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사회참여 운동의 산 증인이자 87년형 논의의 핵심 인물인 구교형 목사가 강사로 나서 25년의 운동 역사를 훑고 복음주의 4인방 시대를 넘어서자며 열변을 토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기독청년아카데미' 봄 학기 기획 강좌로 진행 중인 '새로운 주체 생성을 위한 기독 운동론'의 두 번째 강의에 복음주의 사회참여 운동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구교형 성서한국 사무총장이 나섰다. 구 목사는 강의 전에 미리 '복음주의 사회참여 운동 25년'이라는 제목의 A4 네 장짜리 완성된 글을 강의안으로 보내 주었고, 당일에는 누런 종이 인쇄물들을 한 뭉치 잔뜩 가지고 왔다. 단단히 벼르며 준비를 제대로 해 온 모양이라, 더욱 기대가 되었다. 구 목사는 정정훈이 명명한 87년형 복음주의 운동의 3세대에 속하는 인물인데, 최근 여러 논의의 핵심에 있는 장본인이기도 했다.

구 목사는 먼저 "복음주의 역사와 운동에 대한 강의 제안을 받고 내용을 정리하면서 느낌이 이상했다. 내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오래 버텼구나"고 말하며 감회를 밝혔다. 이어 "사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어렵다"고 말하며, "나 같은 사람은 내용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습득하거나 분석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어떻게든 행동하고 앞으로 나가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라고 말했다. 분석가가 아닌 현장가로서 어떤 이야기든 가볍게 들을 수 없고,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강의를 위해 나름대로 정리해 온 것도 굉장히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일 수 있다는 자기 질문에 대해 구 목사는 "다른 입장과 생각을 가진 사람은 끝나고 나서 나중에 질문해서, (나를) 깨우쳐 주기 바란다"고 겸손하게 말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역사에 대한 강조와 함께 해방 후 한국 교회사 강의

먼저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떼었다. 역사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구 목사는 역사의 중요성을 세속사와 교회사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까지 두루 언급하면서 강조했다. 또한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현재적 사건에만 집중하고, 현재적인 평가에만 그치지만, 역사를 아는 사람은 현재의 모습만 보고 단정 짓지 않고, 오랜 궤적에 대한 인식을 가진다"며 역사 인식에 따른 삶의 차이도 설명했다. 이어서 "결국 역사로부터 이해하는 것은 미래"라고 말하며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경로"라고 말했다.

성경과 관련해서는 성경 자체가 경구나 교훈집이 아닌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성경이 하나님의 속성을 정리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삶의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교회사와 세속사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성경의 시대 배경이 되는 바벨론, 로마제국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가 나라가 망해 있는 조선과 너무 비슷하고, 선지서의 메시아 대망 사상과 계시록의 심판 메시지가 식민 지배 국가 일본에 위협이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비되는 총체적 복음 또는 사회참여 역사의 흐름은 면면히 이어왔다"고 말하며,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과 기장의 민중신학, 감리교와 토착화 신학을 예로 들었다.

이어서 "우리의 역사로 들어가 보자"며 개신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한국 현대사, 특히 정치사를 장황하게 다루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조선 말 개신교의 선교 초기 시대부터, 일제시대, 이승만 정부 시절 교회와의 밀착, 군사독재 정권 시절 기독교의 폭발적 성장, 최근의 교회 지도자들의 잇단 정치적 행보 등을 그 증거들로 대면서 매우 소상하게 설명했다.

구 목사는 기독교 신앙과 함께 수용된 근대적 교육, 의료 제도와 한글 교육은 민족의식을 다시 깨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아시아의 지배권을 유지하려던 주변 열강이 일본을 의식하여 조선 내에서의 억압 및 말살 정책을 묵인했을 때, 서구 제국의 선교 정책 및 선교사의 이해관계,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예수천당, 불신지옥'만이 복음으로 이해되어 한국 교회사 대부분의 시기를 지내왔다고 평가했다. 한편 친일파의 등장 배경을 다루면서 "세상 현실이 더 암담하고 바뀌지 않을 것 같을 때, 둘 중에 하나로 간다. 아주 극단적인 혁명주의자로 가든지, 투항해서 협조하며 그냥 사는 길로 간다"고 말했다.

