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천당 불신 지옥'

기독교 복음을 단 두 마디로 압축한 이 구호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구호다. 1,000만 크리스천을 포함해서 5,000만 온 국민이 다 아는 구호가 되어 버렸다. 오죽하면 영화 제목도 '불신 지옥'이다. 이 복음 전도용 구호는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당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내용이다. 배움이 많지 못했던 최봉석 목사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던 이 전도용 구호는 당시 불학무식했던 민중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힘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힘이 최봉석 목사를 최권능 목사가 되게 했으리라.

하지만 오늘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는 대단한 것이어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이 구호를 피켓에 써 가지고 전도를 하면 무릎을 꿇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미친 놈 취급받기 딱 알맞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조차 이 구호를 사용하기 꺼린다. 그리고는 좀 더 세련된 전도법을 찾아 발표하기 바쁘다. 하지만 아무리 세련된 전도법을 만들어 봐도 그 밑바닥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세계관이 깔려 있기 마련이다. 사실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천당에 가고,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는 생각은 대충 어림잡아도 1,500년은 족히 된 것이다. 그러니 이게 어디 그리 쉽게 고쳐지겠는가.

하지만 최근 이 1,500년이나 된 천당과 지옥의 관점을 바꾸려고 애쓰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영국 성공회의 주교이자, 새 관점 학파의 리더 톰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이다. 그는 여러 면에서 굉장히 논쟁적인 학자인데, 필자가 보기에 그가 1,500년이나 된 천국관과 지옥관을 바꾸려고 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인물이 아닌가 싶다. 만일 그의 시도가 성공한다면, 어쩌면 그는 루터를 능가하는 거대한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자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루터는 1,000년을 뒤엎었지만, 라이트는 1,500년을 뒤엎는 것이니 말이다.

1. 전통적인 천국과 지옥관

한 전도인이 다가와 묻는다. "형제님, 오늘 죽으면 천국에 가실 수 있겠어요?" 이 짤막한 전도용 유도 질문은 뜻밖에 강력하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이 속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중요한 전제들이 상당히 들어 있다. 첫째, 천국은 죽으면 가는 곳이다. 살아서는 못 간다. 즉 천국과 지옥은 내세에 속한다. 살았을 때는 천국과 지옥을 보지 못하지만 일단 죽어 보면 '오늘 밤이라도'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둘째는 첫 번째 전제로부터 유추되는데 천국과 지옥은 영혼들의 운명과 관계된다. 죽은 뒤 몸은 땅에 묻히겠지만, 영혼은 어디론가 본래 가야 할 본향으로 간다는 것이다. 몸은 못 간다. 영혼들만 간다. 하여 천국과 지옥은 영혼들의 집합소다. 바로 이 때문에 '부활'은 생략되거나 축소되고 만다. 이것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천국과 지옥은 기본적으로 어떤 장소, 내지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하여간에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천국과 지옥이다.

셋째, 내세에는 천국과 지옥, 둘 중 한 곳밖에 갈 수 없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연옥'이나 '림보'에 대해서도 가르치지만, 개신교회는 전통적으로 두 곳에 대해서만 설교한다. 기본적으로 제 삼의 장소는 없다. 즉 원귀들이 떠도는 구천 같은 곳은 없다. 영원한 천국이냐, 영원한 지옥이냐, 양자택일밖에 없다. 넷째로, 천국은 엄청 좋은 곳이고, 지옥은 엄청 나쁜 곳이다. 그래서 천국은 내세의 유토피아고, 지옥은 내세의 디스토피아다. 다섯째,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영혼의 운명은 죽기 전에 살아 있을 때 결정할 수 있다. 자, 그러니 지금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라. 안 믿으면 지옥 간다!

