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사도행전의 앞부분(2:37~45, 4:32~35)을 초대교회에 나타난 교회의 물질적 섬김과 나눔의 정신으로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기독교의 회복이나 순수성을 말할 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일시적이고 전환적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완벽하거나 이상적인 모델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초대교회의 시대를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을 경계하기도 합니다.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20세기 오순절주의도 초대교회로의 성령 강림과 기적과 치유와 관련된 지속성을 강조하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오순절 사건을 종말론이나 구속사와 관련하여 일회적인 것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의 첫 장면을 오순절에 모였던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한 사건이나 성령의 강림으로 방언하던 사건들만을 기억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행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행전의 교회론은 성도의 물질적 교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사도행전에 나타난 생각들은 누가복음과 연결 지어 이해해야 합니다. 누가는 두 책에서 재물의 공유가 신실한 이스라엘의 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 복음의 구현(2:37~45, 4:32~35)

우선 2장 37~45절을 살펴봅시다. 많은 사람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베드로의 복음 제시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습니다. 게다가 놀랍게도 하루에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삼천 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금 상황에 비추어 보더라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교회의 사중적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특징은 교회에 임한 성령 역사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거의 매일 모인 것처럼 보이는, 예루살렘의 신앙 공동체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 코이노니아-헌금, 공동체적 식사, 기도. 이 네 가지 요소가 서로 별개의 개념들이 아니라, 밀접한 연관성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모든 요소에 적용되는 공동체적 요소를 말해줍니다(2:37~45).

44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고 45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

다음은 4장 32~35절을 살펴봅시다. 이 말씀의 배경은 사도행전 4장 29~31절입니다. 즉 사도들이 모여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결과로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2 신자들의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누구도 자기 소유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었다. 34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으니, 밭이나 집 있는 자는 그것들을 팔아 그 대금을 가져다 35 사도들에게 맡겨서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특징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재화 보관과 배분을 사도들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발적인 분배의 일을 다루는 2장 44~45절은 오순절 사건의 일부이며, 4장 32~35절은 뒤이어 나오는 바나바의 온전한 헌신(4:36~37)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불완전한 헌신(5:1~6)의 대조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합니다. 게다가 바나바의 경우는 그가 일시적으로 구제와 교제의 헌금을 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자비량으로 선교 여행을 다녔던, 사도바울과 함께 구제/교제 헌금을 모금하고 전달하였던 사람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그의 행위도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통한 성령의 강림과 복음 전파와 기적과 치유는 신앙 공동체 내에서의 교제와 나눔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제자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교훈에서는 그러한 원칙들이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방문과 질문에 대해서 자기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팔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도록 요청하신 적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발견하는 사도행전 성령의 일들은 구약의 헌신과 나눔과 교제의 법의 확장과 성취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좁은 의미의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든, 넓은 의미의 '사회 구제와 정의 구현'을 위한 것이든, 상호 헌신과 구제를 위한 헌금과 공유는 말 그대로 '일부를 떼어 주는 것'으로 완성될 수 없는 사랑의 율법인 것입니다(마찬가지로 구약 율법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비교:신 15:4). 이것은 구약 율법의 완성이었으며, 신약의 신앙 공동체가 구약의 선지자(모세)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도 몸을 전부 바치지 않으면, 재물을 전부 바치지 않으면, 그것은 헌신과 헌금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의 법칙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온몸을 바치는 자기희생을 하셨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첫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유대인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구별된 공동체나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구제와 교제의 정당성이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교훈(디다케)과 교제(코이노니아)와 떡을 떼는 것과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은 단순히 식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성찬과 교제의 식사가 분리되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떡을 떼고 교제를 나누었으며,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서 공적 예배와 증거를 위하여 정규적으로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가 '물건의 공유와 분배'입니다.