해방 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형 교회의 친미 성향에 주목했다. 초대 대통령에 감리교 권사인 이승만이 당선되고, 이북 지역에서 월남하여 실향민 중심의 교회를 세운 영락교회, 충현교회, 경동교회를 예로 들었다. 개척 목사들은 "미국(프린스턴 신학교) 유학 등의 경력을 갖추면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정부를 뒷받침하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 한국 사회가 굉장히 어려웠을 시기에 국가를 통한 도움 이전에 교회를 통해 먼저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정권과 교회는 아주 밀착되어 있었다. 사상적, 종교적 성향이 비슷했고, 처지와 신분도 비슷했다"고 말했다.

또한, 80년대 통일 평화 운동에 대해서는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가장 잘한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북한과 대화해서 평화통일을 이루어가자는 88선언은 '그 당시에 할 수 없는 주장'이라고 말했고,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에큐메니컬 진영의 친북적 행동을 경계하기 위해 한기총이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구 목사는 "복음주의가 에큐메니컬 운동에 빚을 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 복음주의 운동과 로잔대회는 "잘 알리라 생각하고 빨리 정리하겠다"고 말하며 강의안을 읽어 내려갔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거리를 두며 신앙과 선교 운동에만 머물러 있던 국제복음주의 안에서도 몰역사적인 근본주의에 대한 차별화 등의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며 이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을 만들어 갔다. 1966년 미국 휘튼 선언과 1974년 스위스 로잔 대회로부터 2010년 남아공화국 케이프타운의 로잔 Ⅲ대회까지의 굵직한 역사를 훑으면서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조우 그리고 최근에 진일보된 생명과 생태의 의제를 설명했다.

복음주의 사회참여 운동의 세 단계 구분하여 면밀히 다뤄

구 목사는 복음주의 운동의 주체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교회에서 진행된 복음주의 운동, 70~80년대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학생 선교 단체 운동, 복음주의 사회 선교 운동이다. 이중에 "복음주의 사회 선교 운동이 거쳐 온 궤적을 살펴보며 앞으로의 과제를 나누겠다"며, 애초 본래의 강의 취지와 내용을 드디어 본격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먼저 한국 복음주의 사회참여 운동의 과정을 태동기, 잠복기, 분화와 연합의 시기로 나누어 각각의 특징을 분석했다.

또한 "80년대에 소위 보수주의 교회를 다니던 청년들에게는 일반 대학과 시대의 독재 저항과 시대적 모순 타파 등의 사회 참여적 현상에 공통된 부채 의식이 있었다"고 말했다. "기독 청년층과 소장파 지식인들은 진리의 매개체라고 믿어 왔던 교회가 기막히고 눈물 나는 시대 상황을 늘 목격하면서도 대답은커녕 그럴듯한 관심조차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구 목사는 "그러한 절망과 부채 의식에 공감하던 몇몇 젊은 목회자들과 그들이 지도하던 교회와 단체 청년들이 조직적 연대를 모색하게 되고, 교회를 박차고 나가 사회운동에 투신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복음주의권에서 고민이 일어났다"고 말하며, "그들은 86년 복음주의 청년 연합 운동을 시작으로 87년 대통령 직선제의 국면에서 공명선거 감시단 활동을 조직해 내었고, 발전하면서 이론과 운동에 걸쳐 제법 적지 않은 기반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구 목사는 마치 당시의 정황을 직접 보고 참여한 것처럼 매우 자세하고 면밀하게 설명했다.

