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수영로교회에서 열린 목회자 리더십 세미나에는 등록인원만 400명이 넘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뉴스앤조이 김종희

예장합동 목회자 모임인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 옥한흠 목사) 산하 부산울산경남지역 협의회(회장 김태우 목사)는 2월 17-19일 부산에 있는 수영로교회에서 '성장하는 교회에는 성숙한 리더십이 있다'는 주제로 목회자 리더십 세미나를 열었다. 워싱턴에서 목회하는 김원기 목사가 주강사를 맡았고, 정필도 목사와 옥한흠 목사가 특강했다.

다음은 옥한흠 목사의 강의 '설교와 리더십'을 정리한 글이다. 옥한흠 목사는 교회갱신은 설교갱신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했다. 설교라고 하는 도구를 통해 교인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에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을 설교에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옥 목사는 설교자가 취해야 할 태도로, 직업의식을 버리고 소명의식을 가지라고 했다. 또 남에게 설교하기 전에 나에게 먼저 설교하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억지로 들어주는 설교가 아니라 자연스레 들리는 설교를 만들라고 주문했다.

이날 강의에서 옥한흠 목사는 주로 설교자의 태도와 자세를 강도 높게 주문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실감 있게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어떤 설교가 필요한지, 교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돼야 하는지, 설교에 담아야 할 내용에 대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대목은 옥한흠 목사에게 주문할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리더십을 이어나갈 후배 목회자들이 스스로 몸부림치며 만들어나가야 할 과제일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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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는 리더
▲설교갱신을 통한 교회갱신을 역설한 옥한흠 목사. ⓒ뉴스앤조이 김종희

교회 안팎으로 리더십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들은 대부분 리더십에 관한 것들이다. 그만큼 연구가 활발하다는 뜻이다. 교회에서도 과거 어느 때보다 연구가 활발하고 책도 많이 나오고 있다. 국가, 기업, 교회 등 어느 곳에서나 어떤 지도자가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조직의 생명이 좌우된다.

리더십이 잘 발휘되면 조직이 성공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다. 어느 조직이든 리더에 대한 요구가 점점 냉혹해지고 있다.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겼다가 좋은 결과가 없으면 사정없이 끌어내린다. 그러나 좋은 결과가 나오면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다. 그러니 리더십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는 리더다. 우리 자신을 갈고 닦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기도만 많이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존 맥스웰은 "리더십은 영향력이다"라고 말했다. 리더십은 지위가 아니다. 영향력이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만큼 효과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는 없다. 한정된 자기 교인에게 가장 정확하고 확실하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가지고 있다. 목회자의 영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채널은 바로 설교다. 교인들의 의식세계, 영적 세계, 일상생활에 가장 깊이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래서 설교가 중요하다. 교회는 설교와 함께 서기도 하고 설교와 함께 쓰러지기도 한다.

리더십의 가장 좋은 도구, 설교
일주일에 서 너 번 하는 설교를 1년, 10년, 20년 듣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의 삶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끼치겠는가. 설교가 교인들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력을 끼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데이터가 있다. 바로 설교를 듣는 청중의 태도다. 청중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설교는 주님이 인간에게 맡겨주신 가장 영광스럽고 고귀하고 기쁜 사역이다. 주님은 설교라는 귀한 보배를 질그릇과 같은 나에게 담아서 자기 나라를 확장하고 완성하는데 사용하신다. 필립스 브룩스는 "설교에 기쁨과 소망을 가지라.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신다. 설교자로 부른 하나님은 우리가 쓰임 받지 못할 자리로 넣지 않으신다. 설교자는 자기 일을 철저하게 즐겨야 한다. 이것은 성공하는데 필수적이다. 설교를 즐길수록 더 잘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아직 들어야 할 최상의 설교를 듣지 못했다. 한순간이라도 설교자의 사역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설교를 즐길수록 더 잘 할 수 있다'는 말은 100% 진리는 아니지만 음미할만한 말이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항상 설교를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설교를 즐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설교가 전적으로 복음만 전하는 일이라면 그건 진짜 기쁜 일이다. 그런데 설교는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보듯, 성도로 온전케 하기 위해 책망도 하고 의로 교육해야 한다. 목회자 입장에서 어느 쪽에 비중이 있겠는가. 후자에 약 80% 정도 비중이 갈 것이다. 온전한 삶, 온전한 인격을 위해 교훈하고 책망하고 교육해야 하는데, 설교를 즐길 수만 있겠는가.

