런 분위기에서는 은퇴한 목사의 가르침과 조금이라도 다른 조처들이 취해지면 곧장 은퇴 목사에게 달려가 고자질이나 해대고, 안 그래도 섭섭한 은퇴 목사의 소외감을 부추기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절대 권력’을 가진 김인호 목사가 “후임자는 여러분이 모시고 함께 일할 분이니 여러분이 직접 선택해야 한다, 내게 묻지 마라”며 처음부터 입을 봉해 버렸다. 게다가 김 목사의 아들이 목사이고, 사위는 이 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으면서 교인들에게 칭찬 듣던 목사였으며, 조금 멀리는 조카사위까지 온통 목사들이 친인척을 구성하고 있어 일부에서는 “우리도 어느 교회처럼 그렇게 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김 목사의 뜻이 너무 선명했다. 그는 이미 사위인 부목사를 다른 교회에서 사역하도록 조처했으며, ‘세습은 안 된다’며 뚜렷이 선을 그어 한번 논의다운 논의도 해보지 못했다.

동광교회는 2년 전부터 김 목사의 생각을 존중해 당회를 중심으로 후임 목사를 세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매주 월요일에 모이는 특별기도모임을 40주간이나 지속하며 후임자를 물색했으나 은퇴를 앞둔 지난 봄까지도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김 목사의 생각도 결국 흔들리게 되었다. 여전히 교인들의 중심에 선 자신도 이 일에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은혜 목회가 문화 목회를 만나다

이 무렵 김 목사가 소개받고 만난 사람이 후임자로 취임한 장 빈 목사다. 김 목사는 장 목사를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운동을 하는 목사쯤으로만 알고 있었다. 게다가 기장이라는 진보적인 교단에서 성령운동을 하며 한때 ‘주변인’으로 오해까지 받았던 김 목사로서는 어찌 보면 반대편 사람 같은 장 목사를 만난 것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첫 만남부터 김 목사 마음에는 ‘이 사람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장 목사에 대한 신뢰가 더했다고 했다. 장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말에 감동해 울기까지 했단다.

김 목사는 이런 사람이라면, 하는 생각으로 장로들에게 그의 의중을 이야기했다. 만장일치여야 했다. 지금까지 그가 목회하면서 이 원칙을 한 번도 어겨본 일이 없을 정도로 소중히 지켜온 목사와 교인 사이의 화목 때문이었다. 장로들 모두 김 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수석장로인 이대근 장로는 “충격이었다, 전혀 안면도 없는 분을 선택한 데 대해 감격했다”며 그 날 분위기를 전했다. 그렇게 해서 아직 설교조차 듣지 않은 목사를 후임자로 당회와 제직회와 공동의회가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이다.

이런 충격은 장 목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이야기다.

“담임목사직 교체를 두고 벌어지는 한국 교회의 흐름을 많이 접했고, 무엇보다 김 목사님과 다른 목회를 해왔기에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해 주저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처럼 은혜 목회를 하는 사람 중에는 나보다 잘 할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문화 목회가 필요하다. 내가 해온 목회에 문화를 접목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다.’ 그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또 후임자를 결정하는 방식이 무슨 고용사장 뽑듯 하는 게 싫었는데 동광교회의 이런 방식이 충격이었고, 개신교계에서 이런 좋은 모델이 생길 수 있다면 그것도 큰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장 목사는 교회가 후임자로 결정한 다음 주부터 곧장 동광교회 강단에 섰으며, 교인들과 교분을 쌓기 시작했다. 6개월여 시간이 지난 지금 모든 장로들은 장 목사에 대해 “김 목사님이 그렇게 신뢰할 만한 분이다”며 차츰 관계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김 목사는 은퇴 후 동광교회를 떠나 그의 평생 소원인 농촌 선교에 몰두할 예정이다. 선배 목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농촌에서 30·40대의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이제 은퇴 후 연약한 농촌 교회들을 순회하며 손수 선교비를 들고 가서 ‘하루 부흥회’라도 열어주고 농촌 교회가 필요한 일들을 찾아서 돕는데 매진할 생각이다.

