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우리 교회에서는 성만찬을 거행하였다. 예전에는 매번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찬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우리 교회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정도 성찬식을 거행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주 성찬식을 거행하지 못하는 것이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칼뱅이 참된 교회임을 알 수 있는 표식(signs) 가운데 하나로 '바른 성례의 시행'을 말한 것은, 성찬식을 예배 때마다 항상 해야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미신적이고 잘못된 관점에서의 '성찬식'을 시행하는 것이 옳지 않으며 바른 성경적 관점에서의 성찬식이 거행되어야 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집례하신 첫 번째 성만찬은 그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것을 시행한 것이라기보다는, 유대인들이 항상 지켜오던 유월절 식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구원받았던 것을 기념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해마다 3월이나 4월경에 유월절을 지켰는데 그때 어린 양을 잡아 함께 먹고 발효되지 않은 반죽으로 만든 빵을 먹었었다.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은 바로 그 유월절 식사였다. 다만 예수님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요 1:29), 죽임을 당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다. 그 옛날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장자의 재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런데 이 놀라운 사랑이 제시되는 그 자리에 가룟 유다가 같이 앉아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가장 성스러운 자리에, 가장 더러운 흑심을 품은 자가 함께 앉아 그 성만찬을 먹었던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이 있기 전까지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현실일 것이다. 천국이 온전히 도래하기 전까지 알곡과 가라지는 섞여 있게 마련이다(마 13:24~30). 교회 안에 이런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신앙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교회와 목사의 잘못이 공개적으로 방송으로 비난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우리가 신앙을 저버려야 할 이유는 아니다. 오늘날의 가룟 유다는 목사의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기독교 대표주자의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런 모습 때문에 신앙을 저버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만찬의 자리에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6:28).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겠다고 하는 주님의 사랑의 약속이었던 것이다.

지난주 토요일 우리 교회 청년이 결혼을 하였다. 나는 결혼식에만 가면 그렇게 감동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남모르게 눈물을 훔쳐 닦는다. 제일 감동적인 부분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서약하는 장면이다. 지난주에도 그 신랑과 신부는 이렇게 서약을 했다. "나는 당신을 나의 아내로 맞이하여, 오늘부터 앞으로, 당신을 취하고 보호할 것입니다. 좋은 때나 어려울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사랑하고 아낄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나의 신실함을 약속합니다." 이런 서약을 들으면서, 나는 감동한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라고 가르친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사랑하시겠다는 사랑의 약속이 성만찬인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다(요 10:18, 마 26:52~54).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시고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으셨다. 그리고 그 사랑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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