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벽에는 항상 전도대회나
부흥회 대신 국가보안법 철폐와 부시
정권 반대를 주장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진보 교회' 향린교회가 올해로 50년을 맞았다. 향린교회는 '희년'을 선포하고, 지금까지 이어온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올해 5월 16년 5개월 동안 목회한 홍근수 목사가 65세로 조기 은퇴한 것이다.

향린교회는 1993년 4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발표한 '신앙고백선언'을 예배고백문으로 쓸 수 있도록 요약해서 '신앙고백문'을 발표했다. 이 고백서는 향린교회가 민주적인 공동체, 민족과 약자의 고난에 함께 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신앙고백문과 함께 통일선언문도 발표했다. 통일선언문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성실히 이행하고, 휴전협정체제를 평화협정체제로 전환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더불어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과 국가보안법 폐지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40주년 당시 발표한 통일헌법 초안이 향린교회가 지향하는 통일을 소개한 큰 그림이라면, 통일선언문은 통일을 위해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고 향린교회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신앙고백문이 향린교회의 교회갱신 의지를 표현했다면, 통일선언문은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향린교회의 정신을 담았다. 이러한 지향점이 선언에서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이 교회의 힘이다.

향린교회는 스스로 가난한 교회, 몸집을 불리지 않는 교회, 이웃을 섬기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신념을 그대로 실천했다. 70년대 좌경용공으로 몰리면서도 도시산업선교를 지원했고, 노동자를 위한 야학을 열었다. 80년대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맨 앞줄에 섰다. 이 과정에서 홍근수 목사가 1991년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1년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90년대 중반,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던 교회들이 "이제 우리 나라는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됐다"며 '거리'에서 철수할 때, 향린교회는 '운동권 교회'라는 비난을 받으며 거리를 지켰다. 홍근수 목사는 "우리 나라는 아직 민주화되지 않았고, 통일되지도 않았다. 갈수록 미국에 예속되고 있다. 향린교회는 민족이 당하는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선교라고 믿기 때문에 '거리'로 나간다"고 말했다.

▲향린교회 창립 50주년 기념 음악회를 마치고 홍근수 목사, 조헌정 목사와 교인들
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세상을 향해 예언자의 소리를 내는 만큼, 향린교회는 자신을 갱신하는 데도 많을 힘을 쏟았다. 40주년을 맞아 강남향린교회(김경호 목사)를 분가시켰다. 당시 향린교회는 교인 수가 500명 이상이 되면 새로운 교회를 지어 분가시킨다고 선언했고, 이것을 그대로 실천했다. 대형교회가 되는 것을 구조적으로 막자는 것이다. 분가한 강남향린교회는 독자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면서, 향린교회가 지향하는 정신은 그대로 공유하고 있다.

향린교회는 목사와 장로 임기를 7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권력이 집중돼 썩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반면, 보통 1년인 부교역자 임기를 3년으로 늘렸다. 부교역자도 소신껏 목회하라는 뜻에서다. 향린교회는 우리 정서에 맞는 예배와 문화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다. 향린교회 교인들은 "가장 한국적인 예배를 드리고 싶으면 우리 교회로 오라"고 말할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하다. 향린교회 평신도로 구성된 국악선교회 '예향'이 있기 때문이다. 95년 창립한 예향은 이제 향린교회 예배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성장했다. 올해는 그 동안 예향이 부른 국악 찬송 200여 편을 모아 '국악찬송가'를 펴낸다.

사회참여를 부르짖고, 교회 민주화에 앞장서는 교회가 가난하다는 소리는 향린교회에 어울리지 않는다. '운동권 교회'라는 꼬리표를 달고 '빨갱이 목사'가 목회하는 데도 향린교회는 꾸준히 성장해왔다. 10년 전 분가하고서도 지금 다시 분가해도 될 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이정도 했으면 됐지'라는 안일한 생각은 향린교회와 어울리지 않는다. 교회 안에는 더 많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장로제 대신 평신도 중심의 운영위원회를 만들자', '평신도 대표가 당회에 참여해야 한다', '대외선교 예산을 30% 이상 할당하기로 한 10년 전의 선언을 지켜야 한다'는 등 다양한 요구가 줄을 잇는다. 홍근수 목사도 교인들의 사회개혁을 위한 교인들의 발걸음이 자신의 걸음보다 항상 뒷쳐진다고 안타까워했다. 홍 목사는 "교인 대부분이 중상층이고, 갈수록 보수화되고 있다. 교인들의 사회참여 열정이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향린교회의 과거 발자취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과제는 이제 후임 목회자인 조헌정 목사(49)와 교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조헌정 목사(왼쪽)와 홍근수 목사(오른쪽). ⓒ뉴스앤조이 주재일

홍근수 목사…"더 넓은 목회하겠다"

홍근수 목사는 87년 1월 향린교회에 부임해 16년 5개월을 목회했다. 홍 목사는 부임 초기부터 민족자주와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이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라고 설교했다. 이에 맞서 일부 교인들은 향린교회가 너무 좌경화 됐다면서 교회를 떠났다. 홍 목사는 "이 일 때문에 '실패한 목회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시련을 딛고 16년을 향린교회에서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교인들이 '빨갱이 목사'를 넉넉하게 품어주었기 때문이다"며 향린교회 교우들에게 고마워했다.

운동권에만 관심을 갖고 목회는 소홀했던 것 아니냐는 우려에 대해, 홍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틈틈이 사회참여를 했다고 밝혔다. 대신 목회와 개인생활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목회했다고 했다.

홍근수 목사는 향린교회를 떠나는 아쉬움 만큼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목회하는 일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인다고 한다. 홍 목사는 "화해·평화·통일을 위해 뛰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다. 이들을 위해 목회하고 싶다"고 했다. 홍 목사는 현재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여중생 범대위 등 수많은 단체에 공동대표직을 맡고 있다. 한편, 홍 목사는 평신도로 새길교회에 출석하기로 했다.

조헌정 목사…"깊은 영성을 지닌 교회 만들겠다"

홍근수 목사 후임으로는 조헌정 목사(49)가 내정됐다. 조 목사는 한신대를 나와 미국 유니온 신학교와 버지니아 유니온-PSC 신학대에서 각각 석사와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워싱톤 벨츠빌교회에서 15년간 목회했다. 벨츠빌교회는 한인교회와 미국교회가 연합한 최초의 교회다. 그리고 그가 첫 담임 목회자가 됐다.

조 목사는 역시 '빨갱이 목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조 목사가 미국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서면서 붙여진 별명이다. 조 목사는 홍동근·이승만 목사 등이 참여한 '북미주 기독학자회' 부회장이 되어 실무를 도맡았다. 96년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조 목사는 목회자 찬양단을 조직해 북한 돕기 모금활동에 나섰다. 그래서 평양 봉수교회를 통해 10만 톤의 옥수수를 북한에 전달했다.

조 목사는 사회참여와 교회갱신을 부르짖는 만큼, 향린교회 스스로가 개혁적이고 깊은 영성을 지닌 공동체인지 항상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구역 모임을 평신도끼리 상호 목회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그리고 조 목사는 공동체를 훈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