이상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념은 무척 오래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칼 융(Karl Jung)이 말하는 집단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원형적 이미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거의 모든 문화권마다 이 땅의 삶에 대한 보상과 징벌을 받는 내세의 공간을 단정하고 있는데, 통상 천국과 지옥은 그러한 보상과 응보의 장치로 기능한다. 힌두교나 불교의 극락과 지옥 개념도 그 한 예다. 이러한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가 기독교 안에 자리 잡은 것은 대충 5~6세기 전후다. 그리고 지금까지 약 1,500년 동안 유지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떻게 생겼을까?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면 천국은 예수를 믿고 따라 산 신실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유토피아, 곧 낙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역사 속에서 이러한 천국의 이미지는 무척 다양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의 동산'을 연상시키는 전원적인 천국이 있는가 하면, 중세 도시를 닮은 다분히 도회적 천국도 있고,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연회나 미사, 혹은 골방에서 주님과 나누는 은밀하고 친밀한 사귐으로 상상이 되는가 하면, 혹은 온 우주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올려 드리는 거대한 합창제 같은 이미지 등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반면에 지옥은 놀라울 정도로 일관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나 개신교회 할 것 없이 천국보다는 지옥의 이미지를 훨씬 더 자주, 더 힘주어, 그리고 더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설교의 효과 면에서도 천국 설교보다는 지옥 설교가 전도나 교육 면에서 더 효과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기독교 복음은 천국 입장보다는 지옥 면피 수단으로 곡해되기도 했다. 즉 청중들은 천국에 대한 사모함보다는 지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예수를 믿고, 교회에 더 순종적이 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지옥은 시대마다,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어둡고, 침침하고, 뜨거운 유황불이 끓고, 온갖 더러운 곤충과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지상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고통보다도 훨씬 더 큰 고통을 받으며,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억만 겁의 세월을 다 지내도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으로 묘사되었다.

2. 톰 라이트의 지옥관

그런데 톰 라이트는 이러한 천국과 지옥관에 상당한 수정을 가한다. 우선 그의 지옥관부터 알아보자. 오늘날 지옥의 이미지는 과거에 비하면 힘을 많이 잃어버렸다. 왜 그렇게 된 걸까? 톰 라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역사가들은…지옥에 대한 믿음이, 세계대전을 통해 가장 크게 다쳤다고 주장했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29쪽)." 진짜로 양차 세계대전 때문에 전통적인 지옥관이 큰 타격을 입었는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현대인은 더는 지옥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기독교 서점가에는 '지옥은 확실히 있다'는 유의 간증집이나 설교집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 있다. 하지만 확실히 20세기 이후 현대인들에게 지옥에 대한 믿음은 19세기 이전 사람들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지옥관에 기대서 전도와 선교를 하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비효과적이 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톰 라이트의 염려이리라. 즉 기독교의 유치한 이미지들 때문에 어떤 사람은 아예 지옥을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보편주의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라고 톰 라이트는 추정하고 있다(<마침내…>, 276쪽).

가. 게헨나(Gehenna)

그렇다면 그는 지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우선 그는 신약학자답게 신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지옥(hell)'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살핀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지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게헨나(Gehenna)'이다. 그런데 이 게헨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를 음차(音借)한 헬라식 표기이다. 본래 게헨나의 히브리어는 '게 힌놈(Ge HinnomE)'인데, 이것은 '힌놈의 골짜기(수 14:8, 18:16, 느 11:30)'라는 뜻이다. 그리고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성 남서 쪽 모퉁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계곡의 이름이다. 예수 당시 이 계곡은 우리나라 난지도같이 일종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 때문에 게 힌놈은 이곳에 수북이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를 가리키기도 했다(<마침내…>, 276쪽).

좀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곳 힌놈의 골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 가나안 인들이 무척 신성시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타락해서는 이곳을 '바알'이나 '몰록'과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곳으로 삼게 된다. 특히 몰록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종종 아들을 불태워 죽이는 일들까지 심심찮게 일어났다. 후에 요시야왕은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이곳 힌놈의 골짜기에서 그 같은 가증한 일을 다시는 하지 못하도록 엄히 금했다. 이런 이유로 게 힌놈, 곧 힌놈의 골짜기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너무도 더럽고, 역겹고,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가 머무르는 곳처럼 여겨졌다. 그래선지 유대인들은 이곳에다가 쓰레기를 갖다 버리면서 이를 소각하기 위해서 늘 불을 피웠다. 게 힌놈의 꺼지지 않는 불은 쓰레기를 소각하던 실제 불이라고 보면 된다.

이러한 배경으로 보면 예수의 게헨나에 대한 경고는 상당히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생긴다. 예수께서는 여러 곳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게헨나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은 너무도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어서 게헨나에 던져질 바에는 차라리 손이나 발을 찍어 버리는 것이 낫다고 하시기까지 했다(마 5:30, 18:9, 막 9:43~47). 전통적으로는 이 본문을 당장 회개하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영원한 불구덩이에 집어 처넣으실 것이라고 해석해 왔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이러한 경고를 정치적으로 해석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무장 반란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주님께서는 '속히 이 같은 폭력적인 저항을 멈추라. 그렇지 않으면 로마군이 유대인들을 게헨나의 쓰레기더미처럼 만들어 버릴 것이다'라고 경고하셨다는 것이 톰 라이트의 해석이다(<마침내…>, 277쪽).

