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 김승범

무엇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입니까? 오늘 같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가 삶의 구석구석 파고 들어오는 현실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무척 어려워졌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묵상하고 그 아름다움에 도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33편을 통해 하나됨의 아름다움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하나됨이라고 하는 공동체적 아름다움이 아름다움 전체를 대변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지나치게 팽배해짐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의 가치가 무너져 가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됨의 아름다움을 깊이 깨닫고 실천함으로 세상을 변화시켜나가는데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공동체적 조명(1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다윗의 감격이 잘 담겨져 있는 글입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더 실감이 납니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여기서 선하고 좋다는 것은 가치에 대한 도덕적 평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즐겁다는 것은 감성적이고 미학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주로 감성적이고 미학적인 관점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마음을 이렇게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지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입니다. 다윗에게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공동체의 구체적 형태는 이 시의 저자가 다윗임을 감안할 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이상이 실현되어 가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도 여느 사회처럼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풍요함을 누리는 부자와 빚진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몸이 건강한 사람들과 다양한 병을 지닌 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도덕적으로 비교적 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유인이 있었는가 하면 사람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예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상극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서로 존중하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공동체적 이상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으며 공동체의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이제는 개인주의적 사고와 삶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개개인의 아름다움에만 정신을 팔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라게 되지는 않습니까?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나만 즐겁고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삶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기준은 인간관계를 삭막하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적당히 아니면 적절한 절차를 통해 이용해먹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청소년 성매매 행위도 두 사람간의 정당한 계약행위로 인정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청소년은 청소년대로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적절한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정당한 대가를 주고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개인주의에 빠질 때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대처 영국 전 수상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회란 없다. 다만 개인과 가정만이 있을 뿐이다". 대처가 복잡한 철학적 사상을 정치적 슬로건으로 만드는데 천부적인 재주를 지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좋은 예입니다. 근대국가 형성을 사회계약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설명하려고 했던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제를 이렇게 간단히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가정을 통해 태어난 개인이라는 것입니다. 사회는 본질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개인들의 편의를 위해 후차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는 이론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결국 사회를 실질적으로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주무를 수 있는 강자들의 권익을 극대화하는데 봉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결과는 불평등이지만 그것이 사회가 관여해야 할 정의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 불평등은 개인의 형식적 자유가 보장된 결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처 정권 하에서 빈부의 차는 극대화되었던 것입니다. 소위 대처리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가 뿌리내리는 곳마다 이런 현상이 예외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우등생이 되기 위해 발버둥쳐온 한국사회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강자는 자신의 능력과 성실함에 의해서 정당하게 힘을 축적한 것이고 약자는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 때문에 그렇게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주장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거짓된 신화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경제적 성취도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 외에도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떤 규칙을 가진 사회에서 경쟁하며 삶의 과정에서 어떤 여건을 만나게 되는가에 의해 매우 심각한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부자 집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사회에서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은 결코 정의롭지도 자랑스러운 것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이 그대로 수용되는 것은 강자들의 개인주의적 신화에 우리 모두가 세뇌되고 실정법의 힘에 의해 은근히 억압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예외적으로 어려운 형편 속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등장하면 그들의 예를 널리 선전하면서 누구든지 노력만 하면 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허위를 퍼뜨림으로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자책과 절망의 구렁으로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사회구조 아래서 모두 함께 가난의 굴레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원천적 부자유를 경험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사회를 이렇게 좀먹어가고 있는 왜곡된 이기주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잃어버린 노래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형제들이 평등하게 연합하여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회복하고 그 아름다움을 힘껏 노래하는 장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어떤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인가부터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미국에서 건너온 교회성장론 중에 '동질단위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슷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목회하게 될 때 교회는 힘있게 성장하며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지성인들과 부자들만 주로 모이는 교회도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는 한목협 수련회에서 주제강의를 하며 자신은 '전형적인 압구정동의 현대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표현을 빌리면 노숙자처럼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던 예수님이 과연 그런 교회에 초신자로 등록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듭니다. 아마 이런 교회일수록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되는 것을 강조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릴 것 다 누리며 사는 가진 자들의 기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아픔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이용해서 자신의 교회를 강화하는데 기막힌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단한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의 화려한 아름다움에 감탄합니다. 아름다운 건물, 매끄럽고 품위 있는 설교,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우아한 성도들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나는 언제나 저런 교회를 한번 만들어 볼 수 있을까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그러기에 작은 자들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음지에서 말없이 수고하는 분들이 한없이 존경스러운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무엇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인지를 아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우리 모두 한국교회의 잘못된 분위기를 바꿔나가는데 정진합시다. 열정적으로 다윗의 노래를 부르면서 말입니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공동체적 아름다움의 특징들(2-3절)
시인 다윗은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기름과 이슬이라는 그림언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보배로운 기름
제사장 아론이 기름부음을 받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을 타고 흐르는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향긋한 기름 같구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이 첫째로 향기롭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양란을 선물로 받아 키워 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꽃 한 송이가 폈는데 그 향기가 온 집안을 진동해 그 아름다움을 만끽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도 그 모습에 따라 냄새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우리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감은 하늘을 찌르는 듯합니다. 국민의 고통은 안중에 없는 것은 물론이고 원칙과 철학도 없이 오직 정치적 힘 겨루기에 여념이 없고 자신이 이익에 따라 어디에 붙을 것인가를 계산하고 있는 모습들! 이제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말로도 성이 차지를 않습니다. 나라의 공공선과는 무관하게 비생산적 정쟁에 찌들어 있는 패거리 정치권에서는 추한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강원도 태백의 깊은 산골에 자리잡은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를 가보면 곧 향내를 맡을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예수원 원장 대천덕 신부님은 자신을 신부라고 부르지 말고 '형제'로 불러달라는 주문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성도들은 나이 드신 신부님을 차마 '형제님'이라고 부를 수가 없어 '할아버지'라고 부르곤 했다고 하죠. 예수원의 주인은 원장이 아니고 성령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서로를 진정으로 존중하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력하며 서로 모든 것을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이기에 그 곳에 가면 향기를 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도 신통치 않고 잠자리도 불편하지만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둘째로 제사장에게 부어진 기름은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됨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진정한 교회공동체와 세상을 구별시켜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세상과 본질적으로 너무나 닮은꼴이기 때문입니다. 재벌기업 회장이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듯이 초대형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줍니다. 정치인이 엄청난 불법자금을 들여 선거에 승리를 하듯 자금을 동원하여 총회장이 되려고 합니다.

