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교회 종각앞 목련이 개화 직전이다.

봄이다. 오늘이 우수(雨水)다. 새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다. 교회마당 목련 꽃잎이 궐련처럼 말려져 금방이라도 꽃망울이 터질 지경이다. 이제 모든 식물들이 출발지점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달리기 선수처럼 어느 순간 개화의 절정(絶頂)을 드러낼 것이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봄 햇살이 구수한 커피향처럼 감미롭다. 겨우내 한설풍파(寒雪風波)를 견뎌낸 모든 생물들이 새 생명을 잉태하고 발아(發芽)하는 계절이다.

머지않아 예수의 수난과 부활이 교차하는 계절이 시작될 것이다. 거기에 내 몸을 맡기고 순응하여야 할 것이다. 봄은 시작의 계절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공평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런 자연의 조화와 질서에 내 몸을 맡기고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사는 게 여유롭다. 자연과의 합일(合一)이야말로 이 시대, 모든 현자(賢者)들이 깨달은 화두가 아닌가?

오늘은 지난번 소개했던 지정자 성도 얘기를 좀더 하고 싶다. 그 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에 더 그런 마음이 든다.

1986년 겨울, 우리 내외는 서울에서의 신혼살림을 청산하고 강원도 정선 두메로 가게 되었다. 본래 첫 목회지로 가게 되었던 곳은 충북 단양이었다. 모든 결정이 내려진 상태에서, 이사 갈 날짜까지 정해지고 전셋집도 나갔는데 저쪽에서 우리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자초지종을 여기다 적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암울하고 지루한 시기였다.

그렇게 몇 달 동안을 하릴없이 놀다가 친구의 소개로 강원도 정선 두메산골 덕송교회로 가게 된 것이다. 담임자가 반년동안 없는 작은 교회였는데, 그것도 간신히(?) 가게 되었다. 내가 운동권이라는 것이 알려져서 하마터면 거기도 가지 못할 뻔 했다. 아무튼 친구의 도움으로 구들장 신세를 면하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새벽 6시에 짐차를 불러 이삿짐을 싣고 강원도 정선을 향하게 되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고속도로에 차가 막 진입하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렵사리 평창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먹고 정선으로 이어지는 재(嶺)(일명 비행기 재: 지금은 터널이 뚫려져 있음)를 넘게 되었는데,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네 시간이 더 걸려서 가게 된 것이다. 그것만도 다행한 일이었다. 오후 네시쯤 도착하게 될 거라고 교인들과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정선 덕송리에 도착한 시간이 얼추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교인들과 동네 사람들은 몇 시간동안 기다리다 전도사가 마음이 변해서 안 오기로 한 줄 알고 다 집으로 들어갔고, 한 사람도 나와 있는 사람이 없었다. 운전기사는 죽을 고비를 겪으며 재를 넘어와 지친 상태에서 여관 잠이라도 자야겠다고 우리 내외와 짐을 내려놓고 가버리고 말았다. 한겨울 칠흑같이 어두운 밤중에 인기척도 없는 그 낯선 곳에서 우리 내외는 목회의 첫발을 내디뎠다.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고 있던 차에, 우리가 온 것을 알아차리고 한 사람 한 사람 나오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이삿짐을 날라주는 것이었다. 대강 짐을 내려놓고 눈이라도 좀 붙여야겠다고 누웠는데 방이 얼마나 작던지 다리를 쭉 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리를 쭈그리고 모로 누워서 잠을 잤다. 두어 시간 자고 새벽에 일어나 새벽기도회를 알리는 종을 치는데 하늘로부터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게 아닌가? 그 황홀한 감동을 억누를 수 없어서 눈바닥에 오체투지(五體投止)를 하고 한참동안 울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참으로 척박한 동네였다. 물을 댈 수 없어서 묵혀놓은 논다랑이 서너 마지기가 있을 뿐 모두 밭뙤기들이 헤어진 옷을 깁듯이 여기저기 그것도 거의 비탈밭이었다. 밭농사래야 감자, 고추, 메밀, 사료용 옥수수 등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인정이 많고 선량했다. 교인들은 아이들 빼고는 거의 여자 분들이었다. 유일하게 청년이 한 사람 있었다.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때 학생들이 한 명도 참석 못하는 경우에는 교독문을 읽는다거나 주기도문을 암송한다거나 하면 나와 아내 둘이 했다. 성도들이 성경 찬송가를 갖고 다니긴 하는데, 전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그래도 열심히 갖고 다닌다. 읽지도 못하면서 예배를 인도하는 전도사에게 강대상까지 다가와 찾아 달라고 한다. 성경이나 찬송가를 제대로 펴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 분들이 글이라도 읽고, 자기 이름이라도 쓸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야학을 시작하게 되었다. 할머니 두 분과 문제의 지정자 성도가 정식으로 입학을 했다. 다른 분들은 전도사 내외에게 창피를 당할까봐, 또 이제 늙어서 뭘 배우겠냐고 별로 호응이 없었다. 세 사람으로 야학이 시작되었다. 예배가 없는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 글을 가르쳤다. 교재는 창세기였다. 먼저 큰 소리로 한 줄씩 따라 읽게 하고 한자 한자 쓰게 했다. 숙제도 내 주었다. 공책에 그 날 배운 것을 한바닥 써오게 했다.