나. 톰 라이트가 생각하는 지옥

톰 라이트는 내세의 지옥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과 이미지를 철저히 깨부순다. 이러한 그의 태도가 지옥과 심판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 자신은 지옥을 부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전통적인 지옥관을 지지한다는 말도 아니다. 그는 전통적인 내세 지옥관을 가지고 있는 자를 교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전통적 교조주의 때문에 기독교가 오해를 사고 있다는 것이 톰 라이트의 생각이다. 동시에 그는 지옥이 아예 없다고 주장하는 자도 보편주의적 교조주의자라고 비난한다(<마침내…>, 279쪽). 톰 라이트는 1960~70년대 자유주의적 성향의 신학자들이 지옥과 심판을 부정했으나 최근 20년 동안 이러한 자유주의적 낙관주의는 실패했다고 선언한다(<마침내…>, 279~280쪽).

그는 분명히 말한다. "심판은 필요하다"고(<마침내…>, 280쪽). 아마도 이것은 톰 라이트와 최근 지옥 논쟁에 불을 지핀 랍벨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톰 라이트는 지옥을 실존한다고 보지만 랍벨은 보편 구원론과 불가지론 사이 어디엔가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사랑이 이긴다>, 168~169쪽).

톰 라이트는 볼프를 인용하며 '포용'이 필요하기 위해서는 '배제'도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악은 규명되고 해명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세상을 회복시키실 터인데 이 회복된 세상에는 지금 우리 세계를 왜곡시키는 모든 악에 대한 제거 작업이 반드시 들어 있을 것이다. 대량 학살, 핵폭탄, 유아 성매매, 제국의 교만 등은 심판을 받고 이 땅에서 제거될 것이다. 곧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것들, 그리고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은 제거되어야 온전한 회복이 가능하다(<마침내…>, 281-282쪽). 보편주의자들은 이 모든 악을 향한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 제거가 없는 양 주장하지만, 이것은 틀렸다.

한편, 존 스토트(John Stott)가 주장하여 삽시간에 기독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영혼 멸절설은 어떤가? 영혼 멸절설은 지옥을 가정하는 대신 지옥을 영혼의 소멸로 가정한다. 악인들의 영혼은 멸절되지만, 의인의 영혼은 멸절되지 않는다는 것이 영혼 멸절설의 핵심이다. 불멸성이 특정인에게만 주어진다는 점에서 톰 라이트는 이 이론을 '조건적 불멸설'이라고 부르고, 이 이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조건주의자들'이라고 칭한다.

적지 않은 전통주의자들은 멸절설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냈다. 살아생전에 그토록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악인이 아무 형벌도 받지 않고 그냥 편안히 사라진다고? 하지만 톰 라이트가 잘 지적했듯이, 사실 멸절설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무한히 복되고 아름다운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멸망시키신다는 데 있다(<마침내…>, 284~285쪽). 산 사람에게 죽음만큼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멸절설도 거부한다. 그러니까 그는 위의 세 가지 지옥에 대한 관점 모두를 거부하는 셈이다. 그러면서 그는 전통적인 지옥관과 멸절설을 결합한 새로운 지옥관, 곧 제4의 지옥의 이미지를 그려 낸다. 이것이 바로 그의 지옥관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지옥은 어떤 곳인가? 우선 그는 악인의 멸절은 성서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서가 "참인간 됨의 길을 저버린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있게 될 상태"에 대해서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마침내…>, 285쪽). 이 점에서 톰 라이트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부활할 것이며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전통주의자의 입장을 수용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하나님은 불신자를 유황불 못에 던지시는 잔인한 복수의 화신이 아니라는 '조건주의자들'의 견해도 수용한다. 그가 나름대로 단정하는 지옥은 어쩌면 로마서 1장 28절의 '하나님의 방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멸절시키시는 대신에 우상을 계속해서 숭배하도록 내어 버려두실 것이라고 가정한다. 즉 지옥이란 돈을 숭배하는 자가 계속 돈을 숭배하는 곳이며, 섹스광은 계속 섹스에 열광하는 곳이며, 권력에 중독된 자들은 더욱 극심하게 권력에 중독되는 곳이다.