내년 1월부터 시작할 예정인데 이미 김 목사의 뜻에 동참해 그와 함께 농촌 교회를 돌며 의료 사역을 하겠다는 동역자도 얻었고 김 목사를 초청하는 교회까지 여러 곳 생기고 있다. 그가 은퇴 후 농촌 선교에 나서는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은퇴한 뒤 어떻게든 교회를 떠나고자 했던 다짐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농촌 선교를 한다는 것이 교회를 떠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까지면 동광교회의 새 후임자 선정은 모두 마무리되는 셈이다. 적어도 은퇴한 전임 목사의 간섭은 거의 배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공은 장 목사를 비롯해 새롭게 당회장을 맞은 당회원들에게로 넘어왔다. 실제로 김인호 목사가 없는 동광교회가 리더십 공백 상태로 떨어질지, 또 김 목사와 장 목사의 차이가 어떤 갈등을 불러오지는 않을지, 곳곳에 장애물이 널려 있어 보인다. 그래서 장 목사는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 방침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장 목사는 김인호 목사가 남긴 체취를 맡으며 그의 목회 리듬에 먼저 자신을 내맡겨볼 생각이다. 어떻게 모든 교인들이 김인호라는 한 사람을 이처럼 신뢰하고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는지, 장 목사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거기 매우 강한 '한 거인의 힘'을 느낀다. 다행히 반년이 된 지금 자신을 끌어들이는 이 힘의 정체를 어렴풋이 잡을 듯하다. 그러나 좀더 시간이 흘러 이 리듬에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을 때쯤 비로소 동광교회의 풍토에 맞는 새로운 목회의 접목이 시작될 것이다.

"기도와 최선 다하면 성도들은 모인다"

지금까지 담임목사직을 후임자에게 넘기는 과정을 통해서 김인호 목사의 '아름다운 퇴장'에 주목했다면 이제는 그에게 접근하여 목회자로서의 김인호 목사를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의 '아름다운 퇴장'에 대해 보내는 갈채라기보다 이런 대미에 이를 수 있었던 지난 45년의 소중한 경험들에도 주목함으로써 단지 꽃만 보고 뿌리를 읽지 못하는 천박함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다. 실제로 김 목사의 목회 이야기는 젊은 목사 후보생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현장 선배의 호소와도 같은 느낌이 담겨 있다.

김 목사는 1956년 전남 해남의 계곡중앙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농촌 목회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성도 25명이 모이는 벽촌 교회였다. 그가 이곳에서 10년을 목회하는 동안 계곡중앙교회는 성도 160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36호 되는 마을 전체가 예수를 믿은 것은 물론 이웃 동네 주민들까지 모여드는 교회가 된 것이다. 벽촌 교회로서는 '대형교회' 수준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1966년 다시 목회지를 경기도 평택의 평궁교회로 옮겼다. 역시 외진 농촌마을 교회였다. 열 사람 중 서너 사람 꼴로 교회에 나오던 80호 마을이 김 목사가 목회하는 5년 동안에 주민 모두가 교인이 되는 경사를 맛보았다.

그리고 1971년 서울의 신사동교회로 옮겼다. 70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였지만 성도수 60명에 불과했던 이 교회가 김인호 목사와 함께 10년 동안 사역하면서 1500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리고 1980년 나이 50을 바라보며 다시 동광교회를 개척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의 지난 목회이력 가운데 쉽게 눈에 띄는 것이 가는 곳마다 사람을 몰고 다니는 목회를 해왔다는 점이다. 목회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얻는 일이라면 이런 이력을 지닌 김 목사로부터 들어야 할 무엇이 있다. 사람을 끄는 힘, 그것은 단순히 성장 노하우가 아닌 그 밑바닥을 흐르는 뭔가에 대한 호기심이다. 그러나 김 목사의 대답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단순하고 원론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목회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라 생각한다. 설교할 때도 이것이 마지막 설교라는 자세로 한다. 그러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는데…."

기도와 최선이라니…. 이 진부한 단어들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투로 비슷한 궁금증을 가졌을 장 빈 목사에게 짧은 기간이지만 그가 발견해낸 김 목사의 '힘'에 대해 물었다.

