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요 3: 7-9)

지구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곳 중 하나가 바로 중동입니다. 언제든 폭발할 채비를 갖추고 있는 화산처럼 중동은 위기일발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중동 화약고의 위험을 충동질하는 갈등의 두 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입니다. 한쪽은 여호와를 추종하는 유대교, 다른 한쪽은 알라를 추종하는 이슬람교를 삶의 원리로서 내세우고 있습니다.

행여나 여호와를 믿는 유대교가 알라를 믿는 이슬람교보다 기독교에 훨씬 가까운 종교라고 믿지는 마십시오. 알라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아랍 말일 뿐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나 알라나 결국은 똑같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슬람도 유대인들이 따르는 아브라함과 모세를 추종합니다. 그들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히려 유대교가 예수를 무시하는 반면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유대교 보다 더 숭상하며(하나님의 사도 즉 선지자로서),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이 적힌 신약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합니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유대교보다는 이슬람교가 기독교에 대해 더 우호적이며 상통하는 점도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에 더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미국의 영향이 아닌가 합니다. 미국 언론이 중동을 보는 시각을 그대로 수용한 탓에 우리의 시각이 친 이스라엘 쪽으로 고정된 것입니다.
언론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 상황을 전하는 기사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팔레스타인의 자살 테러 와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
팔레스타인의 공격에는 항상 테러라는 말이 따라다닙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공격은 그냥 공격입니다. 테러라는 말과 공격이라는 말이 지닌 뉘앙스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테러는 비도덕적이고 무자비한 짓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무자비한 것으로 따지자면 사실 미사일과 탱크로 무장한 채, 돌멩이 던지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스라엘이 더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공격입니다. 그것도 보복 공격이랍니다. 자기가 당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라는 의미지요.

폭탄을 몸에 지니고 자폭하는 팔레스타인의 공격은 애처롭기 그지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미사일을 쏴대거나 폭격해대는 이스라엘 쪽과 비교해 보았을 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격은 끔찍스런 테러행위라고 보도됩니다. 물론 팔레스타인들도 이스라엘의 야비한 공격으로 죽은 사람들(민간인)에 대한 보복 공격을 하는 것이지만, 언론은 이를 외면합니다. 마치 별 다른 이유도 없이 엄한 사람들을 살상하는 것처럼 보도합니다.

안중근이나 윤봉길을 우리는 의사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일본을 공격했던 대한의 남아였습니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그들을 테러범으로 지목하고 처벌하였습니다. 힘없는 자의 공격은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처절한 저항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온갖 무기를 소유한 강자는 이를 테러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들이 무기로 퍼부어 대는 살상은 정당방어 내지는 공격 혹은 응징일 뿐이지요.

중동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땅의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이 이천 년 전 조상이 살던 땅이라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면서, 그곳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이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같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권이 팔레스타인의 편을 들고나서면서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불거졌습니다. 미국이라는 최대의 강대국이 후원하는 이스라엘이 월등한 무기를 바탕으로 아랍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은 나라(땅)없이 떠도는 유랑민이 되었습니다.

2천 년전에 조상이 살았다는 것을 이유로 땅을 내놓으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비난하자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것이므로 당연히 이스라엘의 차지다.

2천 년이지만 어쨌든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판단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일까요? 더 나아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므로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역정을 드는 것이 진정 하나님의 시각과 일치할까요?

성경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혈통이나 핏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핏줄을 통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혈연에 의거한 패거리 조성을 의도하시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선택했다는 것이 신분 세습하듯이 핏줄을 통해 전달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중요한 것은 핏줄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널려 있는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 즉 선택한 백성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만스레 스스로를 선택받은 자의 후손이라고 내세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택받은 자의 후손은 없습니다.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을 따름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는 가차없이 불길 속에 내던져 버린다니 두렵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요한이 대답합니다.
-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한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 중 하나가 굶주리고 있으면 당연히 다른 형제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하듯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당연히 이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나눔이라는 열매를 통하여 비로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라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애굽에서 도망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 생활에서는 벗어났으나 광야에서의 유랑 생활로 지친, 머무를 땅도 없는 떠돌이 신세였습니다.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이 땅이 없는 자들이었기에 그러했습니다. 그 땅에 이미 살던 자들은 마땅히 땅이 없는 자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힘센 자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약자입니다. 이스라엘도 땅이 필요하고 팔레스타인도 땅이 필요합니다. 화해와 타협에서 힘센 자가 한 발 물러서는 것이 하나님의 법에 맞습니다. 어쨌든 강한 군사력으로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이, 이제는 기득권자 즉 강자의 입장에서, 떠도는 자 즉 약자인 팔레스타인을 포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들을 노예의 상태로 전락시키거나 영구히 내쫓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과 함께 동등한 주체로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감당해야 할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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