이어서 남서울교회(홍정길)와 청년대학부(강경민), 사랑의교회(옥한흠)와 청년대학부(박성남)가 공명선거 감시단에 많이 참여했다고 소개했다. 구로희년교회와 희년선교회(이문식), 할렐루야교회 대학부(전도사 이만열, 청년 윤환철)도 언급했고, IVF와 고직한을 다루면서는 한기연과 갈라지는 결정적 계기로 강경대 치사사건에 대한 거리 집회를 설명했다. 또한 ESF와 김회권, 김호열도 다루었고, 겨자씨 형제단(박철수)을 소개했다. 겨자씨 형제단에 대해서는 "굉장히 독특한 조직이다. 선교 단체도 아니고 국제적 연대망이 있는 것도 아니라, 자생적으로 공부를 하다가 복음주의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단체를 만들었다"고 평가하면서 구 목사가 겨자씨 형제단의 여름 수련회인 아모스 스쿨에서 김진홍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신학교 입학을 결심했던 사실을 밝혔다.

아울러 서울대 기독학생과 기문연(최은석, 이종철, 최은상, 박정수, 김근주)의 활동도 자세히 소개했다. 이는 곧 정정훈의 분석에 대해 실제 현장에서 목격한 증인으로서 사실관계 조회를 통해 구체적인 증언 내지 부연 설명을 톡톡히 해내었다.

두 번째 단계인 잠복기 혹은 독자 생존기는 더욱 길게 다루었다. 이 시기에 대해 구 목사는 "87년 민주화대투쟁 이후 개량주의적인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정치권과 제도권 안에서도 일정 정도의 개혁과 민주화의 과제가 진전되고 대안 체제적 실험이 끝난 것처럼 여겨졌다"고 분석했다. 또한 "복음주의 운동권에서도 첫발을 막 떼려는 순간, 개별적 사안들에 대한 개선 활동을 넘어서는 체제와 국가에 대한 전면적 투쟁 운동 시대는 끝나 버린 것 같은 형국이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구 목사는 "1987년 창립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손봉호)도 이후 기독교인들의 윤리적 실천을 독려하는 데 집중했을 뿐 사회 전반의 구조적 모순을 다루는 운동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한 "부문 운동 단체라고 해야 토지, 주택문제에 집중한 헨리조지협회(1984년 창립, 현 희년 함께의 전신) 외에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나마 기독교인들의 활발한 참여 속에서 1989년 창립해 시민운동에 큰 진전을 이루었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서경석)과 기독청년학생협의회(박승룡, 김세준, 구교형)도 기억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한편 "그런 면에서 1991년 발간된 복음과 상황이 광범한 운동은 아니지만 사회, 구조, 현실참여를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나마 민족 통일 과제만은 여전히 남은 마지막 과업이라 여겨졌기에 90년대 새롭게 중요한 흐름이 형성된다"고 소개했다. 서울신대 85학번 김재오 전도사를 중심으로 시작한 외국인 노동자 피난처 운동이 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식량난 문제와 닿아 북한동포돕기운동과 탈북민돕기운동으로 발전하고, 여명학교의 모체가 됨을 소개했다. 또 한국 개신교 역사상 복음주의와 교회협측이 연합하여 일궈낸 가장 모범적 사례로 인정받는 남북나눔운동의 1993년 출범과, 이를 모체로 한 한반도평화연구원(이문식, 김영주, 홍정길)의 역사도 소개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발전 동력을 얻지 못한 대부분의 운동가는 할 일이 없어져서 뿔뿔이 흩어졌고, 남아 있던 운동가들도 남의 시장 같은 각 선교 단체 수련회나 선교한국대회의 주변부를 전전하며 자기 분야를 겨우 소개하는 고난의 생존 시대를 견뎌야 했다. 이 대목에서 구 목사는 "당시에 후배 세대가 조직적으로 길러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왕성하게 허리 역할을 해야 할 30대, 즉 90년대 학번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런 세대들이 복음주의 운동 진영에 쏘옥 빠져 있기 때문에 잠복기라고 분석한 것이다.