설교, 즐길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뉴스앤조이 김종희
아이 낳는 여자들을 보라. 해산의 기쁨도 있지만 동시에 양육의 수고와 눈물이 있다. 설교도 똑같다. 필립스 브룩스가 설교를 즐기라고 한 것은 다른 차원의 얘기일 것이다. 그 역시 설교를 즐기기보다는 힘들어했다. 단순히 설교 그 자체로는 즐거움에 한계가 있다. 눈물과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 설교다. 설교를 하면 할수록 고뇌가 많아진다. 할수록 겁이 나고 무서워진다.

루터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루터는 사역 초기부터 죽을 때까지 34년간 4천 번 이상 설교했다. 건강이 나쁠 때도 한 해에 200번 이상 설교했다. 루터는 "설교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선한 양심을 지니고 있다면 설교보다 수레를 끌고 돌을 운반하는 것이 더 낫겠다. 설교자는 너무도 괴롭다. 저주받은 악마가 설교자가 되어야지, 선한 사람은 설교자가 되면 안 된다". 루터가 왜 이런 고민을 했는가. 자신의 설교를 그렇게 많이 들은 교인이 영적으로 생기가 없고 불신자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설교를 중단하기도 했다.

청중들의 삶에서 변화가 안 보일 때 설교자의 고통은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고뇌를 안 해도 되는 입장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런 고뇌를 하는 예민한 양심을 갖고 있는 설교자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다.

설교는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설교가 교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은혜 받았습니다" 하는 상투적인 인사에 속으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인사가 아니라 변화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삶, 온전한 행실, 온전한 인격. 자기 잘못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있는지, 가치관이 성경적으로 바뀌고 있는지, 사고가 기독교적으로 재조정되고 있는지 민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고 고치는데 어찌 눈물과 고민이 없겠는가. 증거가 나타나야 영향력 있는 설교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정말 어렵다.

교인들이 설교를 듣는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들어주는 것이다. 그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놓고 고민해야 한다. 설교의 능력은 설교의 내용보다 청중의 반응에서 찾아야 한다. 지금 설교자들은 위기를 맞고 있다. 아무리 설교해도 사람들에게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절박감과 절망감이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신자나 불신자나 삶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주일에 열 번 이상 설교를 들었으면 사회 문화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데 거꾸로 상대주의적 문화와 가치관이 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내게는 아들이 셋이 있다. 아이들에게 목사 되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다. 목사의 직분은 성스럽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다. 1년에 2천 명이 사랑의교회를 통해서 예수를 믿는다. 제자훈련을 통해 삶과 가치관이 바뀌고, 젊은이들이 비전을 품는다. 깨진 가정이 회복된다. 목사가 아니었다면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자녀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설교 때문이다. 설교는 진짜 못할 일이다.

내가 설교하려면 내가 먼저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남을 가르치는 것만큼 나를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잘 안 된다. 어떤 때는 위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 보기가 제일 부끄럽다. 자녀들은 모르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완벽주의라고 비판하지만, 설교자는 책임지는 사역자다.

교인, 듣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고 있다
교인에게 영향을 끼치려면 몇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첫째, 직업의식을 버려야 한다. 목사의 설교에는 직업적인 설교가 있고 소명적인 설교가 있다. 내가 설교를 얼마나 잘했나 묻고 모든 것을 평가한다면 그것은 직업적인 설교다. 소명적인 설교는 사람들의 변화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나를 묻고 모든 것을 평가한다. 직업은 열매와 성과에 관심이 없다. '설교 잘 했다'는 얘기만 들으면 된다. 하지만 잘 했다는 것과 변화를 일으키는 것과는 다르다.

