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제국은 승리의 깃발을 흔들고 있다. 제나라 식민 수천 명의 목숨을 아프칸 민중 수백만의 목숨과 교환하면서, 그들은 줄곧 평화와 정의를 외쳤다. 피의 복수극은 거대한 제국이 지닌 가공할 힘의 논리에 의해 일방적 승리로 끝나가고 있다. 언론은 연일 수도 카불의 해방적 분위기를 탄복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결국 거짓임을 안다. 탈레반은 무너졌지만, 새로이 구성될 정권이 미제 주도로 이루어지리라는 점에서, 아프칸 민중은 또 다른 식민지의 백성이 될 것이다. 수도 카불의 공허한 환희 뒤로, 탈레반 병사의 시체가 나뒹굴고, 부녀자에 대한 강간과 어린이들의 아사가 이어진다. 닥쳐올 겨울은, 그들을 빈곤과 추위와의 또 다른 전쟁으로 몰고간다. 아마도,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아프칸 난민 대다수가 죽음의 초대에 응할 터이다.

저능한 제국의 저능한 수장 부시는 이참에 세계 질서를 재편할 모양이다. 얼치기 수장 부시의 저능함은 이제 이라크와 북한을 타깃으로 삼아 '확전'의 뜻을 비추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아, 제국의 오만함은 끝이 없던가. 선이 악을 이기리라 호언장담하던 그의 더러운 욕망은 차마 담을 수 없는 '악'의 말들을 쏟아낸다. 무역센터가 무너지던 날, 비통함에 젖어 그렁이는 눈으로 그가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아메리카를 축복할 것이다.' 조지 부시. 명분 없는 전쟁을 정당화할 것을 요구하며, 미국 내 민주주의마저 말살하려는(근간에 통과된 '애국법안'은 일체의 사상적 자유를 억압하는 문건을 포함하고 있다.) 저능아이자, 유사 이래 손꼽힐 보수주의자인 그는 '기독교인'이다.  

기독교. '기독교'는 불순하지 않지만, '기독교인'은 대개 불순하다.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의 내포의 다름을 긍정하는 한에서 말하자면, 기독'교인'은 '악'이다. 언뜻 지나쳐 보이는 이 말은 오늘, 한국에서 '기독교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캐묻는 것으로 분명해진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이야 그것을 캐묻는 행위조차 죄악으로 황급히 규정하고 피켓을 들고 연대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예수를 좇겠다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곰곰히 생각해볼 일이다. 한국적 토대에서 대개의 종교 집단이 그러하듯, 기독교는 이미 거대한 이익 집단으로 거듭나고 있다. 좋은 신앙의 징표가 곧 물질 축복이며, 그러한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일체의 보수성이 참 가치임을 설파하는 '기독교 집단'은 이미 교회가 아니다. 그러한 집단의 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그것으로 값싼 신앙적 양심을 위무하는 교인들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예수를 좇는 일군의 인간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다면, 적어도 오늘 '기독교인'은 예수적 삶의 관점에서 분명 '비그리스도인'이며, 어떤 의미에서 '반그리스도인'이다.

그들 기독교인의 '악'은 일체의 사회적 악에 대한 '침묵'에 근거하고 있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어찌 '악'이 될 수 있으랴마는, 그것은 '침묵'이 '동의'의 또 다른 형태라는 점을 간과한 어리석은 물음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결국 어떠한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다는 점에서, 소극적 동의이며, 졸렬한 보수이다. 사회에 흥건히 젖어든 부패의 흔적과, 공고할대로 공고해진 지배 양식에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보수성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기독교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집단의 논리에 대한 어떠한 의구심도 없이, 교회가 휘두르는 파시즘의 졸개가 된 그들 '기독교인'들은 예수적 삶의 본래적 가치를 쉬 망각한다. 예수를 좇는 삶이 지배자의 논리를 정확히 거스르는 일임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도 그 같은 까닭에 기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익 창출의 극대화가 곧 최대의 행복으로 이어짐을 간파한 그들은, 교회의 이상 역시 그러한 논리에 의해 구현되리라 믿어 버린다. 게다가 한껏 비대해진 초대형 교회는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사회적 지배 세력의 한켠에 떡하니 자리 잡는다. 그러니, 그들 '기독교인'들이 기존의 지배 양식을 의심할 까닭은 전무하다. 더구나 공고한 계급 구조를 까발릴 까닭은 추호도 없다. 그들은 이미 지배 세력의 일부를 접종 받았으며, 그로부터 무시할 수 없는 이익이 창출되는 탓이다. 더러운 욕망을 머금은 보수주의는 그리하여 기독교 집단과 그 구성원들의 절대적 삶의 원리가 된다.

