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것을 축하하는 주일(마 21:1-11)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왜 입성하셨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이유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예수님은 유대의 관원들에게 잡혀가실 것이고, 재판을 받으실 것이며,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 자신 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나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예수를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줄 유대인의 왕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땅에는 로마로부터 파송 받은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분봉 왕 헤롯 안티바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왕이 아니라, 로마의 하수인으로, 오히려 자신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에 대해 더욱 강렬하게 갈망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보통 인생 같다면 피하고 싶은 곳일텐데, 주님은 전혀 어떤 거부감을 갖지 않으시고 담담하게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1. 나귀를 타신 예수
주님은 들어오시는 모습부터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먼저 들어가시기 전에 황금마차를 찾으신 것이 아니라, 어미가 있는 나귀 새끼를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황금마차가 아닌 나귀의 새끼를 타셨다는 의미는 이건 유대인들의 상상을 뒤엎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쩌면 당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함일 수도 있고, 모든 세인들에게 진정한 겸손을 보여주시기 위함일 수도 있는 파격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마태는 이를 두고 그냥 나귀라고 표현하지 않고, 멍에 메는 나귀의 새끼를 타셨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장차 며칠 후 인생들의 멍에를 짊어지실 모습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생들의 멍에가 무엇이겠습니까? 죄악과 죽음과 세상 질고가 아니겠습니까? 이 무거운 멍에를 짊어질 만한 인생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설령 누가 짊어진다 한들 해결할 수 없는 걸 짊어지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니 이걸 짊어지시고 십자가란 형틀을 통해 단번에 해결하시려고 오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을 환영한 첫 번째 이유
그러면 그 많던 유대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좀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열렬하게 기뻐하며 환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문 5절 말씀 때문입니다. 거기 보면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을 가지고 유대인들이 기뻐하였을까? 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유대인의 왕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그 해답은 스가랴서 9장 9절로 올라가게 됩니다.

거기에 보면, 오늘 본문의 5절 말씀을 예언하는 내용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하~ 이렇게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스가랴서는 분명 구약 성경의 말씀입니다. 이 당시는 신약 성경이 없던 당시니까 이 말씀을 기억하는 그들이 보면 기절하고 깜짝 놀랄 일 아니겠습니까? 네 왕이 네게 임한다고 하였지요? 그분은 공의롭고 구원을 베풀고, 겸손하다 그랬습니다. 더욱이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하였으니 이 보다 더 정확한 예언의 실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거기다 한 마디 더 충격적인 것은 너희는 그걸 보면, "크게 기뻐할찌어다! 즐거이 부를지어다!" 그랬으니 그동안 억압받던 유대인들이 미치도록 환영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거기다가 10절 말씀을 보면, 이건 더 기절할 노릇입니다. 왕으로 오실 그분이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건 문자적으로 보면, 유대 땅 예루살렘의 해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그들이 생각하는 꿈만 같은 로마로부터의 해방! 이걸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이 그렇게 크게 기뻐하고 열렬하게 환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좌우지간 온 유대의 관원들이 다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크게 기뻐하고 환영하였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환영한 두 번째 이유
다음으로, 요한복음 12장 17, 18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한 두 번째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죽었던 나사로, 이미 죽은 지 4일이나 되어 부패하였던 나사로(요한복음 11장 17절)를 살리신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라 하면 워낙 율법적으로 생무장을 한 자들이기 때문에 마음이 보통 강퍅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이 쉽게 믿을 수 있는 자들은 아니었지요. 그런데 나사로를 살리셨다 함은 아주 대단한 뉴스거리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증언하였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기록한 것은 나사로의 이야기를 믿고 그들이 더 열렬히 환영하였다는 이런 관점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구속사적인 면을 보고 믿으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의 표적만 보면서 따르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환영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4. 환상이 깨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 그들의 멍에를 짊어지실 시점이 다가온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6장 17절에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36절에서 겟세마네라는 동산에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셨습니다. 잠을 자는 제자들 옆에서 주님은 당신이 짊어지실 운명에 관해 준비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가룟 유다와 함께 온 군병들에게 잡히고 맙니다.  그리고는 대제사장 앞에 고초를 당하게 되십니다. 그리고 유대 총독인 빌라도 앞에 끌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심문을 당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자, 이런 일련의 비극적이고 처참한 모습들은 그 많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니 자신들을 구원하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인 줄 그렇게 믿었고, 또 구약 성경의 말씀대로 오신 분이란 걸 확실히 믿었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제자들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도 똑같이 그런 생각으로 실망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잡혀가시자 그 많던 유대인들과 제자들은 두려움과 실망감으로 인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5. 유대인들의 분노
이러니 그 동안 예수님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철저하게 믿었던 유대인들은 대실망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실망은 차라리 분노의 감정으로까지 표출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마침 그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을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으니, 바로 유월절날 빌라도 총독의 죄수 심판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마침 예수님과 함께 심문을 받은 죄수 중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죄수 둘과 바라바라는 죄수, 그리고 예수님 이렇게 4명이었습니다. 마침 이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인데,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묻기를 누구를 놓아 주냐고 하자, 많은 유대인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자신들을 실망시킨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화풀이격으로 흉악한 강도 바라바를 놓아 주라 하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있었던 그 많던 유대인들이 요한복음 19장 6절에서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6. 왜 그랬는가?
그렇다면,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이 이렇게 분노하듯이 몰랐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누가복음 19장 41절 ∼44절에서 증거하는데, 그들이 '고난의 날'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왕을 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죄악과 사망과 질고에서 구원할 메시아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장 18절과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미련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는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였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7. 거기 너 있었는가?
처음….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열렬하게 환영하던 그 많던 유대인들은 주님이 고초 당하시는 자리에는 없었습니다. 못 박히시는 그 자리에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아파하실 때도 그들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그들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거기는 그들이 있고 싶어하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있고 싶어하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던 자리인가요? 아니면 주님이 고난 받으시고 못 박히시던 자리이던가요? 주님이 너무 너무 아파 고통을 감당하다 못해 운명하시던 그 자리이던가요?

거기 여러분은 있었던가요? 거기 여러분은 있었습니까? "네, 주님! 제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도망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젠 도망가지 않고 있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피묻은 손으로 우리를 부르고 찾으십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주님이 부르실 때, 찾으실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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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빛과소금교회 4월 13일 종려주일 설교/마태복음 21장 1절∼11절
http://www.ils.or.kr로 들어가시면 더 많은 설교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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