"김 목사님은 따뜻한 가슴을 지녔다. 그 사람이 누구든 김 목사님은 그에게서 숨겨진 달란트를 찾아 가능성을 꺼내주시는 능력을 지닌 분이다. 그 사랑 때문에 한번 붙들린 사람은 당신을 떠날 수 없게 된다. 지난 몇 년간 김 목사님이 편찮아서 교회 운영의 전반적인 리듬이 흐트러졌는데도 500명 정도에 불과한 교우들이 1000명 규모는 돼야 가능한 이 큰 교회(동광교회)의 살림을 아무런 차질 없이 꾸려나갈 정도로 깊은 신뢰가 쌓여 있음을 본다."

여기서 '기도와 최선'이 지향하는 지점을 발견한다. 섬김이고 화목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사람의 흠을 보는 눈을 잃어야 했다. 45년의 목회 생활을 통해 한 번도 써보지 못한 탓이다. 장점을 보면 비로소 관계가 형성된다는 이야기다. 한 번도 적을 만들지 않았기에 장로들과의 불화는 생각도 할 수 없다.

언젠가 장로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 한 쪽에서 다른 쪽 장로들에 대한 불신임을 묻기 위해 서명을 받아 김 목사 앞에 내놓았다. 김 목사는 그 자리에서 서명지를 찢은 다음 곧장 사표를 내고 목회지를 옮겼다. 그 뒤로 자신에 대한 온갖 험담이 오갔지만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이 찾아와 용서를 빌 때도 "내 잘못이다"며 물러섰다. 교회를 떠나면서도 고수해온 원칙이었던 셈이다. 그는 책망이 칭찬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책망하는 순간 담을 쌓는 법인데 김 목사로서는 차라리 의를 위한 책망보다 의에 이르도록 칭찬하는 것이 훨씬 쉽고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목사의 사명이 칭찬해주는 것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당회를 할 때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부담을 가지면 "보류합시다" 하고 물러선 뒤 만장일치가 되기를 기다렸다. 명백히 장로의 잘못인데도 "내가 잘못했다"고 물러섰다. 그러고 나면 며칠 못 가서 그 장로가 먼저 찾아와 사과했다. 장로와 더불어 논리를 따지고 싸워서 달성한 승리라면 그것은 적어도 목사에게는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사람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양보하고 고개 숙였으며 대가로 그는 사람을 얻었다. 목사였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재벌이 돈을 모으듯 그는 사람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다. 논리나 체면을 버렸듯이 돈도 버렸다. 그는 아직까지 저축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그의 원칙처럼 지켜온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진 돈이 있으면 곧 필요한 곳으로 돌려 사람을 얻는 데 썼다. 그는 은퇴하면서 퇴직금 5천만원을 장학기금으로 내놓았고, 모든 장서를 교회에 기증했다.

퇴직금도 모두 장학기금으로 내놓아

평택의 평공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이다. 이웃에 위장병을 앓는 사람이 살았다. 불신자였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까지 미워하는 사람이었다. 김 목사는 병자를 보면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고 애썼던 터라 염소젖이 위장병에 좋다는 소문을 듣고 염소를 길러 첫 젖이 나올 때부터 석 달 동안 그 집에다 젖을 배달했다. 처음에는 목사가 갖다준 것은 재수 없다며 발로 차버리기까지 하던 사람이 석 달이 지나서는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 서로 가진 것을 나누더니 나중에는 온 가족이 교회에 출석해서 세례를 받았다.

기장 목사이면서 성령운동을 주도하고 한신대의 신학사상에서 비켜나 '축자영감설'을 따름으로써 한때 온갖 수모를 당했던 김 목사가 한신대 총동문회장에 재단이사장, 운영위원장까지 지낼 수 있었던 까닭 역시 물러서고 기다리며 침묵한 결과였다.

45년의 목회생활 동안 가는 곳마다 사람을 모으고 다녔던 그의 이력이 후배들에게 물려줄 만한 소중한 유산이 될 수 있는 까닭 역시 그의 목회에 주춧돌로 떠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물러섬'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단 한 권의 책도 내기를 거부해온 그가 은퇴 후 유일하게 남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설교집도 자서전도 아닌) 회고록을 내놓기로 했다. 장 빈 목사는 그 날 출판기념회를 '홈커밍데이'로 열어 김 목사의 가르침과 사랑의 빚을 진 많은 이들을 초청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김인호 목사ⓒ뉴스앤조이 김승범

▲ⓒ뉴스앤조이 김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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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목사와 후임자 장빈 목사 ⓒ뉴스앤조이 김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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