초대 신앙 공동체 공유의 정신은 누가의 '공산당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 정신은 초대교회의 이상주의적인 묘사로만 그치는 것도 아니지만, 혹은 임박한 종말을 대비하여 모든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치고 집단생활을 하라는 이단 종파의 주장도 아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예수 부활의 증거가, (교회당 건축에 집중된 것도, 복을 많이 받아 벼락부자가 되거나,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내라는 증거가 되거나, 성직 매매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의 표로써,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말과 성도 간에 행해진, 즉 부유한 성도가 가난한 성도를 돕는, 물질적 교제(코이노니아)가 원활해졌다는 의미이며, 지속해서 행해졌다는 점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재정 관리의 예는 이미 쿰란 공동체에서도 발견되며 헌금의 출연(出捐)과 분배(分配)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약시대의 공동체의 특징이기는 했지만, 구약과 그리고 당대의 유대인 공동체들과의 연속성의 측면에서 볼 때, 그럼에도 예수의 공동체 정신은 사도들과 그를 따르던 헌신적인 제자들에게서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교회)에게 확대되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요소가 예수 공동체의 삶을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와 구제, 혹은 봉사와 가르침에 대한 우선순위나 성속(聖俗)의 구분을 갑론을박(甲論乙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첫머리에서 언급되고 있는 예수 공동체의 한 모습, 즉 현재 한국교회가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헌금이 교회 건물을 위해서 바쳐졌던 것이 아니라, 성도가 구제하고 교제하는 데 쓰였다는 말은 이미 한국교회에서 이상한 소식이 되었다는 점은 슬픈 일입니다.

구제와 교제의 기쁜 소식은 예루살렘에 있는 예루살렘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들과 헬라 지역에서 온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예수살렘의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재산을 가진 자들이 무소유가 될 때까지, 문자적으로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과 '모든' 재산을 나눠 가졌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했다면, 예루살렘 공동체가 모일 장소(집)도 (이미 팔아서 환전하였기 때문에) 없었을 것입니다(예, 행 12:12).

또한, 그러한 의견의 근거는, 바나바(긍정적인 예)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부정적인 예)의 경우처럼, 소유물(의 일부)을 팔아 아낌없이 판 전부를 바치는 행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앙 공동체 내에서의 교제가 실제로는 무소유보다는 공유의 법칙이었을 겁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에서 소유권의 이전이나, 그러한 일에 따르는 결과물 혹은 수입에 관한 규정이나, 한 사람의 소유를 공동체에 기부 채납하라는 요구가 없었다는 점과 기독교인들의 관행상 자발적이었다는 점 △바나바의 경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 △과부들을 도와주었을 때 △마리아의 경우(12:12f.).

이러한 섬김과 구제의 사역은 나중에 구제의 사역자들을 따로 뽑아야 할 만한 상태로 악화(?)하기도 했지만, 교제와 구제의 사역이 초대 공동체의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일로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의 봉사에, 그리고 7명의 별도로 특별하게 위임받은 사역자들은 구제와 교제의 봉사에 힘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이들을 집사(명사형)로 부르지 않으며, 봉사의 일을 하도록(동사형) 임명되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이 일곱 명이 전통적으로는 집사였다고 알려졌지만, 이들은 한국교회의 집사는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일곱 명을 다른 일로 바쁜 사도들을 대신하여 구제와 교제의 사역을 위하여 선택되었지만(헬라 출신 유대인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救濟]'에서 배제되는 문제), 바울서신 등에 등장한 사역자들(디아코노이)은 반드시 구제와 교제 사역에만 전념하고 말씀과 전도 사역에서는 배제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바울서신에서 보면, 이러한 사역자들이 바울의 동역자들로서 여러 가지 사역에 동참했다는 표현이 나온다는 점에서 바울의 중요한 사역들 가운데 하나로 지속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

사도행전 초두에 나오는, 성령 강림 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공유와 구제의 실제 모습은 구약 정신의 연장이었지만, 성령의 부어 주심에 따라 종말론적으로 수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간단하게 언급하였지만, 초대교회의 관행이 윤리적이든, 종말론적이든 간에, 일시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신학적 특징으로서 초대교회에 뿌리 깊게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우리 가운데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자주 교회나 특별 집회에 모여서 성령이 임하여 기적이 일어나고 병이 낫고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기를 구하고 있지만, 초대교회처럼 공유와 구제의 능력이 불 일 듯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 가운데 기적이 혹은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아닐까요. 종말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와 관련된 성령의 크신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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