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앞에는 1965년 판의 낡은 슈바이처 자서전이 놓여 있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건져낸 보석 같은 책이다. 표지 앞뒷면에는 아마도 첫 주인이었을 사람이 자신의 이름과 낙서를 어지럽게 갈겨 놓은 게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정작 책은 읽지 않았는지 다행히도 내용은 깨끗해서 세로쓰기로 쓰여진 것 외엔 읽는 데 그다지 불편함이 없었다.

위대한 영혼과의 행운의 만남

이 책은 새 주인을 만나기까지 긴 세월 동안 헌책방 창고에서 침묵하며 견디고 있었다. 그러니 책을 샀다고 해도 직접 읽고 책과 대화하기 전에는 누구도 주인은 아니다. 어쨌든, 묵은 책과 닿은 소중한 인연으로 이 위대한 영혼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은 슈바이처가 56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차원에서 직접 쓴 거라 그런지 여느 전기와는 격이 다르게 다가왔다. 게다가 한국어판을 위한 저자의 서문도 딸려 있다. 그는 짧은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오늘날 세계는 여러 가지 곤궁에 빠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진정한 문화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문화란 지식과 능력이 이룩하는 업적에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외면적인 진보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선량하고 가치 있고 인자한 인간이 되기를 바랄 수 있는 정신적인 진보가 동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이때야 비로소 외면적인 진보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이기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세계에 불행을 가져올 뿐입니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희구에서 위대한 문화진보가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 문화진보야말로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중대한 문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욕심 많은 사람, 슈바이처

내가 보기엔 슈바이처는 정말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신학자, 철학자, 음악가, 의사에 이르기까지 그의 다방면에 걸친 이력은 보통의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한 사람이 일생에 걸쳐 한 분야도 제대로 이루기 힘든 데, 그는 참으로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재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냥 남들 하는 만큼 한 것이 아니라, 각 분야마다 그야말로 한 획을 그었다 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학분야에서 그가 남긴 저작 [예수의 생애 연구사]는 지금까지도 금자탑처럼 남아 예수 연구의 필독서로 손꼽힌다. 또한, 음악 전공자들에게 슈바이처는 바흐 연구와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 그리고 오르간을 현실적으로 개량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철학자인 그는 칸트를 연구했고 새로운 문화를 위한 인간윤리로서 '생명에 대한 외경 사상'을 부르짖었다. 마지막으로 의사로서 그는 현재 아프리카 가봉에 속하는 람바레네에서 90세의 생을 다하는 날까지 흑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흔히 '원시림의 성자', '세계의 위인'이라는 별칭이 따라 붙곤 한다. 그러나, 이런 수사들은 우리가 슈바이처라는 한 인간의 진면목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그런 말들은 슈바이처를 우리 보통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서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인간이었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고뇌하는 건 당연했고, 책을 한 권 쓰더라도 많은 시간을 들여 온갖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천재라서 그냥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다만, 그가 여느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예수의 '이웃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관념으로 알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실천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던 것이다.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근심으로 싸우고 있는데 나만 행복한 생활을 보낸다는 것은 나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에 동급생들의 비참한 가정 형편과 우리들 균스바하 목사 댁 어린이들이 누리고 있는 참으로 이상적인 가정 생활을 비교해 보고 나는 심한 충격을 받곤 하였다. 대학 시절에도 연구 생활을 하면서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무엇인가 공헌할 수 있다는 행복 속에서 나는 물질적 환경과 건강 때문에 이러한 행복이 허용되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부단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문득 나는 이러한 행복을 어떤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이것에 대하여 나도 무엇인가 남에게 베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생각을 더듬으면서 고요히 사색에 잠겨 있는 동안 밖에서는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드디어 다음과 같은 결의에 도달하였다.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하여 살아도 좋게끔 되어 있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나서는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봉사하는 일에 몸을 바치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의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신 예수의 말씀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하고 나는 참으로 여러 번 생각해 보았다. 이제 나는 그 대답을 발견하였다. 여기에 나는 외적인 행복에다 내적인 행복도 부가하여 차지하게 되었다."

생명에 대한 경외

내가 슈바이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생명에 대한 경외'로 요약되는 그의 사상이다. 슈바이처는 이러한 사상적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수많은 경험과 사색을 거쳐야 했다. 때로 전쟁포로로 붙잡혀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에 떨었고, 짐승처럼 취급받는 흑인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아야 했다. 그러다가 그는 윤리철학의 생명력 없는 공허함을 넘어보고자 온갖 사색을 거듭한 끝에 어느 날 문득 계시처럼 "생명경외"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노라고 술회한다. 그는 이 '생명경외'야말로 세계·인생 긍정과 윤리가 다 같이 내포되어 있는 이념이라고 하며, 윤리적 세계, 인생 긍정의 세계관은 인류의 문화적 이상을 성취하는 발판이라고 보고 있다. 생명경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살펴보자.

"현실 세계를 무엇이라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윤리적 세계·인생 긍정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색적 노력이 아직도 있지만 이 모든 노력은 장래성 없는 허망한 것이다. 생명경외의 세계관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데서 온다. 이 세계는 영광 중에 전율할 것, 의미 속에서 의미를 상실한 것, 환희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고뇌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어느 점으로 보아도 이 현실 세계는 인간에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사건을 의미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하여 인생 문제에 대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있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생명경외는 세계 전체에 대한 모든 인식과는 관계없는, 대(對)세계의 정신적 관계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생명경외야말로 체념의 어두컴컴한 골짜기를 지나 내면적인 필연성에서 윤리적 세계·인생 긍정의 밝은 산마루에 우리를 인도한다."

인생과 세계에 대한 사색의 소중함

슈바이처는 사색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모습을 보면서 납득할 수 없다며 개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색을 포기한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는 거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위축되어 가는 인간들이다. 사색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이러한 현대인은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정신적인 파산선고나 다름없고 여기에서 허무주의가 시작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권력이나 선전으로 그들에게 강요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슈바이처는 꼬집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인생과 세계에 대하여 사색하는 인간이라면 불가피하게 생명 경외에 다다르게 된다. 그 외에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결론이란 없다고 한다. 만약에 인간이란 회의주의나 윤리적 이상 없는 인생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사상이 아니라 사상이라고 자칭하는 무사고(無思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본을 위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전쟁 광기가 횡행하고, 끊임없는 환경파괴로 인하여 당장의 내일이 불안한 세계에 우리는 놓여 있다. 이러한 지금의 상황이야말로 슈바이처가 외친 생명경외 사상을 곱씹어야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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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서점에서 구입해 읽을 수 있는 슈바이처 자서전
[나의 생애와 사상] 알베르트 슈바이처 저 / 천병희 역 / 문예출판사 / 1999년 11월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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