그런데 왜 여기가 지옥인가? 인간은 사랑하고,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 가는 법인데, 만일 인간이 선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이 땅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을 예배한다면, 그는 점점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을 닮아 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점차 자신의 인간다움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끔찍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래서 돈을 숭배하는 자는 자신의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점점 돈과 같은 존재가 되어 갈 것이고, 성(sex)을 숭배하는 자는 점점 더 성도착증 환자가 되어 갈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이 바로 이러한 우상숭배자들 때문에 왜곡되고 파괴되었는데, 지옥에서는 그 극단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 톰 라이트의 상상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지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악인들은 "죽은 후에는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결국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다(<마침내…>, 285~286쪽).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은 무엇이든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예배하는 대상, 곧 사랑하는 대상을 닮아 가고, 그것에 노예가 된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일 수도 있고, 아니면 돈이나, 권력이나, 성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가게 될 것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종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올바른 모습으로 자유롭게 하신다. 결국,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그 본래의 설계대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예배하는 이들은 결국 자신이 예배하는 그 대상을 닮아 가며, 바로 그것에 노예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본래의 인간성에서 벗어나(하마르티아) 점점 더 딱하고 가련한 모습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옥이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이지 하나님께서 잔인하게 설계하고 건축한 알카트레이즈 같은 곳이 아니다.

다. 연옥은 존재하는가

지옥 얘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연옥이다. 종교 개혁가들은 면죄부 판매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던 중세 가톨릭교회의 연옥 관을 거세게 공격한 결과 내세는 천국과 지옥, 두 곳으로만 좁혀지게 되었다. 하지만 중세 1,000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톨릭교회는 연옥관을 유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칼 라너나 요셉 라칭거와 같은 일부 가톨릭 신학자들은 도리어 연옥 교리를 수정하려고 하지만, 도리어 비가톨릭 신학자 중에 연옥 교리를 슬그머니 빌려 쓰려고 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연옥의 교리가 얼마나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잘 보여 주는 반증이다.

연옥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연옥은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 전에 거치는 일종의 대기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대기 상태는 아직 덜 갚은 죗값을 받아야 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불순물을 정화하듯 정결케 되는 과정을 뜻하기도 하고, 좀 더 영적으로 성숙하는 성화의 과정을 뜻하기도 하고, 아직도 가야 할 남아 있는 여정으로 보기도 하며, 2% 정도 부족한 공덕을 채우는 과정으로 보기도 하며, 심지어는 산 자들의 중보 기도를 빌리는 상태로 묘사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가톨릭교회의 내세관은 온전한 신앙과 경건을 가진 성인들이 곧바로 직행한 천국이 있고,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대부분의 평범한 신자들을 위한 대기소로서 연옥과 이교도들을 위해서 준비된 지옥, 이렇게 세 곳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내세관은 중세가 깊어지면서 서서히 뚜렷하게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단테와 같은 창조적인 시인들에 의해서 생명력이 불어넣어졌다. 개신교회는 이러한 연옥을 부정하기는 했지만, 가톨릭교회의 내세관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여 자신들의 내세관을 구성했다. 그런데 최근 지옥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지옥 대신에 죄인이고 의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는 자신에게 합당한 성화와 성숙의 과정을 거친다고 가정함으로써 연옥 개념을 이끌어 온다(<마침내…>, 265쪽).

하지만 톰 라이트는 이러한 일체의 연옥관을 거부한다. 만일 연옥이 존재한다면 크리스천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된다. 한 부류는 곧바로 천국에 도착한 크리스천들이고, 또 한 부류는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게 될 크리스천들이다. 하지만 성서는 신자를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마침내…>, 266~267쪽). 단지 영광스럽게 구원에 이른 신자와 겨우 부끄럽게 구원에 이른 신자로 나뉠 수 있다고는 말하지만 말이다(<마침내…>, 267쪽). 신약성서가 보여 주는 것은 오직 구원에 이른 자와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 두 부류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만일 남은 죗값을 지급해야 한다거나, 뭔가 좀 더 수양해야 한다거나, 공덕을 쌓아야 참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는 이들은 바울을 모독하는 자들이다(<마침내…>, 169쪽). (계속)

신광은 / 열음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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