서둘러 말하자면, 건전한 보수주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수주의란 대체로 가진 것을 내어놓지 않으려는 얄팍한 욕망에 근거하는 것이기에, 애초에 보수주의로부터 인간적 가치를, 더구나 예수적 삶의 가치를 기대하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다. 약한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편에서, 시대의 정치 세력과 불화한 예수는 그러한 의미에서 진보주의자다. 그러나 지독한 보수주의는 예수 정신에 정확히 반하는 지점에 서서, 기독교 집단과 그 구성원의 유약한 정신을 잠식한다. 희안한 것은 그 모호한 지점에서 그들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는다' 고백한다는 사실이다. 허나, 그들이 믿는 예수란 한낱 욕망 덩어리에 불과하다. 개인적 삶의 안락을 보장받으려는 욕망, 집단적 이익을 창출하려는 욕망, 교회를 비대하게 늘려 사회적 지배 세력으로 거듭나려는 욕망. 그 모든 욕망이 응집되어 예수 상(象)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일체의 진보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예수 상'을 좇되, 예수를 좇지는 않는다. 예수를 좇는 일이 자신의 욕망을 죽여야하는 끔찍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아니 너와 나는 우리만의 예수 상을 창조한다.

결국, '기독교인' 부시가 내세우는 기독교적 보수주의는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담지한 생활 원리이다. 가진 자의 편에서,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그의 보수주의에서는 악취가 난다. 동일하게, 그러한 지배자의 논리를 '침묵'함으로써 동조하는 '기독교인'(나라의 안위가 흔들릴 때, 제 삶의 안락함이 침해받을 때, 기도회며 예배가 성황을 이루는 것은 제국의 '기독교인'들의 구역질나는 욕망의 현현이다.)의 썩은 '보수주의'에서는 추악한 욕망이 꿈틀댄다. 사회적 불평등 구조에 대해서,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서 일체의 입을 열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보수주의와 상충하는 탓이다. 기독교가 지배자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기독교인은 하루가 다르게 예수로부터 멀어져간다. 사회가 진보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그들. 사회적 불평등 구조와 그 지배 양식에 대해 입을 다문 그들. 오히려 그 '악'을 마치 예수적 삶의 가치인 양 가장하는 그들. 그들 기독교인은 모두 예수를 능욕하는 '반그리스도인'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에게 '악'이다.

오늘, 예수적 삶을 좇는 일은 '진보주의'가 아닐 도리가 없다. 그것은 예수적 삶이 지향하는 천국이 일체의 계급이 사라진 곳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그것은 예수적 삶의 가치가 지배-피지배의 구조를 갈아엎는데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하다. 그런즉, '기독교인'인 너와 나는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적 삶을 좇는 예수주의자, 참된 진보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이천 년 전, 유대인은 단 한 차례 예수를 못박았지만, 오늘 '기독교인'은 상시적으로 예수를 못박고 있다. 보수주의와 썩은 욕망의 못은 예수의 살을 찢으며, 예수 정신을 해체한다. 다시, 졸렬한 보수주의와 타락한 욕망을 예수에게 덧칠하는 모든 '기독교인'은 예수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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