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던 그날 내내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그룹 성경공부가 있었습니다. 11시, 1시, 3시로 연속되어지는 모임이었던 터라 3시 모임이 끝나고서야 지하철 참사 소식을 들었습니다. 엄습해 오는 내 마음의 큰 슬픔으로 인해, 50~60대 7~8명이 모이는 어느 선교회의 저녁 예배 참석을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모임 가운데 해야 할 설교 본문에 내 마음을 집중할 수 없었으며, 차량으로 1시간 이상을 이동하며 계속 듣게 되는 뉴스 속보 소식은 내 마음을 더욱더 가라앉게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 선교회는 제가 잘 아는 어느 여전도사님이 이끄시는, 10명이 채 되지 않는 중보기도 모임입니다. 지난해부터 이 모임에 참석하여 왔었는데, 사정이 생겨 지난 여름부터 참석하지 못하다가 이번 2월 모임에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모임을 할 가정에 들어서자마자 지하철 참사 소식에 관계된 여러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특별히 그 가정의 집사님이 평소 10시경에 중앙로 지하철을 이용하시는 분이라 더욱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소방서 식당에서 음식을 해 주시는 분이셔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더 많이 하셨고 우린 귀담아 들었습니다. 자기가 속한 소방서에도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대구 시내에 있는 모든 소방관들이 자기 소방서에서 밥을 먹는 듯 계속 사람이 몰리고, 자신 또한 하루 종일 그 사람들이 먹을 밥을 해대느라고 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귀를 의심케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이 저녁 예배를 위하여 겨우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왔다는 것입니다. 참석한 다른 어떤 분이 "그러면 이 모임 마치고 또 가야 되느냐"라고 묻자 "뭐 하러가! 이제 거기 있는 사람 알아서 하라 그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그 집사님에 대하여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그분 개인에게 어떤 큰 흠이 있는 어떤 분은 아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치매 증세의 시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수년을 섬기신 분이십니다. 성실한 삶으로 여러 개의 자격증을 소지하여, 아줌마의 신분으로 소방서의 당당한 공무원으로 취업하신 분이시고, 교회의 힘든 일을 억척스럽게 감당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결코 기도가 부족한 분도 아닙니다. 가정의 힘든 일이 있을 때, 눈물로 기도하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분은 분명 훌륭한 며느리였고, 어머니였으며, 교회의 집사였습니다. 어쩌면 모든 아줌마들이 본받아야 할 능력있는 아줌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현장을 두고 이 예배(?)를 위하여 도망쳐 왔다니...

분명 그것은 한국교회 전체가 가진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삼일운동 때 보여주었던 귀한 모습을 포기하고, 신사참배하며 민족을 배반할 때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기독교 정권이라 할만하였던 이승만 정권이 민족적 정통성을 부인하고, 친일적이고 또 (미국에) 사대적인 정권으로 나아간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군사독재의 압제 속에서 고통받는 노동자와 민주인사를 외면하고,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여호수아처럼 담대 하라고 기도한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세습 문화 속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권력화한 자신의 당회장 자리를 세습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한미간의 불평등한 군사조약과 불의한 재판에 대항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기필코 미국이 없으면 우린 살 수 없다라고 말하며 촛불시위를 반대하는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왜곡된 모습으로 뒤틀린 한국교회가 낳은 뒤틀린 기독인이 바로 그 집사님이셨던 것입니다.

그 집사님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교회에서 몇 번이나 설교했던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것이며, 그분이 믿고 따르는 많은 목회자 중 한 사람인 나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을 떠나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도대체 어디란 말입니까? 우리가 드리고자 하는 그 예배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이 있다"고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외치신 주님의 음성을 우리는 왜 이렇듯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닫혀버린 지하철 내에서, 고통과 두려움 속에 죽어간 분들과 그 분들의 유가족을 위하여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고 그 분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만으론 분명 부족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닫혀버린 공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이웃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라크라는 나라에 도대체 출구가 어디 있습니까? 전쟁의 두려움과 고통을 피할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는 우리의 북녘동포들에게 출구가 어디 있습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자신의 골방이 곧 닫혀버린 지하철이 되어버리는 장애인들에게 출구가 어디 있습니까?  이 땅의 수많은 고아와 과부들, 억눌린 자들... 그들에게 출구가 어디 있습니까?

교회가 그들의 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닫혀있는 자들의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하여 노력하되 때론 관공서에 압력을 넣기도 해야 하며 때론 우리의 곡간을 열어 그들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 차고 넘치는 청년들과 집사님들을 닫힌 공간에서 절규하고 있는 이웃에게 보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문을 열어 고아를 집으로 들여야 하며 기독 공무원들은 교회를 섬기듯 나라와 국민을 섬겨야 합니다. 가난한 우리의 이웃을 곁에 두고 끊임없이 교회와 교육관 짓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우리의 어리석은 행동을 멈추어야 합니다.

닫혀버린 지하철이 아니라, 닫혀버린 지구 공동체, 닫혀버린 인생에서 고통당하는 그들에게 우리 교회와 기독인이 출구를 만들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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