▲ 다양한 배경과 정황을 가지고 있는 20여 명의 수강생들은 자기 질문과 고민으로 진중하게 강의를 듣고 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불신으로 뉴라이트 주역들과의 결별

마지막으로 분화와 연합의 시기를 다루었다. 구 목사는 "90년대의 다소 암울한 시기를 거쳐 2000년대 들어 다시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진다"고 말하며, "별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90년대 내내 계속되었던 광범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세례를 받은 새로운 청년층들이 기윤실을 모태로 하여 공의정치실천연대(2000), 교회개혁실천연대(2002), 좋은교사운동(2000), 기독법률가회(1999) 등 새로운 부문 운동 단체들로 독립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동시에 "복음주의 젊은 활동가들도 새로운 매체인 인터넷 공간을 통해 본격적으로 자기 생각을 표출하였고, 그때 <뉴스앤조이>는 젊은 활동가들의 해방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복음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의식적 단절 작업"이 일어난다. 바로 지금의 뉴라이트 운동 주역들과의 결별이다. 구 목사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며 그 과정과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서경석과 김진홍에 대해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와 함께하는 복음주의 그룹은 아니었고, 70년대에 수도권 중심의 빈민 운동을 통해 사회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결합된 분"이라고 선을 그으면서, 41, 48년생이고 60년대 학번인 그들이 뉴라이트를 하게 된 공통적 기점은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불신"이라고 분석했다.

"80년대 광주를 거치면서 운동권은 체제에 대한 대안을 고민하고, 독재를 뒤에서 후원하는 미국의 실체를 알게 되어 환멸을 하게 되었던 반면, 60, 70년대 운동권은 체제에 대한 대항이 아니라 정권 교체와 타도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60, 70년대 주요 지도자들은 적지 않은 유혹, 논쟁과 인간적 갈등을 거쳐 80년대 운동권과 결별하였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구 목사는 성서한국의 태동에 대해 "소위 복음주의 사회 선교 진영이 개별 영역, 개별 단체, 개별 운동가들로 찢어져 시대적 과제와 공통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각개 전투에만 몰입해 있던데 연합 전선을 만들어 한국 사회와 교회를 새롭게 하자는 공유 의식으로 2005년 출범했다"고 소개했다.

복음주의 4인방 시대를 넘어서

구 목사는 한국교회의 성장기 이후를 분석하면서 또 한번 세대 구분을 했다. 역시나 3세대로 나누어 각 특징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1세대는 한경직, 조용기 목사 등으로서 부흥 집회형 분리주의, 은사주의가 주도했고, 기도원과 부흥회 운동을 통해 긍정적 사고방식을 불러일으켰다. 2세대는 복음주의 4인방(홍정길, 옥한흠, 하용조, 이동원 목사)으로서 개인주의적 내면주의로 성경 공부를 열심히 했던 80년대 이후 중산층 문화(개인주의, 성공주의)와 일치한다"고 분석하며 각 세대의 한계를 설명했다.

이어서 3세대를 언급하면서는 "그분들이 못 하셨던 것에 대해 울분을 토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무얼 하고 있느냐에 집중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4인방이 상징적으로 모두 은퇴한 시기에 다음 세대 목회자들이 2000년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며, "사상은 머리에서 생기지 않고 자기 운동을 해 본 경험으로부터 발생하는데, 실제로 자기 현장에서 자기 주도적으로 운동을 시작한 선배들과는 달리 지금 세대들은 은퇴하신 분들의 영향권 아래에 머물며 아직도 그 아류를 흉내 내고 있다"고 일갈했다.

이렇게 지금까지의 복음주의 사회참여 운동의 궤적들을 정리하고, 장구한 강의의 대단원을 장식하면서 구 목사는 앞으로의 전망 4가지를 풀어냈다. "교단 및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컬로서의 구분은 의미가 없고 곧 없어진다, 한국교회는 거품이 빠지는 시대에 접어들기 때문에 껍데기가 아닌 날것 그대로의 것을 분명히 보여 줄 수 있어야 산다, 기계적 구분이 아닌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연합 운동의 틀이 필요하다, 고대 자연의 극복과 중세 이후 인간화라는 시대적 과제가 이제는 생명과 생태로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4가지 전망과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기독교와 복음주의가 어떻게 그 내용을 담아내느냐를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강의를 마쳤다.

