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긴 것 같지만 아주 짧다. 어제 유년의 뒷동산을 뛰어 놀았던 것 같은데 벌써 20년, 30년,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연세가 일흔이나 여든 되신 어르신들은 한결같이 당신들이 살아오신 세월을 말씀하시기를 “순식간에 흘러왔어” “눈 깜짝할 사이지” “인생은 금방이야” 그러신다.

어느 시인은 인생을 하루로 표현했다. 하루의 짧은 삶이 곧 인생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 70∼80년 사는 것과 하루살이 벌레가 하루를 사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요, 결론적으로 보면 한 번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100년을 사는 것과 하루살이 풀벌레가 하루를 사는 것은 같다.

그런 면에서 우리 인생도 하루살이다. 그래서 김흥호 선생은 “사람은 어제를 사는 것도 아니고 오늘을 사는 것도 아니고 내일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단 하루를 삽니다. 사람은 아침을 살고 대낮을 살며 저녁을 살고 한밤을 삽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하루가 모여 1년 365일, 그 1년의 하루가 모여 며칠 하는 식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10년을 살든 100년을 살든 우리 인생은 다만 하루를 살 뿐이다. 오직 우리 인생은 어제를 그리며 사는 것도 아니고 내일을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오늘에 쫓기며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루를 살 뿐이다.

하루를 참되게 살다가 해가 진 뒤에 하루살이들은 겉옷을 벗고 하늘로 올라간다. 마치 스님들이 입적하듯 세상에 하루의 삶을 벗어나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살이는 하늘살이이다.

눈 깜짝할 사이인 우리의 삶

하루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순간만 있을 뿐이다. 찰나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이란 순간이요, 찰나이다.

오랜 전통을 사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역사를 사는 것도 아니며, 장밋빛 미래를 사는 것도 아니다. 또 지나 가버린 아침 햇살을 그리며 사는 것도 아니며, 또 저녁밥 짓는 연기를 기다리며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이 찰나만을 살 뿐이다. 그래서 찰나는 사람을 깨어나게 하고, 찰나는 사람을 창조하며, 찰나는 사람을 사람되게 한다.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다.

남녀가 눈빛이 마주치는 지점은 찰나이다. 예술가가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그리는 것 또한 순간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것 또한 눈 깜짝할 사이이다. ??리는 찰나를 살아야지, 지루한 전통이나 희미한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삶의 한가운데에서 순간, 찰나를 사는 것이다.

이 찰나 속에는 영원이 담겨져 있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하루의 삶 속에 순간과 영원이 있듯이,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누가복음 8장40절 이하에 보면,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발 앞에 엎드려 자기 집에 와주시기를 간청했다. 그의 열두 살 된 외동딸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 집으로 가려고 하니 군중이 그를 에워싸고 떠밀며 쫓아갔다. 그런데 그 군중 틈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가산마저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 병을 고쳐주지 못했다. 그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즉시, 그 순간에 출혈이 그쳤다.

이 여자가 예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찰나에 피가 멎었다. 바로 순간 속에 구원이 있는 것이요, 영원이 있는 것이요, 찰나 속에 영생이 있는 것이다. 이 여자는 순간을 살았으며 영원을 누렸다.

여자가 손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지자, 예수께서 “누가 내 옷자락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선생님, 군중이 이렇게 선생님을 에워싸고 마구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바로 여기에서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여자는 찰나를 살아 영원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많은 군중들은 바로 예수님이 옆에 있는데 밀고 밀리며 예수님 옷을 만지고 닿았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런 느낌도 없으며, 아무런 변화도 없다.

마치 우리가 교회에 수없이 와도 아무런 느낌도,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처럼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는 들락날락하며 수없이 많은 설교와 기도와 헌금 생활을 하면서도, 군중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혈우병을 앓고 있는 이 여인은 순간을 살았지만, 영원을 맛보았다. 아주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찰나에 영원을 경험했다.

주님은 언제나 순간 속에 계신 분이다. 그 여자가 자신의 옷에 손을 대자 순간 기적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셨다.

“누군가가 내 옷에 손을 댄 것이 틀림없다.”

수없이 많은 군중들의 손에 만져지고 찢겨져도 느껴지지 않던 주님께서 어찌 그 여자의 손이 닿은 것만을 느끼셨을까. 주님도 순간을 사시는 분이요. 찰나 속에서 영원을 사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여인의 믿음과 군중의 믿음

여자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것을 알고 떨면서 앞으로 나아가 엎드리며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이유며 병이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여인과 군중들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여인에게는 믿음이 있었고, 군중들에게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믿음 없이는 순간도 찰나도 없으며, 영원을 살 수 없다. 그 여인에게는 순간을 살 수 있는 마음, 찰나를 느낄 수 있는 진실됨, 순간과 찰나를 살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영원을 사는 것 같지만 하루를 사는 것이요,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하루 속에, 지금 이 순간 속에, 지금 내가 만나는 이 사람 속에, 내가 지금 바라보는 한 송이 꽃 속에, 지금 내가 느끼는 바람 속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러할 뿐 주님을 만날 때, 그 순간, 그 찰나는 하루의 삶 속에서 늘 존재하는 것이다.

신앙인은 순간 속에 영원을 맛보는 자이다. 열두 해 동안 혈우병을 앓은 여인처럼 예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피가 멎는 은총을 맛보며 사는 자이다.

채희동 / 벧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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