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진 선교사 ⓒ뉴스앤조이 신철민
세계의 종교들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곳 중에 하나가 인도다. 최근 구자라트 주 등에서 발생한 과격 힌두 훌리건과 무슬림의 충돌로 5천여 명이 사망한 사건은 아직도 인도의 종교분쟁이 활화산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틈바구니에서 기독교는 꾸준히 성장해 왔다. 300년간 영국이 지배할 때보다도 이후에 더 기독교인들이 늘어났다. 전체 인구의 2%인 2천만 명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 기독교는 달릿에게 외면 받고 있다. 권력화된 기독교 지도자들이 달릿의 현장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기독교인은 달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한국인 선교사들이 100명 이상 진출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호진 선교사(50)도 2001년부터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인생의 갱년기'에 들어 인도로 간 늦깎이 선교사의 눈에 비친 인도교회의 모습은 그리 희망적인 것은 아니었다. "지방의 경우 서너 교회를 한 목회자가 담당할 만큼 교회지도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러나 인도 목회자들은 교단에서 생활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좀처럼 몸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달릿 외면하는 인도교회와 선교사들

▲(자료제공사진)

정 선교사는 한국인 선교사들의 헌신의 비장함 뒤에 가려진 실상들도 꼬집었다. "100여 명밖에 안 되는 소수의 선교사들이 활동하지만, 자기 교파 교회만을 이식하고 확대하려고 고집하기 때문에 갈등이 끊이질 않습니다. 또 그들은 기후 조건이 좋고 자녀 교육이 유리한 대도시 주변에 몰려 비슷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정 선교사는 이러한 문제들을 야기한 장본인은 한국교회라고 지적한다. "넉넉지 않은 선교금을 주면서도 공적(功績)을 요구하는 한국교회가 변해야 합니다. 후원 받는 교회 눈치보느라 선교사들은 꼭 필요한 곳에는 못 가고 교회 수와 교인 수 늘리는 일에만 열정을 쏟습니다."

'선교현장이 필요로 하는 선교'를 외치는 정호진 선교사. 그는 어떻게 인도를 선교현장으로 삼고 떠나온 것일까? 80년대 그는 인도 선교와는 거리가 먼 대학 강단에서 활약하던 민중신학자였다. 그는 당시 신학계에서는 생소했던 사회과학적 분석틀을 이용해 구약성서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했는데, 그의 해석 방법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돌연 6년간의 강단학자 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현장에서 실천하는 민중신학자여야 한다"는 양심의 울림에 떳떳하고 싶었다.

거창으로 내려간 그는 목회를 하며 우리 의학을 강의하러 인근을 돌아다녔다. 어려서부터 허약했던 탓에 틈틈이 익혔던 우리 의학 실력이 사람들을 만나는데 좋은 매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3년만에 우리 의학 강의와 목회를 접고 말았다. 강의를 하는 것은 자신이 농촌에 내려온 목적과 다르고, 목사의 신분으로는 더 이상 농민들에게 다가가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진짜 농사꾼이 되지 않으면 농민들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맘먹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에게 앎으로만 존재하던 생명농법을 실천해 보였다. 실패를 거듭하며 이제 막 자리잡아 가던 98년. 그의 주변에 생명농업에 뜻을 같이하는 가정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서른 가정을 훌쩍 넘었다. 이들은 각자의 가정을 가지면서도 농사뿐 아니라 일상을 서로 의논하고 함께 결정하는 마을공동체를 실현해 갔다.

생명농법으로 인도를 푸르게

▲ⓒ뉴스앤조이 신철민

그의 농사법이 언론을 타고 세상에 알려지면서 대학은 그를 다시 불렀다. "유기농법·순환농법·자연농법 등은 모두 농사 방법론에 관한 것입니다. 생명농법은 이러한 방법론들을 추구하면서도 그 목적이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생명농법은 농약과 비닐·비료 등을 쓰지 않고, 농작물과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생명농법을 하기 위해서는 농작물과 소통할 수 있는 영성도 지녀야 합니다."

그가 연세대 대학원에서 생명농업 세미나를 이끌고 있을 때 남인도 교단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처음에는 한 해에 한 달씩만 와서 생명농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인도에 살면서 농민과 교회지도자를 교육하고 농사도 함께 지어보자는 권유로 변했다. 그 역시 한 달간의 인도 생활을 통해 달릿과 이들보다 더 어려운 처지로 살고 있는 소수부족 아디바시의 현실을 목격하고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가 맡은 공식적인 사역은 남인도 교단 산하 농업훈련센터에서 교회지도자를 교육하는 일이다. 이 농업훈련센터는 인근 4개 주의 중심지인 벨로르에 위치해 40만 평의 땅에 농민교육센터와 초등학교(200명), 중·고등학교(600명), 기숙사(200명), 농장(10만평) 등을 갖춘 대형 교육기관이다. 그러나 정부가 지원하는 학교와 독일에서 지원하는 기숙사만이 제대로 운영되고, 농장 대부분은 그대로 방치한 상태다. 교회지도자 교육과 농민 교육도 마땅한 교육자를 못 찾아 3년 전부터 중단됐다. 인도 교회지도자들은 농민들과 함께 대안적인 농업을 만들며 신학을 해온 그가 달릿을 깨우는데는 제격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우선 자신의 집을 주변 자연과 어울리는 흙집으로 짓고, 재생 불가능할 것 같은 농장의 토질을 조사했다. 올해는 영어와 타밀어를 본격적으로 익혔다. 이러한 과정이 무르익은 올해 9월. 드디어 3개월 동안 30여 명의 달릿을 농민지도자로 교육한다.

그는 달릿에게 깨끗하고 푸른 인도에 대한 꿈을 심어줄 계획이다. 수백 년 동안 나무 한 그루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한강 만한 강이 이제 다 말라 버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강과 샘들도 생활 오폐수로 오염된 인도. 이를 복원하기 위해 그는 나무를 심자고 제안할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시도했던 생명운동을 인도에서 꽃 피우고 싶다고 말한다.

"내가 존경하는 인도인 비노바 바베는 카스트의 최상류 계급인 브라민이면서도 하루에 한 두 시간은 달릿의 똥·오줌을 치웠습니다. 나는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똥·오줌 등 자연과 생명에 대한 달릿의 생각을 바꿀 계획입니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일 것입니다." 그의 제안에 인도는 어떻게 대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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