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 가지 꿈을 꾸듯이 나는 좀 종교적인 사람인지 스님도 되고 싶어 했고 교회 목사도 되고 싶어 했다. 한때는 스님이나 교회 목사라고 하면 똥도 안 누는 사람처럼 보여 나도 목사가 되어 보려고 안간힘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목사들을 보면 너무나 실망스럽다. 그렇게 존경스럽게 보이던 목사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분이 무슨 신기한 체험을 했다고 하면서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들어 놓고 목회자들을 무차별 공격하는 글을 보았다. 글의 내용이 광신적이고 편협한 유치함도 있었지만, 목회자들에 대해서는 아주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라 가슴이 아프다. 왜 이런 비판을 받게 되었을까?

신약성경에 묘사된 교회는 지금의 교회와는 전혀 딴판인 것을 볼 수 있다. 성서에 나타난 기독교는 모든 이론을 뛰어넘는 이상한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고, 또 그들이 추구하는 것도 오늘날의 교회와는 질적으로 그 차원을 달리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근 300년 동안 로마의 박해를 피해 카타콤이라는 로마의 지하 굴속에서 두더지처럼 생활하면서도 지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행복을 거부했다. 잡혀서 몽둥이로 맞아 죽고, 불로 태워 죽고, 사자의 밥이 되고, 끓는 기름 가마 속에서 죽고, 심지어는 톱으로 온몸을 산 채로 토막이 되어도 감사하면서 죽어 갔다. 그들의 죄목은 국가 곧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는 이유뿐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죽어 가는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했다.

오늘의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잦다. 그들의 메시지는 세상의 행복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책방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신학과 철학과 사회학과 처세론이라는 인간의 초등학문이 강단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들은 탐욕으로 가득 찬 민중의 귀를 즐겁게 해 주고, 이 소문에 몰려든 수많은 귀머거리와 장님들로 배를 불린다. 초대교인들과는 달리 물질로 유혹하는 세상에 대해 거부하는 몸짓이 없다.

시간이 촉박한 이 말세지말(末世之末)에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세속화시켜 성도를 물질에 병들게 한 이 모든 죗값은 인간의 초등학문으로 민중을 현혹하고 배를 불린 종교인들이 져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묵시도 없으면서 자신의 지식을 묵시로 빙자했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

홈페이지를 만든 그분의 말처럼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교회는 새로운 갱신의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는 안 된다. 종교가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선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