할머니들은 침을 발라가면서 숙제를 해오고,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그런데 워낙 머리가 굳어서 한 자를 가르쳐주면 두 자를 잊어먹고 애를 먹였다. 나는 막 야단도 치곤 하지만, 아내는 답답해도 인내하면서 친절하게 가르쳤다. 그렇게 두어 달 하니까 다른 할머니들은 그런데로 글자를 깨치고 글을 줄줄 읽곤 하게 되었는데, 지정자 성도는 그중 제일 젊은 분이 보통 애를 먹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구제불능’이란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지정자 성도는 직업이 덕송분교 조리보조원이었다. 분교에서 초등학교 아이들 점심식사를 주는데, 정식 영양사가 있고 그 밑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보조원 역할이다. 그 일도 임시직이어서 매학기가 되면 보건소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아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검진표를 제출해야만 한 학기 그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지정자 성도는 동작이 굼뜨고 말도 어눌해서 평소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천덕꾸러기 신세인데, 가난한 과부고 불쌍해서 동네 사람들의 주선으로 그나마 그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었다.

봄을 맞아 새 학기가 되어서 지정자 성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선 보건소로 건강진단을 하러 가게 되었다. 그런데 전 같으면 여기 저기 물어보고 진료실이고 방사선실이고 찾아다녔을텐데, 가만히 방에 써 붙여 놓은 것을 보니 자기가 다 아는 글자가 아닌가? 그래서 난생 처음 자기 눈으로 글을 읽고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모든 검진을 받게 된 것이다. 검진을 끝내고 보건소 마당으로 나오는데 얼마나 감격했던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눈물이 봇물을 이룬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삶의 의미를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다.

잠시 후 마음을 진정하고 지정자 성도는 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생각하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달랑 동전 2백원이 들어 있었다. 그 길로 구멍가게에 들려 1백원 짜리 빵 하나와 사과 한 개를 샀다. 그리고 허위단심 십오리 길을 달려와 내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알렸다.

“사모님이요 사모님이요, 지가요 오늘 글자를 읽었대요! 지가요 남한테 물어보지 않고 방마다 찾아갔대요!”
“사모님이요, 증말 고맙대요. 전도사님 사모님, 정말 고맙대요.”

내 아내의 전언에 의하면 완전 눈물범벅이 되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데, 그 얘길 듣는 아내와 부등켜 안고 울었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읍내에 볼 일이 있어 외출을 하고 해거름이 다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내는 상기된 표정으로 그 얘길 꺼낸다. 마침 그날이 수요일이었다. 아내의 얘기를 다 듣고 나자 곧 수요일 기도회 시간이 되었다.

저녁밥을 해 먹을 시간도 없고 어쩌나 해서 지정자 성도가 선물로 주고 간 사과와 빵이 생각이 났다. 그러나 빵 봉지를 꺼내자 빵을 먹기에는 게름직해 보였다. 겨우내 진열장에서 얼었던 것이 봄이 되자 녹아서 크림이 새어나와 뭉개져 있었고 유효기간도 두어 달이 지난 것이었다. 먹을 수가 없었다. 사과는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아내와 나는 사과 하나를 쪼개 나눠먹었다.

그리고 수요일 기도회를 인도하러 강단에 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정자 성도가 맨 앞자리에 나와 예배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찬송을 하려고 찬송가를 펼치고 지정자 성도와 눈이 마주치는 시간, 나는 전기에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전율했다. 그때 나는 분명 지정자 성도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비쳐진 예수님의 잔상(殘像)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그 후 그 신비한 경험을 한 번 더했다.

지정자 성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주체할 수가 없었다.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되었다. 지정자 성도는 전도사 내외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여 최선의 선행을 하였는데, 나는 진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정자 성도의 그 고마운 마음을 외면한 것 같아 너무나 죄송했다. 그 때 기도회를 어떻게 인도했는지 모르겠다.

▲박철 목사. 교회마당 앞에서
그 때 나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삶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은 바로 이런데 있는 것이구나 하고 실감하게 되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이 화려한 껍데기에 둘러쌓여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작은 것을 소중하게 볼 줄 아는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목회자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깊은 깨달음이었다. 지금도 나는 목회 초년병 시절, 지정자 성도의 눈길, 마주침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삶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력으로부터 전해지는 압박감이나 또 나도 모르게 ‘성장’이라는 유혹에 빠질 때마다 ‘이러면 안되지’ 하며 나 자신을 초발심(初發心)의 상태로 추스르게 하는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바로 그 때였던 것이다. 이미 하나님 나라에 먼저 가 계실 지정자 성도, 그 분이 보고 싶고 그립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나를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박철 목사 / 지석교회, 시인.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