세상이 개인주의적 성공을 추구하면 교회도 경쟁이라도 하듯이 하나님 축복을 더 많이 받아 성공하려고 합니다. 패자는 교회 안에서마저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맙니다. 교회에 드릴 돈이 없으면 장로가 될 자격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 다한 셈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존경받는 길은 간단합니다. 공동체의 하나됨을 회복하여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이슬
"헤르몬산에서 시온산 줄기를 타고 굽이굽이 내리는 이슬 같구나". 이슬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그 깨끗함에 있습니다. 나뭇잎에 송송히 맺혀있는 이슬은 떼 묻지 않은 깨끗함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된 공동체를 보고 있으면 인간의 마음에 붙어 있던 온갖 더러운 욕심의 때가 씻겨져 나간 것을 깨닫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깨끗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누가 더 크냐'고 싸우는 모습은 너무나 더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한 후 제자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자리다툼을 하지 않고 성도들을 말씀과 기도로 돕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영적 감화를 받은 3,000명의 제자들은 출생지역, 언어 그리고 재산 소유에 있어서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거의 완벽한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특히 물질을 아낌없이 서로 나누어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힘과 물질을 향한 욕심을 버린 깨끗함이 그 절정에 다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런 깨끗함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회복하여야만 합니다.

아름다운 하나됨은 하나님의 선물
"그 곳은 야훼께서 복을 내린 곳, 그 복은 영생이로다". 이 마지막 표현에서 다윗은 모든 사람이 풍성함을 누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인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축복은 다름 아닌 영원한 생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됨을 이룰 수 없는 것은 이 영생이 없기에 오는 불안함 때문에 자기를 지키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안한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영생을 누리는 것뿐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축복을 구해야 합니다. 자기 개인만의 성공을 구하는 축복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해 하나됨의 아름다움을 창조해 가는 축복을 간구하고 누리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박득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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