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이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미국 출판계의 이상한 조짐을 접했다. 아직 출판도 안 된 책에 대해 혹평이 속속 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상은 속칭 '기독교계의 록스타'라 불리던 마스힐바이블교회의 랍 벨(Rob Bell) 목사가 쓴 신간이고,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지옥'이라고 알려졌다.

포문을 연 사람은 크로스웨이 부회장인 저스틴 테일러, 그는 랍 벨을 일컬어 '거짓 교사(false teacher)' 노릇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미국의 대표적인 개혁 주의파 설교자 존 파이퍼(John Piper)가 "잘 가게, 랍 벨(farewell, Rob Bell)"이라고 트위터에 올리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달아올랐다. 개혁파 기독교 지도자들은 공공연히 랍 벨의 이번 책을 이단시하였고, 자유주의(liberalism)나 보편구원론(universal salvation)으로 빠졌다는 등 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최대의 악담으로 비난을 날렸다. 이 모든 일이 아직 책이 출판도 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랍 벨(?), 혹은 출판사 측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유진 피터슨이 이 책을 옹호하는 추천사를 정면으로 썼다. 풀러신학교의 리차드 마우 총장도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이 책을 옹호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천국에 들여보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랍 벨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왜 너무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는가?"고 되물었다.

이런 와중에 책은 아마존 종합 2위까지 오를 정도로 대중적 주목을 얻었다. 이런 내력을 갖고 있는 이 책이 신속하게 번역되었고, 국내에 소개되었다. 출판사 측의 고민은 양가적이다. 국내 판에는 김영봉 목사의 '신중한' 추천사가 비중 있게 실려 있는 반면, 여러 매체에 등장하는 광고는 상당히 '공세적'이다. 우선, 이런 식으로 이식된 논쟁 구도를 국내에서 재생산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란 점을 먼저 밝혀 둔다. 미국 출판계의 트렌드를 좇아가며 책을 내노라면, 없던 문제도 만들어 내는 재주를 부려야 한다. 정작 중요한 우리 독자들의 관심사와 한국교회의 이슈들은 그만한 주목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이란 주제가 갖는 폭발성은 국내에서는 다른 맥락으로 옮겨 붙는다. 최근 적잖은 현장 사역자들이 감지하고 있는 이슈 중 하나가 바로 '천국'과 '지옥'이다. 교계 상층부가 온갖 스캔들로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는 와중에 저변의 탁류 중 하나로 내세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고 있는 셈인데, 간단히 보면 한 10년마다 찾아오는 유행 같기도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경향이 자주 포착된다.

'천국 다녀왔다는 간증', '지옥에 대한 살벌한 설교'가 적절한 종말론적 예언이나 신유 집회와 섞이면서 거리낌 없이 증폭된다. 명동 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깃발이 점점 대형화되는 것은 사실 이런 저변의 흐름과 연관이 있다. 이런 대중적 말세 신앙이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직접적으로 개신교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국·지옥' 논의는 단순한 신학적 궁금증을 넘어선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출판계는 <사랑이 이긴다>를 만났다.

그래서 '지옥'이 있다는 건가, 없다는 건가?

책 출판 전에 이미 논쟁의 구도가 이토록 촘촘하다면, 사실 책 읽기의 흥미는 떨어진다. 지옥론에 관한 이런 저런 신학적 논의 범주들 중에 저자는 어느 입장인지를 가늠하는 '증거 본문(proof text)' 찾기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정작 책을 받아서 읽어 보니 정색하고 논쟁을 벌일 대목은 그리 많지가 않다. 오히려 미려한 문장과 비유로 잘 짜여진 한 편의 육성 설교를 접하는 것과 같은 감동이 있다. 많은 독자들이 묻고 싶었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던 질문을 저자의 글에서 반갑게 만났다고 했다. 혹은 한때 의문을 가졌다가 지금은 덮어 버린 질문을 다시 해 보도록 격려해 주는 느낌을 받는다.

랍 벨의 책은 기독교인들이 제일 자신 있게 대답하던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되묻는데, 독자는 갑자기 무장해제가 되어 "사실은 나도 잘 모른다"고 털어놓고, "나도 그것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고 시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는 천국에 대해, 지옥에 대해, 구원에 대해, 교회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묻는다. 그냥 묻는 것도 아니고, 행간을 넓게 벌려 놓고, 잠시 생각한 다음에 답하도록 기다려 주기까지 한다.