본질로 승부하며 생명의 과제를 실현하는 작은 교회의 연합이 대안

이후 쉬는 시간에는 가져온 낡은 자료들을 일일이 소개하며 수강생들에게 열람하도록 공개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들은 구 목사가 학부 시절부터 모아 온 아모스 스쿨, 복청학련 등의 여러 소식지와 학술지, 그리고 공정선거감시단 가입 원서 등이었다. 5분 정도 자유롭게 담소를 나눈 후 이어서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졌다. 교회 청년 2명과 목사의 실존적인 고뇌가 담긴 질문이 오고갔다.

서울반석교회 이00 청년은 "작은 교회에 대한 가능성은 크게 동감하지만, 아무래도 시장경제 사회에서 지금까지 누적된 재산을 가지고 교회가 해야 할 일과 반대되는 일도 있는 것 같다"며 절충안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물었다. 이에 대해 구 목사는 큰 교회와는 다르게 집에서 시작하고, 필요한 집기들은 사지 않고 임대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교회 공간을 열어 놓는 등 본인의 개척 교회 이야기를 길게 설명하면서, "결국 다른 것을 통해서 (대형 교회와) 차별화해야 한다. 또한 교회가 있는 지역의 다른 교회들과 바자회나 어르신 잔치 등을 함께하면서 연합 활동을 할 계획이다. 큰 교회가 한 방에 하는 것을 여러 교회가 힘을 합쳐서 대신하는 방식으로 돌파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 교회 청년들의 예리한 질문도 이어져서 강의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서울반석교회의 다른 청년의 질문도 이어졌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의 문제가 중요한데, 청년들이 일을 선택하는 판단 기준이 돈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고 실질적인 (육체적) 노동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요즘 직장을 그만두고 목공을 배워 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런 것들을 교회나 기독교 단체가 제시해 주고 인프라를 형성해 주면 도전할 청년들이 많을 것 같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에 대해 구 목사는 "방법은 많은데 시도를 안 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하면서 <세상을 바꾸는 1000가지 직업>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책에서 밝히듯 이웃을 도우면서 돈도 버는 일들이 많다. 앞으로는 돈과 가치 추구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며, 사회적 대안 기업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공동체성을 띄고 있는 작은 교회들의 연합"이라고 답했다. 또한 "앞으로의 세대는 생명, 생태로 가야 하기 때문에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에 관여되는 일을 하는 게 좋다. 텃밭 등으로 자생하면서 다른 쪽에도 영향을 주면 좋겠다"고 답했다.

마지막 질문은 지역 교회를 개척하여 20년 동안 목회하고 있는 한00 목사였다. "종교개혁 이후 각 대륙마다 부흥 시대가 끝나면 새로운 영성 운동이 일어났듯이, 새로운 전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성적인 새로운 태도가 나와야 한다. 또한 과거 있었던 학문적 시행착오를 교회사적으로 정리하고 인문학적 시각으로 가져가면서 깊은 영성적 토대로 함께 가야 한다"는 등의 의견을 길게 제시하면서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을 요구했다. 구 목사는 "덧붙일 말 없이 공감하지만, 섣불리 역사와 변화에 대한 전망을 할 만큼 밝지 못하고 목회에 전임을 한 기간이 길지 않아서 쉽게 답하기 어렵다"면서, "그동안 운동 현장에서 아닌 것을 많이 보면서 적어도 그런 흉내만 안 내도 되겠다는 느낌은 있다. 그때그때 살다 보니까 잠깐 보이고 다시 안 보이다가 좌충우돌하면서 가는 것 같다. 같이 하다 보면 동역자들과의 과정에서 길이 발견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렇게 10시 반이 훌쩍 넘긴 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다가 마무리 발언을 하였다. 이 또한 미리 준비해 온 빽빽한 메모를 참고하며 마지막까지도 기염을 토해냈다. "논쟁 중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심은 하나님나라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과 전체의 좌표를 인식하면서, 놀라운 긴장의 변증법을 놓치지 말자. 현재성과 미래성, 인간이 해야 할 분투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긴장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런 것을 기독교가 이야기하려면 우리 자신이 예수 안에서 죽는 경험, 사는 경험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데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을 따라 비슷하게 말하려고 하지 말고, 생명의 복음이 무엇인지 깊이 인식하여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맡겨진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잘 감당하자"며 강의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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