교회갱신을 하려면 설교갱신을 해야 한다. 목회자는 솔직히 말하면 직업이다. 그걸로 먹고 산다. 아무리 그래도 설교자 입장에서 직업처럼 여기면 안 된다. 이건 소명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열매 맺는 삶을 사느냐를 고민하게 만든다. 설교를 칭찬하는 백 마디 말은 아무 소용없다. 소명 받은 자의 자세는 설교를 들은 사람이 삶에서 어떤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둘째, 나에게 먼저 설교해야 한다. 이것이 항상 걸림돌이다. 영원한 진리를 불완전한 인격을 통해서 전달해야 한다. 인격이라는 질그릇이 장애물이 된다. 자기는 안 하고 남에게만 강요하는 자가 바로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이다.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면서 남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다. 얼마 전 하늘나라에 가신 김인수 장로님이 생전에 자녀를 하나 입양했다. 홍정길 목사의 입양에 관한 설교를 들은 뒤 곧바로 실천한 것이다. 감동 받아서 아내에게 입양하자고 사정했으나 거절당했다.

설교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설교 준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원고를 지우는 경우가 있다. 나도 감당 못하면서 설교라고 무작정 얘기해서 되겠는가. 100% 옳은 태도는 아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태도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했으니까 내가 비록 따르지 못할지라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지키는 것만 전한다면 성경의 10%도 전하지 못할 것이다. 듣는 사람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가르치고 전해야 한다. 설교가 설교로만 끝나면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다 무책임하다. 그렇기에 설교의 영향력이 점차 왜소해지는 것이다.

셋째, 들리는 설교를 해야 한다. 들리는 설교가 있고 들리지 않는 설교가 있다. 들리는 설교는 안 들으려고 해도 들리는 것이고, 들리지 않는 설교는 억지로 들어주는 것이다. 옛날 선배 목회자들은 기도 많이 하면 들리는 설교가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금요일 저녁부터 강대상 밑에서 금식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면 성령의 능력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순박한 신앙이다.

들리는 설교는 시대마다 다르다. 농경시대와 도시시대, 무식한 사람과 유식한 사람, 온라인과 오프라인, 디지털과 아날로그 시대마다 다 다르다.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청중은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포장지가 달라야 한다. 위대한 신앙의 스승들은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과 감동에 힘입어 가르쳤다. 이런 은혜는 계승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치지 않은 부분을 놓고 우리가 씨름해야 한다.

정보문화가 워낙 발달했고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져서 사람들이 점차 둔감해진다. 귀가 막히고 감동이 없다. 그런 청중 앞에서 설교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들리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고민해야 되지 않겠는가.

산탄이 아니라 실탄 같은 설교
설교는 산탄이 아니라 실탄이다. 산탄과 같이 흩어지는 설교는 치명적인 효과를 주지 못한다. 그러나 실탄과 같은 설교에 맞으면 치명적인 효과가 일어난다. 실탄과 같은 설교, 들리는 설교다. 이걸 놓고 고민해야 한다. 절대로 자연스런 일이 아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귀에 들리는 설교를 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영향력이 있다. 변화가 일어난다.

설교 연구와 준비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한다. 강단에서 1분 설교하기 위해 서재에서 1시간 씨름해야 한다. 요즘 설교자들이 설교를 너무 가볍게 준비한다. 쉽고 재미있게 하는 게 은혜로운 것인 줄 안다. 그러다 보니 설교의 질이 떨어진다. 설교를 준비하는데 몸부림을 쳐야 한다.

우선 본문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 다음 본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진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성령이 주시는 음성에 민감해야 한다. 설교를 구성할 때, 어떻게 하면 교인들의 귀가 열릴까 고민하면서 수많은 자료를 참고하고 내 이야기처럼 구체화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긴장할 때와 풀어줄 때를 잘 체크해야 한다. 이런 것을 두고 고민을 해야 한다. 원고를 다 작성하고 나서도 다섯 번은 뜯어고친다. 그리고 내 맘에 담기 위해 애쓴다. 원고에 매이지 않으려고 가급적 본문은 암송하고 연출 준비를 한다. 요즘 젊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우습게 여긴다. 그런 버릇을 가진 설교자는 싹이 노랗다. 절대 장수할 수 없다.

우리 설교자는 엄청난 자리에 서 있다. 보람은 있으나 무거운 십자가의 자리다. 한국교회 갱신은 설교갱신에서부터 시작된다. 좀 힘들고 어려워도 기쁨으로 감당하도록 힘쓰고 애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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