그가 지금 문제 삼는 것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토록 확신 있게 휘두르는 심판의 칼부림을 대체 어디서 배워 왔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에 따르면, 아니다. 아니, 사실은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꾸짖고, 깨우치는 내용이 바로 그런 그릇된 구원 이해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당연히 누군가는 자신이 비난당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 평생 집을 지켰던 큰형이 느꼈을 노여움과 유사하다.

랍 벨은 천국과 지옥의 개념에 대한 인류학적, 비교종교학적 논의를 시도하지는 않는다. 다만, 성경 내의 주요한 개념과 비유들을 효과적으로 다루면서 그 대비를 한껏 부각시켜 준다.

먼저는 '영생(eternal life)'은 '영원히 이어지는 생명'이란 의미가 아니라, '다른 세대(age) 혹은 시대에 속한 생명'이란 의미라고 되새겨 준다(제2장). 이를 통해 '이곳에서 저곳으로'란 공간적 이동의 이미지로 주로 묘사되는 천국·지옥 개념이 시간적 개념으로 재인식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세대를 뜻하는 '아이온(aion)'의 의미를 잘 새겨 놓은 것도 유익하다. 서로 다른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시공간 속에 포개어진 두 개의 서로 다른 시간성의 양상으로 천국과 지옥을 생각해 보자는 제안인 것이다. 이는 후반부의 '돌아온 탕자' 비유의 해석에서 다시금 재적용되는데, 똑같은 사건과 상황 속에 놓여 있지만 어떤 자기 이해를 갖느냐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하나는 천국의 메시지가 되고, 다른 하나는 지옥의 메시지가 된다.

또한, 그는 '지옥(hell)'으로 종종 번역되는 성경의 주요 구절들에서 사용되는 용어, 구약의 '스올'과 신약의 '게헨나' 등의 용례를 살펴보면서, 정작 내세적 의미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오히려 '저 세상으로 유보된 지옥'이 아니라, '이 땅에서 지금 체험하는 지옥'을 상상할 수 있어야 성경의 메시지에 더 잘 반응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제3장). 랍 벨은 그리고 나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미치는 범위와 영향력을 재평가하도록 요구한다(제4장 이후). 복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에서 전혀 뜻밖의 사람들까지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더욱 집요하고도 철저한 회복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감히 말하자면 '지옥' 자체에 대해 시비를 거는 책이 아니다. 기존의 지옥 논의에 어떤 결핍과 결함이 있는지를 논증하는 작업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더 심오한 목표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바로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 자체를 묻는 것이다. 그동안 '천국·지옥' 이야기로 쉽고 편하게 '구원'을 독점적으로 논하던 시절을 뒤로하고, 불러낼 질문들 다 무대에 올려놓고서도 전개할 수 있는 구원론은 대체 어떤 모양과 내용으로 나타나야 하겠느냐를 묻자는 작업이라고 보아야 옳다.

천국과 지옥을 굳이 내세로 넘겨 놓지 않아도 지금 이곳에서 맞닥뜨리는 삶의 현장에서 씨름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살아 내도록 하는 것. 때로 미묘하고 자주 미끄럽고 종종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흑백논리로 살균 방부 처리된 단순한 평온으로 도피하지 않고 삶을 맞이하고자 할 때 신뢰할 수 있는 대화의 파트너가 되려면 어떻게 이런 질문을 외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 말해야 할 것을 말하는 것!!

그간 지옥·천국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그림 용어들의 제한성을 되새겨 준 것도 좋았다. 영원한 고통(eternal torment), 꺼지지 않는 불(unquenchable fire) 등의 이미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영상으로 여겨져 왔다.

