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대 기독교계 내에서의 몇몇 이들은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해 염려와 불안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한국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 공동체들이 성경이 말하는 본질로부터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한국교회는 더욱더 성경이 말하는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을 쳐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소수이지만 어떤 이들은 우리 개신교회가 다시금 기억해야 할 대상들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 한 무리가 바로 '아나뱁티스트'입니다. 과거 이들은 기존의 개신교회들로부터 이단시되어 정죄를 당한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오늘날 이 시대에 그들의 이름이 다시금 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들을 잔인할 정도로 핍박한 개신교회 내에서 말입니다. 물론 그들의 이름을 다시금 들고 일어서는 이들은 개신교회 내에서는 아직 극소수이며, 나아가 이들은 간혹 자신들이 기존의 정통 세력들로부터 중상모략을 당할 수도 있음을 간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어떠한 면에서 이들은 모험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한국교회 내에 변화와 개혁을 서서히 실행하는 중이라 판단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나뱁티스트'들은 종교개혁 당시나 현재에도 성경을 직접 실천하는 사람들이요, 급진적인 제자도를 추구하는 이들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말씀을 그대로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아가 이들은 나눔의 공동체를 실천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무저항 운동을 신실하게 펼쳐나가기를 소망하는 이들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단순한 생활 방식을 따르는 이들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 때문에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이들이 '아나뱁티스트'의 전통을 다시금 현시대 가운데 되살려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히 '아나뱁티스트'들은 '크리스텐둠(기독교 국가 체제)'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들이었습니다. 더욱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크리스텐둠이란 기독교를 국교화한 콘스탄틴 황제 이후의 가톨릭과 가톨릭으로부터 개혁을 추구했던 종교개혁자들(루터, 칼뱅, 츠빙글리 등)의 반쪽짜리(?) 개혁을 정당화하며 기독교 국가 체제를 지향해 온 기독교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아나뱁티스트'들은 단순히 기존의 정통 기독교회가 주장하던 유아세례를 아무 이유 없이 반대했던 무개념의 소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기독교가 성경이 말하는 초기의 기독교, 즉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사역(예수 운동)과는 달라도 너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에 격분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주후 4세기에는 로마제국 내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하면서 기독교는 로마제국 내에서 국가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기독교회는 점점 더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국가와 교회가 결합함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기독교 국가 체제를 수립하게 됩니다.

이제는 교회가 세상의 모든 권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던 자들이 이제는 세상을 제압하고, 탄압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즉 세상 속에서 군림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와 같은 '크리스텐둠'은 기독교회 내에서 타이틀만 그리스도인인 이들을 무작위로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회의 모습에 종교개혁 당시의 '아나뱁티스트'들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보기엔 종교개혁자들의 교회 개혁 역시도 결국에는 정치적인 권력에 기대어 나온 개혁이었기에 성경에 대한 솔직한 발언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즉 종교개혁자들의 교회 개혁은 크리스텐둠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아나뱁티스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개혁보다도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며, 더욱더 완전한 개혁을 실행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이들은 교회가 국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국가의 정치적 권력을 뛰어넘어 이들의 폭력성과 잔인함에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다시금 과거 종교개혁 당시의 '아나뱁티스트'들의 신앙심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크리스텐둠'을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변의 개신교회들은 '크리스텐둠'을 옹호하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들의 관점에 변화가 찾아와야 합니다.

어릴 적부터 붉은색의 안경을 끼고 자란 사람은 세상이 온통 붉은 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세상이 붉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이 붉은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끼고 있는 안경을 깨끗하게 닦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안경을 벗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안경도 착용해 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한국 개신교회가 살아남을 방법은 바로 자신만의 안경이 가장 잘 보인다는 교만을 박살 내는 것입니다. 특히 정통이요, 근본이라는 안경을 과감히 내던져 버리고, 이제는 다른 이들의 안경도 착용해 볼 줄 아는 겸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지금 제가 말하는 바는 종교 다원주의적인 입장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진술임을 밝힙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안경이란 기독교 내에서의 안경(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생명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아픔 속에서도 과감하게 16세기 종교개혁 운동과는 다른 길을 걷기로 작정한 그래서 그들과는 구별된 존재들로 살아가고자 몸부림치던 '아나뱁티스트'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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