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다시 만나는 북한 여성들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91년 가을, 서울에서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준비를 위해 실무진에 합류하여 북에서 온 여연구, 홍선옥 등 북한여성들을 처음으로 본 그 순간은 내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당시 토론회에는 북에서 10여 명만 참석하였지만, 이번 10월 16일부터 2일간 금강산에서 개최되는 남북여성통일대회는 북의 최고 엘리트에서부터 예술공연에 참여한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300여 명이 참석했다.  

10월 15일 아침 7시 30분경 출발하여 속초에서 배를 타고 동해쪽의 북방한계선을 넘은 것은 오후 4시 45분, 금강산이 있는 장전항에 오후 6시에 도착했으니, 약 11시간이 걸린 셈이다. 북방한계선을 넘는다는 방송이 나오자 폭풍경보 속에서 배멀미에 시달리던 우리는 모두 밖으로 뛰쳐나갔다. 북방한계선을 바로 넘었다는 방송에 '통∼일조국' 박수와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며, 해안선 저쪽의 조용한 북쪽 산하를 바라보는 데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10월 16일 첫날은 개막식과 6·15공동선언 실천과 평화를 위한 토론회, 미술·수예품전시회, 유희·오락경기와 공동연회 등의 행사를 김정숙휴양소에서 가졌다. 북측의 여성들은 모두 고운 한복으로 차려입고 휴양소 밖으로 마중 나왔고, 우리는 한반도기를 흔들면서 '우리는 하나'라는 북측의 노래를 함께 부르며 운동장으로 들어갔다.

내가 처음 만난 북의 여성은 평양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여성이었다. 그는 토론회가 끝나고 미술·수예품 전시회에서 북의 어린이들이 그 자리에서 쓴 "통일어머니"라는 붓글씨를 얻어주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써 결국 내 손에 그것을 안겨줬다. 같이 간 동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산 것은 물론이다.

북에서 전시한 수예작품(만수대창작대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명품들이어서 남측 여성들의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나와 함께 다닌 북쪽 친구는 남쪽 여성 미술인들의 작품이 좀 어둡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반면 자신들의 작품은 주제가 분명하고 밝고 아주 사실적이라고 자부심 있게 설명했다. 나는 남측의 작품이 "남쪽 여성들의 삶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 아니겠냐"고 응수했다.    

북의 한 기자는 "다음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하는가"라고 집요하게 물었는데, 북측 여성들의 남에 대한 최대 관심사는 6·15 공동선언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대통령으로 뽑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의선 연결과 경제협력 등에 대한 북의 기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북측의 여성들은 개막식이나 토론회, 그리고 공동연회, 부문별 상봉모임 등에서 이구동성으로 "6.15 공동선언이 있었기에 이번 남북여성통일대회가 성사되었다"고 밝히고 "어머니이자, 누이, 딸인 여성은 역사의 한쪽 수레바퀴로서 통일과업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측 여성들이 여성을 역사의 주체, 통일로 가는 반쪽 수레바퀴, 어머니, 누이, 딸로서 이해했다면 남측은 분단과 반평화의 희생자로서 여성을 이해해 대조를 이뤘다.

북측 여성들에게는 '우리는 하나', '통일', '전쟁의 반대로서의 평화', '평화의 조건으로서의 자주'가 중심담론이었고, 남측여성들은 '평화 문화', '남북의 평화공존', '일상 속의 평화건설을 위한 여성평화운동'이 중심담론이었다.

솔밭에서 점심을 함께 하고 이어진 유희·오락경기와 다음 날의 합동예술공연을 통해서 우리는 북측여성들의 문화예술 수준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하나 같이 뛰어난 노래·춤꾼이었고, 이는 집단적 훈련을 통해 얻어진 것인데, 어릴 적부터 국가적 차원으로 보장된 탁아·교육시스템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남측 여성들 역시 자발적이고 즉흥적으로 이들과 함께 어울리고 또 응원에도 참여했다. 손에 손을 잡고 군중무용을 하면서 자매애를 나누었다.

금강산은 남쪽의 현대에 의해 개발되고 있는 중이지만, 북측에서는 환경문제를 엄격히 규제하여,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물론 옥류 같은 계곡물에 손 씻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미시령을 넘어 가면서 본 설악의 단풍과 구룡폭포로 이어지는 길목의 미인송 군락, 구룡연 계곡의 가을 금강산의 색(色)은 이번 통일대회에 보너스로 주어진 선물과도 같았다.

특히 약 20분 이상 이어진 미인송 군락은 쭉 뻗은 아름다운 소나무 군락으로 장백산과 시베리아 등 세계에서 세 군데밖에 없는 곳이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관으로 "너무 아름답다"는 말 이외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다시 김정숙휴양소 밖에서 있었던 환송식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다시 만나자" "통일을 위해 일하자" "감사하다" "건강하세요" 등등 아쉬운 작별을 나눴는데, 누구보다 이번 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남측의 젊은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이번 남북여성통일대회는 남측에서 다양한 계층(보수와 진보)과 다양한 세대가 참여하여 만났다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이제 남북 정부간 대화와 경제협력이 증가되는 시점에서 앞으로 민간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남북여성교류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평화를만드는여성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은 돌아오는 배 안에서 남측참석자들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수행하였고, 이 결과는 곧 발표될 것이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 이번 대회에 끝까지 아쉬웠던 점 하나는 7대종단 대표들 가운데 개신교 여성들의 참여가 너무 적었다는 점이다. 개교회나 개교단 차원의 북한지원은 가장 많이 하고 있지만, 전체 여성 차원에서 개신교 여성들도 한반도 평화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평화를 위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으는 데 함께 하길 바란다.  



2002 남북여성통일대회란?

10월 16일부터 17일까지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여성통일대회의 공식명칭은 '6.15공동선언 실천과 평화를 위한 남북여성통일대회'였고, 남측대표단의 표어는 '여성, 평화의 힘! -Women, Power of Peace!'이었다.

이번 남북여성대회는 지난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동경, 서울, 평양에서 4차례에 걸쳐 열린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를 역사적으로 계승하였다. 토론회가 분단사상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오고 간 민간교류였다면, 이번 금강산 여성통일대회는 최초로 남북 각계의 여성들이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남측에서는 대표단 350명, 기자단, 어린이 예술공연팀까지 포함하여 약 370명이 참석하였고, 북측에서는 대표단 100명, 참관인 200여 명 등이 참석하였다. 이번 대회는 2001년 평양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축전'에서 남측여성 대표단에 의해 제안되어 수 차례의 실무회담을 통해 성사되었다.

남측의 주관단체인 '2002 남북여성통일대회 추진본부'에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우리민족서로돕기, 민화협여성위원회, 7대종단여성위원회, 통일연대여성위원회 등과 함께 정치인, 경제인, 의료인, 학자, 예술인등이 참여하였고, 북측주최단체는 조선민주여성동맹, 조선여성협회, 민족화해협의회 여성부였고 북측에서 초청한 해외여성도 참여하였다.

이번 남북여성통일대회의 주요행사는 개막행사, 6·15 공동선언 실천과 평화를 위한 여성토론회, 수예 및 미술전시, 유희·오락 경기, 공동연회, 부문별 상봉모임, 합동예술공연, 폐막행사, 금강산 산행 등이었다. 남북은 17일 발표한 공동결의문을 통해 △남·북·해외 여성단체들은 조국통일의 새로운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통일운동에 적극 나설 것이며 △이 땅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와 안전을 이룩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여성들 사이의 연대와 단합을 적극 도모하는 한편 △남녀가 평등한 통일사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 글을 쓴 김정수 씨는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정책위원이며 성공회대 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