한동안 '수정주의 지옥관'이라며 논란이 되었던 영혼멸절설(annihilation)은 몰트만에 따르면, 사실 지옥의 부재를 말하기보다는 고전적 지옥관이 갖고 있는 중세적 이미지를 좀 더 현대적 개념으로 대체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마치 천국 다녀왔다는 간증에서 길은 황금으로, 집은 다이아몬드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다거나, 믿음의 크기에 따라 집(mansion)의 평수가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갖는 모순성과도 유사하다. 이 땅에서나 의미 있는 보석류와 집 크기가 그곳에서도 여전히 비교의 잣대로 유효하다는 말이 되는 셈인데, 그것은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결핍에 대한 보상으로서는 유효할지 모르나, 천국 자체가 어떤 곳인가를 말하는 데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랍 벨의 메시지에는 '어느 정도' 보편주의적 전망이 엿보인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심술궂게 묻고 싶어진다. 보편주의적 전망을 갖고 있으면 안 되는가? 흔히 배타주의(exclusivism), 혹은 특수 주의라고 불리는 관점만이 유일하게 옳은가? 구약을 읽어 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써 내려온 구약의 서술이 순간 순간 멈칫하며 비약하는 대목을 만난다. 이사야가 그랬고, 수많은 다른 선지자들이 그랬다. 그날에는 모든 이들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민족과 나라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서 말이다. 종종 선민 이스라엘이 고꾸라지고, 이방 민족이 쓰임 받는 순간들을 만난다. 언약 백성의 반열에 당혹스런 이방인들이 적잖게 끼어 있다.

구약은 매 순간 일방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종종 선민의 버림받은 처지와 이방인들이 역설적으로 믿음의 백성으로 간주되는 상황을 돌출적으로 드러낸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상황은 더하다. 잘 알다시피 사도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이방인 선교를 놓고 정면 대립했다. 성경의 특수 주의는 보편주의적 전망 안에서만 유효했다.

물론, 우리의 균형감 있고 체계화된 신학은 이런 보편주의에 오래 머물지 않고 명료한 구원론에 바탕을 두고,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 감당할 선교적 과업을 설파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바 된 '흑암에 머무는 저들'을 향한 구령의 열정을 끓어오르게 한다. 우리의 보편은 언제나 특수 주의의 확장으로서만 정당화된다. 전도나 선교를 경유하지 않고, 만민에게 나아가는 법이란 없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성경은 종종 우리를 놀래키지 않는가 말이다. 성큼 만민을 복음의 대상으로 포괄해 버리지 않는가? 오히려 구원받았다는 선민들이 버림받을 가능성이 더 집요한 의문 거리 아니었는가(롬 9:9~11). 나는 랍 벨의 책에서 아직 기독교 설교자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매우 드물게 발견되는 그 통찰이 성공적으로 포착된 것을 보았고, 이것이 그의 책이 성취한 가장 큰 기여라고 생각한다(그의 전 작품인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의 영어 제목이 <Jesus Wants to Save Christians> 였다).

구원의 가능성이 선민들 내부에서 역전될(된) 상황을 정직하게 관찰하고, 이를 냉정하게 묘사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 기대치 않았던 외부 세력들에게 구원의 여지가 조건 없이 개방되어 버리는 현상을 당하는 것. 예수의 비유에서는 자주 이런 역전이 벌어졌고, 그것이 당대의 신심 깊은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도무지 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세리, 창녀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고 구원을 위해 경건한 삶을 추구해 온 바리새인, 서기관을 다 내모는 논법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들의 고민을 이해한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예수를 따라나선 사람들이지, 자존감에 흠집이 난 유대인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되새김질해야 할 사람들 아니었던가? 랍 벨은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을 따름이다.

성서학자들은 성경이 어느 한 주제로 깔끔하게 재단되지 않음을 솔직히 인정해 왔다. 좀 더 정직한 접근이라면, 자신이 선 신학적 입장의 주조음 위에 끊임없이 변주되고, 이탈하는 소리가 성경 안에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랍 벨은 특히나 배타주의적 구원관 위에서 '천국·지옥'을 손쉬운 출입문 삼아 구원을 말해 온 '복음주의·근본주의' 신앙인들에게, 성경이 집요하게 전달해 온 구원의 메시지는 우리가 친숙히 여겨 온 것보다는 훨씬 크고, 때로 낯설고, 어떤 경우는 당황스러운 것임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복음주의·근본주의' 혹은 '개혁 주의'와 굳이 배치되는 것이라 볼 수 없다는 얘기를 전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흔쾌히 동의한다. 랍 벨의 이 책을 나는 기쁘게 추천한다.

양희송 /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전 <복음과상황> 편집장
이 글은 <기독교사상> 10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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