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 베푸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라고 한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이유를 이사야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주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감각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요 12:37-40)

"믿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종교적 믿음과 과학적 지식을 구별하려던 친구의 단호한 선언이었습니다. 지적인 열의에 가득 차 있던 대학 시절 잔디밭이나 길가 벤치에 앉아 주고받던 열띤 토론 중에는 하나님의 존재라는 주제가 항상 맴돌고 있었습니다.

과연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를까요?

- 나는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저격했다는 것을 안다.

- 나는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다.


두 문장에서 사용된 '안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은 다른 의미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안다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고, 믿는다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그는 분명하게 구분하였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안다는 행위의 내용을 좀더 면밀히 분석해 보면, 결국 안다는 얘기는 그렇게 믿는다는 말이며, 그 믿음에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다는 선언에 불과합니다. 안중근의 저격 사실을 안다는 말은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했다고 믿는다는 말과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그 믿음에 의혹의 여지가 없음을 확신한다는 무의식적 선언이 안다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토히로부미 저격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며 그에 관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고 주장을 해도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증인들의 기록들도 남아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록도 있고 역사가의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뜸 이토히로부미에 관한 기록은 객관적인 것이고, 예수의 부활에 관한 기록은 객관성이 없는 기록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불끈 일어서겠지요.

한번 따져볼까요? 이토히로부미의 저격에 관한 기록이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라는 게 무엇입니까? 결국은 그 기록에 대해 의심할 의사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그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 기록에 의심을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믿음일 뿐입니다. 기록의 객관성이라는 말은 결국 그 기록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의심할 만한 구석이 없다는 믿음이겠지요.

같은 논법으로 따져보면 예수의 부활에 관한 기록이 객관성이 없다는 말은 그 기록을 믿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려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따져보면,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는 그래서 믿을 수 없다는 그의 느낌이 꽈리를 틀고 심중에 앉아 있음을 봅니다. 왜 믿겨지지 않는 것일까요? 그의 경험이나 성향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의 경험이나 성향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까요? 거기까지 나가면 더 이상 뭐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인지 불가능의 영역이라고나 할까요?

결국 안다는 것은 믿는 다는 것이고 믿는 다는 것은 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객관성을 얻게 됩니다. 그 믿음이라는 것이 경험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경험적 근거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지식에 도달이라는 서구적 인식론의 모험은 결국 항상 난관에 부딪치고 맙니다.

성경을 보며 사람들은 황당한 얘기가 많다고 말합니다. 소위 이적(기적)이라고 불리는 성경의 기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현실적인 혹은 신화적인 상상력에 근거한 설화 내지는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해 조작해낸 일화 등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지구상에는 보통 인간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불구덩이 속을 거니는 장면이 나옵니다. 엄청난 열기가 피어오르는 불구덩이에 집어넣었건만, 그는 그 불구덩이 속을 태연히 거닐다가 몸에 덴 상처 하나 없이 다시 밖으로 나옵니다. 당장 성냥불만 갖다대도 살이 벌겋게 열이 오르는 판에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말짱하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얘기냐 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상식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혹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믿어'라는 것이 신앙인들의 반응입니다. 여기서 '안다' 파와 '믿는다' 파가 확실히 정체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사실을 아는 사람'과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라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리더스다이제스트사가 펴낸 <세계상식백과>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피지 군도의 작은 섬 '베카'라는 곳에서는 '음베테'라고 불리는 고승과 그 제자들에 의해 불 위를 걷는 의식이 행해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직경 4.5 내지 6m 정도의 구덩이를 1 내지 1.5m 깊이로 파냅니다. 통나무를 그 안에 잔뜩 쌓고 그 속에 돌을 집어넣습니다. 통나무가 타들어 가면서 돌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준비가 완전히 끝나면 '음베테'는 돌 위에 마른 잎을 뿌려봅니다. 그러면 금방 불길이 일어납니다. 돌이 달구어진 것입니다. 이윽고 고승과 제자들은 돌 위를 천천히 걸어다니다가 나오는데 상처 하나 생기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의식이 스리랑카 콜롬보 북쪽의 작은 어촌에서도 매해 벌어진다고 합니다. 또한 남부 인도의 일부 촌락에서도 해마다 벌어지는데 특히 '우다이푸르' 마을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불구덩이- 보통 8㎡ 에 1m 깊이-에 불이 준비되면 어찌나 뜨거운지 구경꾼은 10m 안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서양의 과학은 중화상을 입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이 불 위를 걸어다니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피지섬과 스리랑카에서 불 위를 걸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으나 발바닥에 화상은 전혀 없었으며 발바닥 피부의 감각도 정상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그 옛날 다니엘 때에도 있을 수 있었겠지요. 다니엘이 불구덩이를 태연히 거닐다가 상처 하나 없이 나왔다는 기록에 대한 입장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불구덩이 속을 손끝 하나 상하지 않고 걸어다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그럴 수는 없다고 믿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글 앞쪽에서는 '믿는다'라고 했던 것이 이제는 '안다'가 되어 버렸고, '안다'고 했던 것이 '믿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많은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눈으로 본 유대인들 중에도 믿지 않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앎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바로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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